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에서 이어짐) 1980년대 당시 언더계열 가수들의 대부로 군림한 조동진은 김두수의 2집에 대해 “뛰어난 노래만큼이나 재킷 수준도 세계적”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2집에 실린 ‘약속의 땅’은 자신의 음악적 유토피아를 그려낸 명곡이었다. 하지만 오랜 객지생활은 그를 영양실조로 쓰러지게 했고 급기야 경추 결핵으로 악화되었다. 2집 활동을 중단하고 양평으로 요양을 떠나자 동아기획은 허망했다. 결핵 3기로 발전한 몹쓸 병은 3년간 병원 신세를 지게 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1991년 3집 제작을 마쳤다. 명곡 ‘보헤미안’은 이때 탄생했다. “당시 부산의 한 여성 팬이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과 주문진으로 자살하러 갔던 어떤 사람은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포기했다며 장문의 감사편지를 보내오는 극단적인 상황에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건강이 더욱 악화된 김두수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대중의 극단적인 반응을 접하면서 음악적 혼란을 느꼈다. 공기가 좋고 번잡하지 않은 강원도 왕산의 산골 속으로 잠적한 것은 살기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11년이 지난 2002년 발표된 4집 자유혼은 그의 음악에 감명을 받은 열성 팬의 집념으로 탄생했다. 김두수는 전작에서 음악적으로 아쉬움을 느껴오던 ‘보헤미안’과 ‘나비’를 새롭게 편곡해 완성시켰다. “모처럼 발표한 신보를 통해 절망의 끝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오랜 공백은 오히려 자기 음악완성의 기회였다. 놀랍게도 그의 신보는 ’2002년 네티즌 선정 최고의 한국가요 앨범’과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으로 선정되는 호평을 이끌어 냈다. “저는 컴맹입니다. 500여명의 팬들이 제 팬 클럽을 만들었다는데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전화도 없이 대관령에서 8년을 살았던 김두수는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2002년 7월 광주 증심사 풍경 소리 음악회 오픈 공연과 2003년 봄 공연에 참가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서울 대학로 열린 극장에서 팬클럽 회원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었다. 노래만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단독 콘서트에서 그의 모습을 처음으로 대면한 골수팬들은 감격의 눈물을 훌쩍거렸다. 2004년 경기도 양평으로 둥지를 옮겼다. 방송출연도 시작했다. 부산, 대구, 마산, 춘천 쪽 지방 FM 방송과 불교, 교통방송에서 그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또한 SBS 라디오 시사 프로 ‘오디세이’에서는 ‘이 시대의 가인’이라는 타이틀로 1시간 동안 그를 소개했다. 유명 가수가 아닌 그를 1시간 특집으로 심도 깊게 방송을 했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정신을 가슴으로 노래해온 그의 음악 인생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 이에 일반 대중에겐 여전히 무명 가수였던 그가 포크 팬들의 투표에 의해 부활된 명동 서울YWCA의 2003년 9월의 청개구리 가수로 선택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실 한류와 K-POP 열풍을 타고 주류 뮤지션들은 흔하게 외국으로 나가는 시대가 되었지만 밴드도 아닌 김두수 같은 비주류 솔로가수에겐 흔치않은 일이다. 2006년 ‘International Sad Hits’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이 미국에서 발매되었고 5집 ‘열흘나비’도 일본 P.S.F 레코드에서 제작된 수입음반이다. 외국에서 그의 음악을 인정하는 것 같아 반가웠지만 왠지 국내에서 음반 제작제의가 없었는가 싶어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제가 상업적으로 음반이 많이 팔리는 가수가 아니지만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신보제작 제의를 받았었습니다. 그땐 곡을 만들고 있는 과정이라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5집을 일본에서 제작한 것은 곡이 준비되었을 때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일본 P.S.F 레코드는 메이저는 아니지만 언더그라운드에서 30년 전통을 쌓은 레이블이고 일본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 그의 음악을 월드뮤직으로 소개하려는 제안이 좋았다. “일본말이 아닌 한국말로 취입하길 원하는 전제조건을 기꺼이 수용했기에 한국말로 노래한 내 노래를 외국에 소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2007년 말 5집 열흘 나비를 발표한 후 EBS 스페이스 공감무대에 섰다. 노래하던 도중 연주가 중단되는 돌발사고가 터졌다. 기타를 잡는 왼손이 마비되는 쥐가 왔던 것. 개그 본능이 넘치는 그는 “올해가 쥐띠 해던가요?”라는 임기응변 멘트로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며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김두수의 노래는 한 편의 시다. 보헤미안의 정서를 담은 노랫말은 떨리듯 미세하게 흔들리는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과 신비로운 기타 소리와 더불어 고요한 공간을 나비처럼 흐느적거린다. 형형색색의 감성을 실어 나르는 하모니카, 아코디언, 반도네온, 건반, 타악기 까혼(Cajon), 트럼펫, 첼로 소리들은 영혼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증으로 목을 마르게 한다. 바로 그 음악으로 일본과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해외에서 지명도를 높였다. 이에 2009년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는 그에게 심사위원 특별상을 안겼다. 2010년 장기간의 해외공연을 통해 만나게 될 낯선 이방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음악여정을 정리하는 개념의 저녁강을 발표했다. 베스트 음반 형식이지만 과거 음원의 나열이 아닌 재해석해 다시 녹음한 독특한 앨범이었다.
좋은 소리를 위해서라면 외국 악기와 가락을 수용함에 있어 적극적인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음악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제 음악은 무조건 한국음악이라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정신에 배인 그런 것들을 음악적으로 더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내 음악의 그릇은 서양악기지만 그릇 안에 담긴 것은 한국의 정서가 배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국악은 가볍게 터치할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이 있다. 판소리 같은 것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희귀한 소리다. “판소리와 기타는 의외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잘 어울리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음악도 어떻게 보면 음들의 집합인거죠. 서로 상이한 음악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음악이 나오지만 지금 같은 작법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연주자는 많이 나오는데 좋은 작곡자가 많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김두수의 활동은 정중동이다.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그는 쉼 없는 음악여정을 내닫고 있다. 금년에도 그의 명반들은 재발매 열풍을 일으켰다. 1, 2, 3집이 줄줄이 사탕처럼 CD로 재발매 되었고 4집 자유혼도 소량으로 카세트테이프로 제작될 예정이다. 가장 흥미로운 소식은 음악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 1집과 2집이 LP박스음반으로 꾸며져 금년에 출시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특히 1집은 오리지널 재킷의 복원 개념으로 박스 재킷을 장식할 예정이다. 이처럼 ‘재발매의 거장’이란 원치 않는 별명이 따라 다닐 정도로 무수하게 이어온 재발매 행진은 금년으로 대단원의 정점을 찍을 것 같다.
정규 6집에서 사라져가는 유럽 집시들의 정서를 자신의 음악에 접목하려는 김두수의 음악적 시도는 일단 신선해 보인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최초로 시도될 실험적 방식이기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일입니다. 국내 세션들과의 협업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인데 다른 소리를 경험하고 싶은 음악적 욕망이라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일단 군산 집에서 홈 레코딩으로 기타 연주를 해놓고 현지에서도 연주를 진행해 더 좋은 소리를 선택하려 합니다. 사운드의 울림과 연주의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살려보고 싶네요.” 김두수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평가는 청자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제 음악을 들으신 분들이 어떻게 규정하고 평하는 것은 이미 저를 떠난 일이죠. 다만 내 노래가 누구에게나 편안한 삶의 위로나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있는 친구가 되길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김두수 프로필
1959년 8월 4일 대구광역시 출생 고려대 농경제학과 졸업
2002년 4집 자유혼 네티즌 선정 최고의 한국가요 앨범
2003년 서울YWCA 부활 청개구리공연 창단 멤버
2007년 4집 자유혼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2009년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 특별상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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