“이번 앨범은 제 딸이 들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소격동’은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크리스말로윈’에서는 이 세상은 녹록치 않으니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나인티스 아이콘’은 아버지가 예전에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고요. 스토리텔링 속에 한 소녀가 있는데 그게 제 딸이에요. 음반재킷도 딸의 7살 정도의 모습을 담은 겁니다. ‘성탄절의 기적’은 태교음악으로 만들었어요.”

기자회견에서 서태지는 새 앨범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의 뮤즈가 자신의 딸 ‘삑뽁이’라고 밝혔다. 격세지감이었다. 천하의 서태지가 아빠가 돼 딸을 위한 앨범을 만들게 될 줄이야. 존 레논도 오노 요코와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션 레논을 위해 ‘더블 판타지(Double Fantasy)’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먼 나라 영국 아티스트이고 옛날 일이라 와 닿지 않는다. 한때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가 ‘시대유감’의 가사에 수정을 요구하자 항의의 뜻으로 반주만 음반에 실었던 서태지였다.(이 일을 계기로 팬덤이 일어서면서 정태춘 등의 주도했던 ‘사전심의철폐’가 여론의 힘을 얻게 된다) ‘울트라맨이야’를 외치며 그로울링을 지르던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분노를 씹어 먹은 음악을 만들지 못할망정 태교음악(성탄절의 기적)을 만들어 뱃속의 딸에게 들려주기나 하고 말이다. 로커의 정체성을 가진 이가 할 일인가?뭐, 서태지가 로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로커는 아니다. 음악평론가 김윤하 씨는 “서태지를 록 뮤지션으로 여기고 그가 록을 하는 것에 대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서태지는 여태껏 록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최신 음악을 계속 듣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마치 피규어처럼 만들어서 대중에게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맞다. 서태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해왔을 뿐이다.



서태지는 프린스(Prince)처럼 일정한 장르를 냅다 파고, 그 안에서 끝을 보는(결국 혁신을 이뤄내는) 그런 성격의 아티스트는 아니다. 서태지가 문익점처럼 해외 여러 트렌드를 가지고 왔다고 하지만, 사실 어렸을 적부터 했던 록을 제외한 다른 장르를 그렇게 깊게 파고 들어간 적은 별로 없다. ‘난 알아요’ 때부터 록을 기본으로 두고 랩, 댄스를 들여왔다. 팬들은 어떻게 들었을지 모르지만, 1집부터 악기의 소리 하나하나가 잘 들리는 밴드음악을, 그는 해왔다. 댄스음악을 하기 위해 양현석에 춤을 배우고, 또 미디(컴퓨터 음악)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친 날카로운 경력을 가진 연주자이기 때문이다.‘콰이어트 나이트’에서 서태지는 최근 세계적으로 대세를 이루는 일렉트로니카의 하위 장르인 트랩, 덥스텝의 영향이 느껴지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음악평론가 배순탁 씨는 “서태지 음악이 항상 그렇듯이 세계적인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명민함을 느낄 수 있다. 지금 팝계의 트렌드가 80년대 뉴웨이브를 동시대적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 서태지의 신보에 대해 ‘멜버른 바운스’ 또는 칠스텝(Chillstep, 칠아웃에 덥스텝을 더한 것) 등의 장르들이 거론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80년대 신스팝의 어법도 느껴지고 있으며, 기본적으로는 밴드의 사운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확실히 서태지는 신스 일렉트로닉 장르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컴백 콘서트에서도 서태지는 예전 곡들은 ‘뿅뿅’거리는 신디사이저가 강조된 신스 록으로 편곡을 해서 들려줬다. 과거에 두 대의 기타가 내던 사운드는 TOP의 기타와 스킴의 건반으로 대체됐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라이브에서 구현하기 위한 밴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재즈계에서 무서운 신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스킴을 초빙한 것은 사운드를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태지는 “새 음반은 서태지와 아이들 작법처럼 건반으로 곡을 만들었다. 그래서 신디사이저가 중요한 사운드가 됐다”고 말했다. 이 말마따나, ‘콰이어트 나이트’는 솔로앨범 중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감수성에 가장 근접한 편이다. ‘숲속의 파이터’ ‘비록’과 같이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디는 확실히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을 연상케 한다. ‘소격동’에 대해 음악평론가 김두완 씨는 “최근 경향인 일렉트로 팝을 나름 차용을 하고는 있지만 그 안에 서태지 특유의 리듬감 있는 멜로디가 잘 살아있다. 가령 ‘우리들만의 추억’처럼 멜로디에 리듬감을 부여함으로써 뒤에 깔린 사운드의 지루함을 상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테크노 리믹스 등을 통해 전자음악을 시도했을 때 그것은 분명 신선하고 낯선 음악이었고, 또 잘 만든 음악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2집에 실린 ‘수시아’를 지금 들어보면 이런 진보적인 음악에 당시 여중, 여고생들이 열광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뿐이다.(이 곡은 당시 가요 bpm 기록을 갱신했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콰이어트 나이트’에 실린 사운드는 20년 전 서태지가 했던 것처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울트라 맨이야’를 했던 때에도 그 음악은 이미 홍대 인디 록 신에서 한창 유행하던 음악이었다. 더 이상 첨단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서태지로 인해 이 장르가 대중적으로 더 알려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9집 ‘크리스말로윈’ 덕분에 신스 일렉트로닉 장르가 유행하게 될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서태지 본인도 기자회견에서 인정했듯이 그의 음악도 이제는 주변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이번 활동을 통해 이승환처럼 ‘음원차트 광탈’도 경험했다. 그동안 서태지의 화려한 컴백이 가능했던 이유는 절대 팬덤, 그리고 혁신적인 음악 두 가지 덕분이었다. 이제는 이 둘 다 힘을 많이 잃은 상황이다. 현실은 잔인했다. 나이를 들어가면 팬덤도 창의력도 줄어든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서태지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이혼과 결혼으로 인해 팬덤이 돌아선 것은 서태지에게는 큰 타격이다. 그동안 서태지가 음악으로 마음껏 붓을 놀릴 수 있었던 것은, 뭘 하든지 자신을 지지해주는 팬들 덕분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서태지의 가장 코어한 팬덤은 75~80년생 여성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연령대는 한창 미취학 아동을 기르는 층으로 문화생활과는 가장 거리가 먼 이들이기도 하다. ‘딸바보’가 된 서태지처럼 팬들도 인생의 변화를 맞고 있다. 때문에 지금을 서태지의 최대 위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팬덤은 연어처럼 돌아올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서태지는 썩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서태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92년에 데뷔했으니 20년 지난 가수 아닌가. 가수가 단명하는 가요계에서 퇴물도 벌써 퇴물이 됐을 나이다. 하지만 서태지는 ‘콰이어트 나이트’에서 적어도 서태지다운 ‘꽤 멋진’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항상 자신을 위해 음악을 만들어온 서태지가 다른 사람(딸)을 위해 음악을 만들다니, 이것은 수련으로 인한 ‘성장’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2차 성징’ 정도로 보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어쩌면 또 다른 음악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변지은 인턴기자 qus1228@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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