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카이 스튜디오 애니메이터 이상준, 성지연(왼쪽부터)
애니메이션 한 편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3~4년. 처리 과정이 조금만 매끄럽지 않아도 5년을 훌쩍 넘긴다. 8월 7일 개봉을 앞둔 ‘에픽 : 숲속의 전설’(이하 ‘에픽’)의 총 제작기간은 무려 10년이다. 기획단계에서부터 프리프로덕션까지 가는 것만도 5년. 제작과정에서도 기존의 만화 같은 느낌 대신 실사에 가까운 영상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나서야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개봉을 한 달여 앞둔 지난 2일, ‘에픽’을 제작한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두 명이 쇼케이스를 위해 방한했다. 쇼케이스가 끝난 뒤, 두 명의 애니메이터를 만났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수석 캐릭터 디자이너 이상준 씨와 라이팅 슈퍼바이저 성지연 씨는 미국 스튜디오에 입사했지만, 한국에서 자라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직책이 영어인 데다 길다. 직책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해 달라.
이상준 : 나는 영화에 들어가는 캐릭터를 디자인한다. 디렉터가 스크린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디자인하고, 영화 속에서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도 결정한다.
성지연 : 난 쉽게 말해 조명감독이다. 조명팀이 50명 정도 되는데, 그 인력을 관리하는 역할이다. 조명팀은 아트 디렉터와 지속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색감이나 조명, 그늘, 명암조절, 카메라 등 거의 모든 작업을 담당한다. 상준 선배가 처음에 애니메이션을 준비해주시면 우린 그걸 가지고 극장에 개봉되기 직전까지 작업한다고 보시면 된다.아까 잠시 보니 영상의 완성도가 높더라. 서로 분야가 다른데, 작업할 때 특별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나.
이상준 : 크리스 ?지 감독이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숲 속에 떨어진 낙엽을 보고 영화 볼 때의 감흥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보통 블루스카이 하면 ‘아이스 에이지’나 ‘리오’를 많이 떠올리시는데, 이번엔 좀 더 사실적인 표정 연기와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성지연 : ’에픽’의 조명은 몇 년 전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예를 들자면 조명팀은 산으로 직접 가서 숲을 헤매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나무껍질이 벗겨지면서 보간 족(숲을 파괴하려는 종족)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장면은 특히 공을 많이 들였다. 그 장면 하나가 슈퍼 컴퓨터 한 달을 쉴틈 없이 돌려야 나올 수 있는 양이다.
그 노력만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서 조명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나.
이상준 : 컴퓨터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조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명이 있기 때문에 그늘도 생기고 명암도 생기는 것이다. 색감도 모두 조명에 따라 달라진다.
성지연 :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한다는 것 빼고는 일반 영화에서 조명이 하는 역할이랑 똑같다. 배우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넣는 것이 조명이다.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분을 부각시키고, 숨기고 싶은 부분은 숨긴다. 사실 이번 작품의 조명이 좋다는 얘길 해외에서 꽤 들었다.
블루스카이 스튜디오 애니메이터 성지연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이상준 : 나는 미국 유학을 갔다가 현지에 정착하게 된 케이스다. 처음에는 루카스 필름에 들어가서 6년 정도 일했다. 거기서 일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를 라이브 액션이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생각했다는 거다. 어쨌든 그 곳에서 일하던 중에 블루스카이의 연락을 받았고, 그때부터 일한 지 8년이 넘었다.
성지연 : 나도 미국으로 유학 갔었는데, 처음엔 광고회사에서 4년 정도 일하다가 블루스카이로 옮기게 됐다. ‘로봇’이란 작품을 만들 때 들어와서, 여기서 일한 지 올해가 10년째다.
사실 미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픽사와 드림웍스가 양분하고 있는 모양새다.
성지연 : 우리 회사는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다른 회사들에 비해 규모, 예산도 작다. 내 생각에 처음부터 우리 회사는 할리우드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할리우드 근처에 있는 픽사, 드림웍스와 달리 동부에 위치해 있어서일까. 우린 사실 우리끼리 전념할 뿐, 서로 비교하진 않는다. 그런데 요즘 점점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블루스카이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상준 : 항상 새롭고 혁신적인 것에 도전한다는 것. 카툰 스타일에 강한 사람이 있고, 실사의 느낌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린 개개인마다의 특성을 잘 살리는 것 같다.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와는 달리 회사 분위기도 수평적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디렉터에게 할 수 있다. 그럼 틀렸더라도 디렉터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을 일일이 해 준다.
성지연 : 규모가 작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회사가 확장하고 있는 지금도 그런 분위기는 변함없다. 다른 회사에 있다가 온 사람들이 전에 있던 회사보다 훨씬 가족적이고 화목하다는 이야기를 한다.개인의 특징이 작품에 반영된 사례가 있나.
이상준 : 루카스 필름에서 같이 일했던 어떤 분의 말이, 작품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녹아 있어야 한다고 하시더라. 그게 대단한 거라고. 그 뒤로는 그 부분에 항상 신경을 쓴다. 내가 리프맨의 투구를 디자인했는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화랑의 깃대같은 모양이 나오더라. 일부러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다. 그 후 한국 중앙박물관에서 투구를 봤는데 정말 똑같이 생긴 거다. 그런 식으로 각각의 디자이너들이 가진 특색이 표현된다.
회사 안에 다른 한국 사람들도 있나.
이상준 : 지연씨가 조명팀에 한국 분들을 많이 끌어왔다. 한국 분들이 워낙 섬세한 표현과 묘사를 잘한다. 좀 아쉬운 건 컴퓨터 아트로 대부분 공부하셔서 그런지 저희 쪽(디자인)에는 한국 분들이 거의 없고, 라이팅이나 애니메이터에 편중돼 있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골고루 공부하셨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성지연 : 회사 전체가 580명 정도 되는데 그 중 12명 정도는 한국인이다. 꼭 제가 끌어왔다기보다는 제 생각을 반영하는 정도다. 사실 이전까지는 별로 없었는데 ‘에픽’을 하면서 그 수가 늘어났다.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입사 지원자의 절반 가까이가 한국 사람이다.
최근들어 한국 영화인에 대해 미국인들이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성지연 : 많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와는 관심의 정도가 차원이 다르다. 특히나 영화계의 경우, 관심있게 한국 독립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많다. 음악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잘 아는 분들도 많고.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한국 문화 전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상준 : 그동안 한국 문화가 과소평가됐던 것 같다. 한국 분들이야 한국이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처음 유학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을 잘 모르는 분위기였다.
블루스카이 스튜디오 애니메이터 이상준
미국에서 일하게 된 후, 한국 애니메이션을 본 적 있나.이상준 : 많다. 한 작품을 꼽자면, ‘마당을 나온 암탉’을 재밌게 봤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도 직접 만나봤고. 관객들이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더라. 명필름에서 나오는 영화들은 각각 메시지가 확실하다. 사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셀링 포인트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그것과 다르다. 할리우드에서는 여러 계층이 보길 바라기 때문에 예산 규모도 크다.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타겟층은 좀 편향적인 것 같다. 그래서 예산이 작고, 자연스럽게 준비단계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력이 가장 큰 문제다. 애니메이션은 인력으로 만드는 건데, 한국 애니시장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일할 곳이 없으니 능력있는 애니메이터들은 모두 온라인 게임회사로 갈 수밖에 없지 않나. 현실적인 문제다.
씁쓸한 현실인 거지. 그럼 미국에서 애니메이터의 대우는 어떤가.
성지연 : 전체 대비 비율로 따지자면 아직도 애니메이션은 작은 분야다. 애니메이터가 무슨 직업인지 설명해야 할 정도로. 그런데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커서인지 작업수준이나 대우는 좋은 편이다. 예술분야라고 낮게 취급받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이상준 : 건축이나 패션 등에 비해 애니메이션 역사는 짧아서 아닐까. 비교적 새롭다 보니 그 기술도 다른 직종에 비해 좀 더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좀 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만 지원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리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아진다. 예전에 내가 냈던 포트폴리오로는 절대 지금 우리 회사에 들어올 수 없다. 지금 학생들이 제출하는 포트폴리오는 거의 영화 수준으로 질이 높다.할리우드가 전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성지연 : 철저한 계획 아닐까. 기획단계나 구상에서부터,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장기적이다.
이상준 : 미국 영화의 역사가 워낙 길다 보니 노하우가 엄청 많다.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노하우가 후대로 전달이 된다. 마치 장인정신처럼. 애니메이션은 그 전달이 더 원활하고, 개개인들이 자기 실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한다.
회사가 자기계발을 위해 지원도 해주나.
성지연 : 그렇다. 트레이닝 프로그램도 잘 짜여져 있다. 그런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태프를 한 명 고용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보고 뽑는다. 면접 볼 때도 ‘몇 년 후에 우리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를 묻는다.
이상준 : 회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그거다. 사람을 키워서 열매를 맺게 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지금 잘하는 것도 좋지만 얘가 몇 년 동안 회사에서 어떻게 변할지를 기대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후배가 너무 큰다 싶으면 좀 누르지 않나. 미국에서는 누르지 않고 잘 북돋아주는 것 같다. 나나 지연씨도 사실 외국인인데, 회사가 키워준 거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루카스필름에 들어갔다가 회사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다.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끌어주고,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미국의 경쟁력 아닐까. 물론 돈이 있으니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각자 미래 계획은?
성지연 : 계속 좋은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 언젠가는 한국 영화도 해봤으면 좋겠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이상준 : 난 이미 시도를 하고 있다. 만들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 감독들도 많이 만나고 한국 상황에 대해 많이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터 개개인의 손재주도 중요하지만,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인력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생겼으면 좋겠다. 한국 애니메이션 예산이 미국과 차이가 너무 크다. 그래서 그 예산 안에서 퀄리티를 어떻게 높이느냐가 관건이다. 인력을 키운다는 게 쉽진 않겠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 좋았던 것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열었다는 것 아닌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좀 더 활짝 열 수 있는 사건이 있었으면 한다.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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