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에 부는 여풍(女風)이 매섭다. 보이그룹이 득세했던 작년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다. 원조 아이돌 이효리부터 랩을 전면에 내세운 씨엘(CL), 한층 강력해진 퍼포먼스로 돌아온 애프터스쿨·씨스타·달샤벳, 그리고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의 김예림·백아연까지, 구성도 다채롭고 의미하는 바도 다르다. 하지만 어떤 현상이 트렌드라 불리려면 응당 거기에 호응하는 수용층이 있어야 하는 것도 물론. 이러한 여풍이 형성된 데는 대중의 뜨거운 호응이 컸다. 서로 다른 색깔만큼 대중이 그녀들을 보며 공감하는 지점도 달랐을 터. 2013년 상반기를 휩쓴 여풍의 근원을 따라가 봤다.

#01. 그녀들은 더 나쁜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 이효리·씨엘(CL)
남성중심의 사회의식을 극복하는 여성들의 움직임도 제각각이다. 일각에선 사회의 규율, 법규 등에 집중하는가 하면, 예술·문화의 영역에선 여성들의 마인드와 가치관의 변화를 촉구한다. 가요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음악과 메시지가 결합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더욱 클 터. 최근 새 앨범을 들고 컴백한 이효리와 씨엘을 보면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이효리(위), 씨엘 뮤직비디오 화면캡처
‘욕심이 남보다 좀 많은 여자/ 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은 여자/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 있는 Bad bad bad bad girls’ 이효리 5집 타이틀곡 ‘배드 걸스(Bad Girls)’ 중에서.

‘난 나쁜 기집애 나난 나쁜 기집애 난 나쁜 기집애/ Where all my bad girls at?/ 그래 나는 쎄 아주 사납게/ 너 정도론 날 절대 감당 못해’ 씨엘 솔로 싱글 앨범 중에서.

그녀들의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더 이상 나쁜 여자는 없다’고 외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효리는 이번 앨범을 통해 통념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의 이야기를 자전적인 가사로 풀어낸다. ‘미스코리아’에선 ‘명품 가방이 날 빛내주나요/ 예뻐지면 그만 뭐든 할까요’라며 남성들의 욕망에 놀아나는 여성들에 대한 조롱도 빼놓지 않는다.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자만 사랑받는 이상한 현실에 대한 그녀들의 일갈은 여자가 아닌 남자가 들어도 쿨한 구석이 있다. 사실 ‘나쁜 여자 더 매력 있다’는 그녀들의 메시지는 여성들의 내면에 숨겨진 무의식의 표출처럼 보이기도. 이효리와 씨엘에게 붙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하는 가수’라는 타이틀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또 다른 성과도 있다. 그녀들이 이렇게 인기를 끈 데는 음악적인 완성도도 곁들여 졌기 때문. 이효리는 이번 앨범을 통해 싱어송라이터 이미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남자친구이자 기타리스트인 이상순과 인디뮤지션 김태춘, 래퍼 빈지노 등의 뮤지션들과의 협연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도 성공했다. 씨엘은 다시 한 번 여성래퍼의 계보를 이어갈 차세대 주자임을 입증했다. 윤미래, 렉시, 미료 등 몇몇 여성 뮤지션을 제외하곤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여성 힙합 분야에서 싱글 앨범 한 장으로 자신만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02. 여자만 할 수 있는 퍼포먼스에도 격이 있다 - 애프터스쿨·씨스타·달샤벳
“누가 ‘걸그룹은 식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새 앨범을 발표한 애프터스쿨, 씨스타, 달샤벳을 보며 든 생각이다. 하나의 이미지만 고수하지도 않고,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큐트(Cute)·섹시(Sexy)·퓨어(Pure) 등의 이미지가 고정격식처럼 사용되던 시기를 지나, 요즘 걸 그룹의 퍼포먼스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애프터스쿨(위부터), 씨스타, 달샤벳 뮤직비디오 화면 캡처
진화의 원동력은 퍼포먼스에 있다. 여자만 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남자라도 하기 힘든 것. 그녀들의 퍼포먼스가 인기를 얻는 이유다. 애프터스쿨은 여섯 번째 맥시 싱글 앨범 과 함께 ‘폴아트(일명 봉춤, 수직기둥을 사용하는 춤)’를 들고 왔다. “6개월 동안 준비했다. 그 어느 때보다 피땀 흘리며 노력했다” 그녀들의 무대를 보고나니 에프터 스쿨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폴아트가 접목된 타이틀 곡 ‘첫사랑’은 애프터스쿨이 작곡가 용감한형제와 호흡을 맞춰 기대를 모았다. 흐느끼는 듯한 노래와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폴아트의 결합에선 단순히 ‘섹시’라는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씨스타의 정규 2집 앨범 도 마찬가지다. 애절하면서 섹시한, 씨스타 본연의 이미지에 한 가지 요소를 더했다. 다양한 소품을 활용한 안무와 무대 연출은 관객을 마치 미국의 뮤지컬영화 (2001)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또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은 할는지/사랑만 주다 다친 내 가슴 어떡해’라는 가사도 그렇고 안무에도 뮤지컬에서나 볼법한 서사가 담겨있다. 지난 20일 음원공개 9일 만에 방송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난 19일 쇼케이스 무대를 마친 달샤벳도 이색 퍼포먼스로 이목을 끌었다. 단순히 안무로 다리를 부각시키는 것에선 기존의 걸 그룹들과 차별점을 두기 어려울 터. 달샤벳은 무대 의상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벨크로테이프로 고정시킨 치마는 타이틀곡 ‘내 다리를 봐’ 후렴구에 이르면 치마가 좌우로 분리되며 그녀들의 각선미를 돋보이게 한다. 또 그들이 ‘마릴린 먼로’ 춤이라 부르는 동작을 소화하기 위해서 모든 무대의상을 별도로 제작하는 열정도 보이기도.#03. 목소리 하나로 승부를 본다 – 김예림·백아연
원래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 평가 기준의 중심은 목소리였다. 대한민국에 오디션 열풍을 불러온 (2009)부터 (2012)까지, 항상 참가자들이 관심을 얻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목소리’때문이었다. 열정과 노력이 담긴 목소리에 ‘꿈을 이루는 과정’이 만들어낸 진정성을 더하는 것이 그들이 인기를 얻는 방식이었다. 이번에 컴백한 김예림과 백아연은 자신들이 원래 잘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였던 ‘목소리’에 가수로서의 음악성을 더했다.

김예림(위), 백아연 뮤직비디오 화면캡처

의 투개월로 인기를 얻었던 김예림은 17일 솔로 미니앨범 ‘A Voice’를 발매했다. “아직 나의 색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이번 앨범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김예림의 말마따나 수록곡 5곡은 각각 색깔이 분명하다. 제작자 윤종신, 가수 조휴일, 신재평, 정준일 등이 참여했기에 발매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알리고 싶다던 김예림은 ‘세이렌’이란 별칭에 걸맞게 독특한 톤으로 앨범을 가득 채웠다.백아연도 새 앨범을 들고 우리를 찾았다. 의 주역으로 가수를 꿈꾸던 소녀는 어느덧 두 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한 여가수가 됐다. 백아연의 무기 또한 ‘목소리’다. 오디션 프로그램 방송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두 번째 미니앨범 ‘A GOOD GIRL’에선 자신의 장기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더했다. 타이틀곡 ‘a Good Boy’에는 바뀐 외양만큼이나 톡톡 튀는 스무 살 감성이 담겨있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사진제공. CJ E&M,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플렌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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