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다는 말이 재미없다는 것을 뜻한다면 김강우는 재미없는 배우가 맞다. 그는 자신의 연기 세계에 대해 현란한 달변을 구사하지도, 실없는 농담이나 웃음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항상 말 머리에 “내 말이 틀릴 수도 있는 거지만”이라고 단서를 달고, 그나마도 최대한 가치 평가는 배제해서 말한다. 가령 자신의 연기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무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배우가 나에겐 이 일이 맞고 이게 나에게 최고였다 평가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이런 진지함이 역할에 대한 분석으로 집중될 때 그가 맡은 역할과 영화는 재밌어진다. 온갖 쿨한 척은 다하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일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모기가 아니었다면 <태풍태양>은 청춘의 스테레오타입을 반복 재생하는 영화에 불과했을 것이고, 대령숙수의 정통성을 잇는 천재 요리사지만 그 모든 재능과 욕심을 가슴 깊이 갈무리한 성찬의 표정 덕분에 <식객>은 마지막 요리 경합에서 모든 갈등과 오해가 폭발하듯 해결되는 쾌감을 줄 수 있었다. <마린보이>에서 전직 수영 국가대표 천수 역할을 위해 만든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은 그가 연기에 쏟는 집중력이 가장 시각적으로 드러난 형태였다. 재미없는 배우이기에 재밌는 역을 소화할 수 있다는 기묘한 역설. 이런 진지함이야말로 드라마 MBC <나는 달린다>의 무철이나 <경의선>의 만수처럼 선한 눈빛의 캐릭터와 잘 어울리던 그가 마치 악마의 현신과도 같은 KBS <남자 이야기>의 채도우를 표현할 수 있는 원동력일 것이다.

엄청난 지능의 소유자지만 인간이 느끼는 고통해 대해선 이해하지 못하는 결핍을 지닌 이 희대의 사이코패스를 형상화하기 위해 김강우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 캐릭터의 성격을 분석하고,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악역들의 연기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가 추천한 다음의 영화들은 채도우 역할에 영감을 준 희대의 악역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이다. 이들 악역들에게서 채도우의 어떤 모습들이 조금씩 떠오른다면 역시나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를 보며 분석하는 김강우의 모습 역시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1.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1991년 │ 조나단 드미

“아마 제가 중학교 때 즈음 영화를 본 것 같은데 거의 스무 번 정도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채도우 역할을 준비하면서 왜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를 잘하는 건지 알겠더라고요. 처음 스털링 요원(조디 포스터)과 만날 때 마치 그 사람의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보여주잖아요. 그건 단순한 기 싸움과 다른 것 같아요. 겁을 주는 게 아니잖아요. 흐트러지지 않은, 굉장히 깔끔한 모습이고 말하는 것도 지적이죠. 가끔은 문학적이기까지 하고요. 그렇게 깊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식인마의 본성을 드러내기에 한니발 렉터가 정말 무서운 거겠죠.”

가끔 간과되는 사실은 <양들의 침묵>의 연쇄 살인마는 한니발 렉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피해자의 피부를 도려내는 살인마 버팔로 빌을 잡기 위해 FBI 수습요원 스털링에게 힌트를 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팽팽한 순간은 스털링이 버팔로 빌의 은신처에서 혼자 대치할 때가 아닌, 한니발 렉터와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할 때다. 한정된 정보만으로 버팔로 빌의 범행의 방향을 모두 읽어내는 한니발 렉터의 악마성은 천재 프로파일러가 범죄를 저지를 때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되는지 보여준다.

2. <갱스 오브 뉴욕> (The Silence Of The Lambs)
2002년 │ 마틴 스콜세지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한니발 렉터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빌 더 버처(다니엘 데이-루이스) 앞에서도 거짓말을 못 할 거 같아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무서운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아요. 자신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살인을 비롯해 어떤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 터프한 인물이죠. 절대 뒤를 돌아보거나 양심의 가책에 고민하는 일 없이 전진하는 그 폭력성을 제 연기에도 담고 싶었어요. 만약 채도우에게 남성적 터프함이 없다면 굉장히 예민하고 뻔한 느낌의 캐릭터가 됐을 거 같아요.”

이 영화의 뉴욕은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섹스&시티>, 브로드웨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뉴욕의 갱에 대한 영화가 아닌 갱의 뉴욕에 대한 영화다.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과 그 아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대표되는 아일랜드 이주민과 빌 더 버처로 대표되는 원주민이 몸과 몸으로 맞부딪히며 써내려가는 폭력의 역사와 그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도시의 외형이 발전하는 모습은 가장 추악하면서도 리얼한 미국 건국사라 할 수 있다.

3.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
1999년 │ 안소니 밍겔라

“굳이 악역을 따지면 딕키(주드 로)의 재산과 애인, 삶 전체를 빼앗는 리플리(맷 데이먼)겠죠. 하지만 두 인물 모두 너무나 매력적이라 리플리가 딕키라는 인물 자체를 흡수하듯 그 모습 모두를 닮고 싶었어요. 재즈를 연주하는 자유분방한 부잣집 아들 딕키의 모습이나 욕망을 숨기고 상대방을 대하는 리플리의 부드럽고 차분한 모습 모두를요. 치명적인 매력과 완전 범죄를 꿈꾸는 지성, 이 두 가지 요소가 합쳐진다면 정말 독특한 악역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원제인 와 동명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유유히 일광욕을 즐기는 앨랭 들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태양은 가득히>로 먼저 영화화되었는데 범행을 들키지 않는다는 면에선 <리플리>가 원작에 더욱 가까운 편이다. 명석하지만 결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리플리는 부잣집 아들 딕키를 그의 아버지께 데려가기 위해 파견됐다가 오히려 딕키와 어울리며 그에게 열등감을 느껴 그를 죽이고 삶을 빼앗는다. 결코 선하다고 할 수 없지만 친구인 킹슬리(잭 데이븐포트)에게 톰 리플리의 장점을 말해보라며 울먹이는 맷 데이먼의 연기 때문에 그의 열등감은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년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킬러인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라는 인물은 설정 자체가 기막히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사고 때문에 팔이 부러진 상황처럼 남이 볼 땐 소름끼치는 장면에서 정작 본인은 절대 흐트러지지 않아요. 진정한 의미의 사이코패스죠. 영화에서 그의 호흡이 가빠지거나 맥박이 빨라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동전을 던져서 살인을 결정하는 모습에서도 장난스럽기보단 정말 소름끼쳐요. 아무런 고통도 죄책감도 없는 그야말로 진정 악마적인 인물이죠.”

우연히 갱들의 싸움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서 이백만 달러를 찾게 된 카우보이가 그 돈 때문에 킬러에게 쫓기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시놉시스만 보면 그저 그런 추격물 같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을 이루는 국경 지역 사막의 풍경처럼 건조하다 못해 삭막한 분위기는 이익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묵시록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말미에서 늙은 보안관 에드가 늘어놓는 푸념은 과거의 인간다운 사회를 기억하는 노인으로선 이해 불가능한 시대가 왔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면 인간을 위한 나라 역시 없을지 모른다.

5. <에비에이터> (The Aviator)
2004년 │ 마틴 스콜세지
“이 영화의 하워드 휴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아마 영화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과는 거리가 먼 인물일 거예요. 하지만 저는 휴즈야 말로 정말 위험한 인물 같아요. 남들이 무모하다고 하는 꿈에 도전하고 심지어 실현하기도 하잖아요. 예측불허의 유아적 상상력과 그걸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은 무척 매력적이지만 위험하죠. 그게 극단에 이른 게 히틀러인 셈이잖아요. 특별히 악의는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거죠.”

부모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간 <지옥의 천사들>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하고, 비행기에 미쳐 직접 항공 사업에 뛰어들어 역시 막대한 부를 움켜쥔 하워드 휴즈만큼 영화적인 삶을 산 인물도 드물 것이다.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것도 그렇지만 캐서린 헵번이나 에바 가드너 같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는 셀러브리티이자 직접 디자인한 비행기를 몰고 세계 일주에 성공하는 모험가의 면모를 가졌단 점에서 그는 너무 영화적이라 식상하기까지 한 실존인물이다. 그의 전기를 읽은 후부터 오직 그를 연기하고 싶어 했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집념은 당대의 명장 마틴 스콜세지까지 끌어들였으니 그 역시 휴즈 못지않은 욕망의 소유자라 할 수 있겠다.

다양한 색을 담아낼 수 있는 배우의 그릇을 가진 김강우

<남자 이야기> 초반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역할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던 김강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마인” 채도우를 연기하며 인물을 그냥 받아들이며 표현하는 것을 배우게 됐다고 말한다. 좀 더 연기가 유연해지고 폭넓어진 건 아닐까 싶지만 이 재미없는 남자는 “인물에 따라 이런 식의 연기가 필요할 때도 있겠다”고 말하는 게 전부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자신의 연기 방식을 변화시키며 결국 다시 한 번 채도우라는 재밌는 인물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색이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다양한 색을 담아낼 수 있는 배우의 그릇을 가진 그가 만들어낼 또 다른 인물이 기다려지는 건 그래서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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