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평론가가 추천하는 이 작품]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 받는 대작부터 소수의 관객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숨은 명작까지 영화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텐아시아가 '영화탐구'를 통해 영화평론가의 날카롭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박태식 평론가가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재개봉작인 '이다'입니다.
'이다'는 고아로 자란 주인공 이다가 수녀 서원식을 앞두고 2차대전 중 살해 당한 부모의 묘지라도 만들어 주기 위해 유일한 혈육인 이모와 함께 고향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알게되는 가톨릭 수녀의 모습을 통해 2차대전 후 폴란드 모습을 정교하게 담아냈습니다.
영화 '이다' 포스터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영화 '이다' 포스터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예로부터 유럽에서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수도원에 맡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수도원에 맡겨진 아이들은 그저 자신의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수도자의 삶에 익숙해져 갔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수도원을 나간다 한들 혈혈단신 고아 신세에 세상 살이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이다'(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는 그리스도교의 인기가 많이 식은 유럽의 영화라고 보기에는 약간 생뚱맞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실로 대단하다. 단순히 안나라는 평범한 예비수녀의 뒤를 쫓는 '로드무비'라기엔 역사를 꿰뚫어보는 강렬한 시선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유기서원을 앞두고 수녀원장은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에게 특별 휴가를 준다. 이모를 만나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채 수도원에 맡겨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뿌리를 한번 확인하고 서원식을 하라는 배려였다. 그녀가 만난 이모 완다 루즈(아가타 쿠레샤)는 복잡한 사연을 가진 여성이다. 한 때 폴란드에서 잘나가던 재판관으로 수많은 반동분자들을 형장의 이슬로 보내 그 별명마저 잔혹한 '피의 완다'였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극과 극의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안나는 이모의 낯선 모습에 당황한다. 하기는 세상 고통에서 벗어나 수녀원에서 자랐기에 당황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완다의 입을 통해 안나는 자신의 원래 이름이 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다 레벤슈타인! 하임과 로자 하르츠의 딸이자 고향은 피아스크. 이다는 이모와 함께 부모님이 묻혀있다고 추정되는 고향으로 찾아 나선다. 여행길에 부모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가족사에 큰 비극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이모의 삶이 왜 나락으로 추락했는지도 드러난다. 폴란드는 2차 세계 대전으로 온 땅이 폐허가 됐고 전쟁과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천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데 이골이 난,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약소국이 폴란드였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복잡한 사연들이 생겨났겠는가.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는 폴란드가 겪은 참혹한 운명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시절이었다. 아래위로 요동치는 시절 폴란드에 살았던 어느 가족의 절절한 이야기. 감독의 시선은 그곳에 맞추어져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피해자는 믿었던 친구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가해자는 그 일로 평생을 고통에 싸여 지낸다. 유대인 이다의 가족에게 주어진 불행은 바로 어제까지 옆집에 살던 폴란드인 이웃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수도원에 맡겼던 이다가 다시 나타나는 순간, 기억 속에 묻어 두려던 죄의식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결국 이다 부모의 무덤을 파야하는 처지에 몰리고 만다. 과연 무덤 속에서 무엇이 나올까. 완다가 머플러를 풀어 남자아이의 해골을 정성스레 싸는 모습을 꼭 기억해 두길 바란다.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무덤을 파는 장면은 하나의 탁월한 은유다. 이 은유는 비단 이다의 불행한 가족사일 뿐 아니라 독일의 강압에 눌려 유대인 박해에 동조했던 폴란드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비록 독일이 패전국이 되어 자유를 되찾았지만 폴란드 국민의 잘못된 선택에서까지 자유로워지지는 못한다. 감독의 투철한 역사의식은 무덤 장면에서 그 빛을 발한다.

이모와 동행하던 중에 이다는 멋진 청년을 만난다. 그 청년은 외모도 멋질 뿐 아니라 알토 색소폰 연주자로 폴란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자유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또한 그가 속한 밴드의 연주는 얼마나 멋들어지던지. 이모와 여행에서 참혹한 바깥세상을 보았던 이다에게 유일한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그 기쁨은 이다의 옷차림에서 나타난다.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이다는 몸은 비록 어른이지만 이제까지 그저 수도자가 될 운명이려니 하며 살아야 했던, 어린 아이의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랬던 이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고 이를 통해 이다는 드디어 어른으로 성장한다. 수도자의 의무인 육체의 순결이라든가, 경제적 청빈이라든가, 진심 없는 순명 따위는 더 이상 이다의 언어가 아니게 된 것이다. 그녀가 참 어른으로 성장하는 장면에 감독은 특별한 무게를 실었다. 장치에 고정시킨 카메라가 아니라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는 '핸드 헬드' 기법으로 이다의 걸어가는 모습뿐 아니라 그녀의 맘까지 잘 따라 잡았다. 뛰어난 연출이다. 더불어 인간의 죄의식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많은 암시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영화 '이다' 스틸 / 사진제공=시네마 뉴원
'이다'는 흑백영화다. 1960년대가 흑백영화 시대라서 그랬다기보다 역사의 투명한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흑백이 유리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훌륭한 연출과 탁월한 역사의식과 뛰어난 세계관에 힘입어 '이다'는 동유럽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전 세계 56개 영화상 석권과 함께 40여 개의 노미네이트로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제 6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과 촬영상 후보가 된 데 이어 제 87회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정도면 빼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한 순간의 이기적인 판단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만 그에게 남겨진 죄의식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수습이 안 된다. 그래서 이런 저런 변명을 찾아내고 합리화도 시켜보지만 죄의식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일 폴란드의 비극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20년이나 지나 무덤을 파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박태식(영화평론가)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