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에서 이어짐) 리더 이용원은 인디음악의 성지인 라이브클럽 드럭에서 활동을 시작한 1세대 인디뮤지션이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자조적인 글은 이 땅에서 음악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증명한다. “벌써 18년째 공연을 했구나. 내 나이 꽃다운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하바닥에서 보냈네. 피래미 22살에 일본에 진출하여 많이 배우고 지금까지 라이브를 한다네. 난 지금 두 아이의 아빠로써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기타를 치지 않는다네! 음악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네….적어도 한국에서는.”


이용원은 서울 봉천동의 한 산부인과에서 1980년 8월 23일 김포에서 동물농장을 운영했던 종가집의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와 큰 누나는 무려 14살의 연배차이가 난다. 아들 손이 귀했던 집안의 3대 독자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많이 까불고 활발한 성격이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이 강한 아이였다. 공부는 보통이었고 AFKN 라디오를 즐겨들었을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누나의 LP판을 들으며 성장한 그는 용돈을 아껴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가 수록된 해적판을 구입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건즈 앤 로지스의 라이브 빽판을 처음 샀는데 뮤지션이 되고 싶어 하드보드를 이용해 기타를 만들어 치는 시늉을 냈었죠. 다른 밴드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건스 앤 로지스만이 제 영웅이었죠. 누나가 좋아했던 신해철의 무한궤도도 좋아했습니다. 뉴키즈온더블록의 ‘스텝 바이 스텝’을 장기자랑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춤췄던 기억도 납니다.”(이용원)
이용원 어린 시절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세계적인 록커를 꿈꾸며 밴드 결성을 갈망했다. 봉천중 1학년 때 회연지하상가에서 구입한 해적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셋째 누나의 클래식기타로 코드 연습을 독학으로 시작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한 달 정도 코드 배우러 동네 레코드가게 아저씨에게 기타코드를 배우면서 너바나 풍의 창작곡 ‘지저스’를 만들었다. 가사는 영어로 썼죠. 당시 노래를 참 많이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엉망이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녹음을 해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대단하다는 반응에 기분이 으쓱했었죠.”(이용원)

봉천중에는 전교에 기타 치는 아이가 거의 없었다. 학교친구 김수영과 건즈 앤 로지스 카피밴드인 2인조 ‘써킹 피그’를 결성했지만 드럼을 구하지 못해 연습만 하다 끝났다. 인헌고에 진학하면서 엄청난 사춘기가 찾아왔다. 학교에 나가지 않았던 그는 문일고로 옮겼다. “아버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음악하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 전교 1등까지 했는데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반항했던 저는 많이 맞았고 심지어 집에 가둬두기도 했습니다.”(이용원) 이후 수업시간에 잠만 잤던 그에게 선생님이 ‘인간문화재’라는 별명을 붙였다. “심지어 외출증을 끊어줘 오락실에서 살았죠. 고3이 되자 부모님이 학교가 불려가 자퇴를 종용당했을 정도로 주위에서 포기한 아이였지만 졸업은 했습니다.”(이용원)
껌엑스 시절

그린데이(Green Day), 노에프엑스(Nofx), 랜시드(Rancid) 등 펑크음악에 경도된 고1 이용원은 정확하게 1996년 12월 21일 3인조 밴드 ‘껌’을 결성해 라이브 클럽 드럭에서 활동 시작해 2002년까지 활동하며 정규와 미니앨범을 각각 1장씩 발표했다. 이용원(보컬&기타) 이근영(베이스) 최건(드럼)으로 구성된 껌엑스의 시작은 1996년 ‘우리의 음악을 마음껏 씹어달라’라는 의미로 신촌과 홍대 주변에서 클럽공연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명동에 있었던 드림온 레코드의 단골이었죠. 밴드를 한다고 하니 사장님이 일본에 보내 줄 수 있다며 같이하자고 하더군요.”(이용원) 한국 밴드로는 처음으로 일본 기획사 토이즈 팩토리(Toy’s Factory)와 계약한 후. ‘우리는 더 이상 껌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X를 붙여 밴드이름을 ‘껌엑스(GUMX)’로 변경했다. 후지 록 페스티발을 시작으로 2003년 1집 ‘What’s Been Up?’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발매했다. 음반은 한 달 만에 5만장이 팔려나가며 일본 전국투어 전회 매진이라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껌엑스 시절
이듬해 발표한 2집 ‘그린 프레이크질라(Green Freakzilla)’는 ‘펑크앨범의 결정체’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류밴드의 힘을 일본에 과시했다. “회사가 준메이저급 회사라 1집이 10만장정도 팔렸습니다. 이전에 시나위 등이 라이센스 계약을 한 적은 있지만 국내밴드가 일본현지에서 앨범내고 활동까지 한 것은 저희가 처음으로 압니다. 당시 시부야 전광판에 저희 뮤직비디오가 나왔을 정도로 현지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회사에서 초판이 2,500장 이상 나가지 않으면 계약을 접는다 했는데 나오자마자 7천장이 팔렸죠. 길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봤고 저희 핸드폰 벨소리가 유행했을 정도였죠. 일본 평크 쪽엔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흐름이 있는데 당시 펑크 붐이 대단했었죠. 투어 한 번 하면 20일 정도 일본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오고, 또 이벤트가 있으면 나갔다 들어오는 식으로 활동을 했습니다.”(이용원)

껌엑스 시절

일본에서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펑크 씬이 없는 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26살이 된 이용원과 멤버들은 2005년부터 2007년 군대에 갔다. 전역 후 2008년에 3집 ‘올드(OLD)’를 발표했지만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아 의욕이 사라졌다. 2009년 12월, 건즈 앤 로지스 내한공연에 게스트로 오른 이후 껌액스는 활동을 접었다. “구체적으로 장르는 정하지 않았지만 껌엑스의 마니아적인 펑크에다 어렵지 않고 멜로디가 강한 음악을 하는 라이브밴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 멜로디라 생각하거든요.”(이용원) (PART3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올드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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