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도 선비가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싶다. 한마디를 해도 허투루 내뱉는 법이 없고, 말하는 표정과 목소리에는 자신감을 넘어선 확신이 가득하다. ‘착하다’, ‘진지하다’라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매력, 직접 마주한 배우 윤시윤의 이미지다.

그런 윤시윤은 지난 3개월간 KBS2 ‘총리와 나’ 속 강인호로 살았다. 극 중 총리 권율(이범수)의 아내 남다정(윤아)의 수호천사를 자처하며 묵묵히 그녀의 뒤를 지킨 남자 강인호.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는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는 ‘진짜 남자’의 매력을 그려내겠다던 윤시윤은 ‘총리와 나’를 통해 ‘지붕뚫고 하이킥’, ‘이웃집 꽃미남’ 등의 작품이 남긴 밝고 경쾌한 이미지를 지우며 ‘상남자’로 거듭났다.“조급해하지 않을 겁니다. 작품은 끝났지만, 풀어지지 않으려 해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대한 답변에도 그다운 진중함이 묻어난다. 한때 혜성같이 등장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남자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다시 한 번 배우로서 비상할 그 날을 꿈꾸고 있었다. 진중하면서도 고고하게, 윤시윤만의 방법으로.

Q. 3개월을 강인호로 살았다. 작품을 마친 소감이 궁금하다.
윤시윤: 늘 그렇듯 시원섭섭하다. 진하게 남은 아쉬움은 쫑파티로 달래고 있다. 몇 일째인지 모르겠네. 어제도 이범수와 윤아 몫까지 한잔 했다. (웃음)

Q. ‘총리와 나’ 제작발표회 당시 “이번 작품을 통해 내면에 있는 감정을 끌어내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성과는 있었나.
윤시윤: 전작에서는 대부분 느끼는 감정을 겉으로 다 표현하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강인호는 조금 달랐다. 가슴 속에는 불같은 감정이 있지만, 겉으로는 차분해야 했다. 불같은 총리와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남다정 사이에서 강인호는 차분하게, 하지만 차갑지 않은 인물이어야만 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눈빛이나 대사로 그 감정선을 보여주고자 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매일 일기도 썼을 정도니까.Q. 일기라니. 그 일기의 주체는 강인호인가, 윤시윤인가.
윤시윤: 강인호다. 겉으로 표현되는 감정은 연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연기로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내면이 먼저 그 인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프고 기쁜 모든 일을 한 줄씩 적어나가면서 내면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거다. 항상 모든 작품을 그렇게 준비한다.

Q. 처음에는 의뭉스러웠던 강인호가 후반부에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면서 큰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윤시윤: 마치 유행가의 후렴구가 무한 반복되는 느낌이었달까. (웃음) 각 감정의 최고점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 흐름을 살리는 게 관건이었다.

인터뷰에 앞서 텐아시아 여기자가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을 선물로 받은 윤시윤은 촬영 내내 연신 “맛있다!”는 탄성을 쏟아냈다.
Q. 극 중 남다정과의 관계는 무척이나 복잡 미묘했다.
윤시윤: 사실 인호의 사랑은 로맨틱한 사랑이 아니라 소울메이트에게 느끼는 감정에 가까웠다. 중반부에 인호가 다정에게 고백하는 모습이 충동적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사실 그게 다 두 사람의 깊은 감정선이 연결된 결과다. 그런 다정과의 관계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다.

Q. 만약 시간을 되돌려 인호와 다정의 분량을 추가로 넣는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까.
윤시윤: 인호와 다정은 모두 무거운 현실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서로의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완전히 사라진 도피처 같은 공간에서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 더 들어갔다면 좀 더 설득력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Q. 그럼에도 다정을 항상 지켜보고 묵묵히 챙기는 인호의 모습에서는 당신의 연기에서 전에 본 적 없는 강한 남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윤시윤: ‘총리와 나’에 출연을 결정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게 그 부분이다. 인호가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대목에 모든 게 담겨있다. 목소리를 굵게 하고 외면을 치장하는 것보다 감정선에 집중하고 싶었다.Q. 반면 전작들에서 선보인 밝고 경쾌한 캐릭터를 그리워하는 분들도 많았다. 그런 캐릭터의 표현이 워낙 능숙하지 않나.
윤시윤: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 항상 작품을 고를 때는 그 모습이 내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연기할 때는 나머지 부분을 누른다. 사실 행복한 연기가 더 힘들다. 화나고 슬퍼도 웃는 게 어찌 보면 더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Q. ‘배우 윤시윤’이 ‘총리와 나’로 거둔 성과는 무엇일까.
윤시윤: 나도 올해로 벌써 스물아홉이다. 좀 더 자신의 삶에 책임감이 느껴지는 나이에 남자로서 새로운 연기를 한 걸음 시도해봤다. 보시는 분들이 많이 어색해하지 않으셨다는 게 성과다. ‘용기를 얻고 조금 더 이 길을 걸어 봐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동안 내가 해온 연기가 ‘어른 아이’였다면, 나는 이제 ‘어른’으로 가는 과정을 지나고 있는 거다.

Q.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은 전작의 이미지를 벗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윤시윤: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게 도전적인 배역을 맡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빨리 어른이 되라고 하지만, 사실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생략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감정의 단계들이 숨어있다. 그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최대한 진실하게 표현해나가는 것. 배우에게는 그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게 없다면 허세, 교만과 다를 게 뭔가.

Q. 당신이 생각하는 ‘어른’의 정의는 뭔가.
윤시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지는 사람.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 돈보다 중요한 게 감정이니까. 행복해지는 방법의 가짓수가 더 많아져야 한다.

Q. 어른이 된 ‘배우 윤시윤’은 어떤 연기를 하게 될까.
윤시윤: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역을 연기하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나는 야생에 홀로 서 있는 푸른 청년이었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여 나의 삶의 철학과,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연기에 투영됐으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에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봤는데 참 좋더라. 연기력만큼이나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Q. ‘총리와 나’는 그런 마음가짐을 확인하는 터닝포인트가 됐나.
윤시윤: 난 늘 모든 작품이 터닝포인트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가지고 있는 건 적지만, 다 쏟아내려 노력한다. 민망하지만, 아직 뒷걸음질은 안 했던 것 같다. 매 작품 죽을 만큼 집중하고, 문제점을 찾고 분석하고 노력하는 것. 그 경험들의 총체가 오늘의 나다.

Q. 행복, 책임감, 삶의 철학. 뭔가 삶에 대한 확신이 느껴지는 단어들이다.
윤시윤: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면, 나는 이미 한 번의 기회가 왔었다. ‘제빵왕 김탁구’의 써내려간 시청률의 신화는 평생 내가 달고 다녀야 할 꼬리표다. 그게 내 태생이니까. (웃음) 인기나 성공에 대한 부담을 떨쳐내는 방법은 내가 그 상황을 즐기는 거다. 평소 친분이 깊은 박진영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한 번 성공을 거머쥔 뒤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는 건 욕심이다. 즐기면서 살아.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라고.

Q. 그 이야기를 하던 시점이 박진영이 결혼하기 전인가, 후인가.
윤시윤: 물론 결혼 전이다. (웃음)



Q. 당신도 곧 서른이다. 연기에 집중하느라 연애는 뒷전인가. (웃음)
윤시윤: 나는 항상 기다리고 있다. 진심이다.

Q.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나.
윤시윤: ‘놀이’가 맞는 사람이면 좋겠다. 직업, 취미, 사는 방식, 언어 등 모든 게 달라도 괜찮다. 다만 무언가를 향유하고 소소한 행복을 느껴나가는 마음이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Q. 2014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다. 감흥이 있나.
윤시윤: 밸런타인데이라…, 남 이야기 아닌가? (웃음) 농담이다. 여전히 설렌다. 아직도 단어만 들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근데 올해 밸런타인데이는 왠지 ‘그런 날이 있었나?’ 하면서 잊고 지날 것만 슬픈 예감이 든다.

Q. 밸런타인데이를 맞이할 젊은 남녀들을 위해 한마디 해 달라.
윤시윤: 사랑에 가장 중요한 건 용기고, 밸런타인데이는 그 용기가 증폭되는 날이다. 스무 살이 넘으면 사람은 직업과 사랑으로 성장한다. 문제는 이걸 안 하면 정신적으로 성장이 멈춘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경험을 쌓을수록 점점 어른이 된다. 고백했다가 차여도 손해 볼 건 없다. 물론 친구들은 놀릴 거다. (웃음) 그래도 경험은 사람을 발전하게 하지 퇴보시키지는 않는다. 요컨대, 고백하라는 말씀이다. 밸런타인데이는 원래 그런 날이 아닌가.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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