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2때까지는 배우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연기를 배우려고 지원한 대학에는 모두 떨어졌다. 군대를 다녀와서야 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10년 동안 버텨봐라”라는 대선배의 말만 믿고 정말 10년 동안 무대를 지켰다. 그 10년의 세월은 그를 <헤드윅>의 헤드윅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로 만들었다. 그렇게 엄기준은 느리지만 탄탄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배우다. MBC 시트콤 <김치치즈 스마일>을 시작으로 TV 드라마에서도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고, MBC <라이프 특별 조사팀>과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을 지날 때쯤에는 어느새 그에게 빠져든 새로운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MBC <잘했군 잘했어>에서 드라마의 주연이 됐다. 엄기준은 “부담스럽게만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지만, <잘했군 잘했어>에서 한 때 자신의 과외 교사였던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 최승현의 얼굴에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여러 얼굴들이 겹쳐있다. 고교 시절부터 짝사랑해온 연상의 여인에게 능글맞게 굴 때는 <김치 치즈 스마일>의 시트콤 연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능청맞은 넉살을 떠는 것은 <라이프 특별 조사팀>의 모습이 스쳐간다.

“다른 역할을 하는 게 늘 재밌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말처럼, 뮤지컬 시절부터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그의 연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풍부한 연기를 가능케 했다. 그래서 엄기준은 ‘플레이리스트’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을 골랐다. 그가 지난 10여 년 동안 쌓아온 경력의 시작은 바로 뮤지컬이었고, 그는 앞으로도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부르고 싶어 하는 노래들은 그가 연기자가 되기 전까지, 그가 왜 그토록 무대를 갈망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해줬다.

1. Radiohead의
“어린 시절 인디 밴드를 했었어요. 그 때 정말 이 노래를 불러 보고 싶었죠.” 엄기준이 첫 번째로 고른 곡은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다. ‘Creep’은 이제 살아있는 전설이 된 라디오 헤드의 첫 번째 히트곡. 라디오 헤드는 사람들이 ‘Creep’으로만 자신들을 기억하는 것을 꺼려했지만, 이는 그만큼 ‘Creep’의 매력이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곡의 절정에 터지는 박력 있는 디스토션 기타와 감정의 밑바닥의 지하 속까지 파내려가는 보컬리스트 톰 요크의 절망어린 보컬은 1990년대의 록 키드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록의 이상향 중 하나였다. “그 때 ‘Creep’만큼 멋있는 노래는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너무 부르고 싶어서 결국 <헤드윅> 콘서트 때 부르게 됐죠. 이미 흘러간 노래일 수도 있겠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어요.”

2. Dream Theater의
엄기준이 고른 두 번째 곡은 드림씨어터의 ‘another day’. 드림씨어터는 수많은 연주자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테크닉과 난해한 곡 구성으로 유명하지만, ‘another day’는 그들의 곡 중 드물게 대중 친화적인 멜로디를 가졌다. “솔직히 제대로 카피하기는 어려운 곡이죠. 하하. 하지만 여건이 된다면 언제든 제대로 불러보고 싶은 노래에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폭발성이 있잖아요. 서정성과 스케일이 동시에 있는 매력적인 곡이죠.” ‘another day’처럼 서정적인 멜로디를 가진 록발라드는 엄기준이 좋아하는 음악적인 취향 중 하나. ‘another day’뿐만 아니라 테슬라의 ‘love song’도 그가 사랑하는 록발라드라고.

3. Scorpions의
스콜피온스는 ‘wind of change’, ‘still loving you’ 등 특유의 록발라드로 국내에서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밴드다. 특히 ‘wind of change’는 냉전 체제의 종식을 맞아 스콜피온스가 부른 곡으로, 한국 팬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엄기준이 이 노래를 고른 이유는 단지 이런 배경 때문만은 아니다. “예전에 <지구촌 영상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해외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거예요. 스콜피온스가 거대한 스타디움 안에서 벌인 공연 실황 비디오였는데, 팬들이 촛불을 들고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어요. 그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내가 저런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죠.”

4. 박완규의 <못된 남자>
“박완규씨의 목소리는 말이 필요 없잖아요. 시원하고 박력 있고, 남자라면 한 번쯤 갖고 싶은 목소리 아닐까요?” 엄기준은 박완규의 ‘사랑해서 사랑해서’를 꼽으면서 박완규의 목소리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냈다. 박완규처럼 멋지게 록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도 흔치 않다면서 말이다. “사실 록발라드라는 장르는 흘러간 음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라요. 요즘에는 이런 노래들이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는 것 같구요. 하지만 록발라드는 다른 음악은 갖지 못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감정의 남은 한 부분까지 다 토해내게 하는 절절함 같은 거요. 늘 그런 노래만 듣는다면 질리겠지만, 가끔은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의 감정에 푹 빠지고 싶을 때도 있는 거죠.”

5. Queen의
인디 밴드를 통해 무대에 올랐고, 뮤지컬을 통해 연기자와 보컬리스트의 꿈을 동시에 이룬 엄기준이 마지막 곡으로 퀸의 ‘Somebody to love’를 고른 것은 당연해 보였다. “이건 정말 무대를 위한 노래잖아요. 이 노래 한 곡만으로도 한 편의 오페라나 뮤지컬을 보는 기분이 들어요.” 퀸의 ‘Bohemian Rhapsody’와 함께 그들의 록 오페라적인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Somebody to love’는 특히 라이브에서 그 매력을 더하는 곡. 프레디 머큐리의 섬세하면서도 스펙터클한 보컬과 합창단의 코러스가 어우러져 그들의 공연을 절정으로 끌어 올린다. 엄기준은 데뷔 직후 프레디 머큐리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던 미카의 노래들을 좋아하기도 한다. “조지 마이클이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에서 불렀던 ‘Somebody to love’도 좋아해요. 하지만 결론은 역시 프레디 머큐리죠 하하.”

“연기를 더 잘해야겠다는 거 말고는 없어요.”

“글쎄요, 연기를 더 잘해야 겠다는 거 말고는 딱히 생각해 본 게 없어요.” 장래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엄기준은 단순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답을 던졌다. 연극 무대에서 무대의 단역이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엄기준의 10년은 끊임없이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고, 한 작품이 끝나면 또 새로운 드라마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잘했군 잘했어>를 지나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얼굴로 연기하는 캐릭터가 달라질 뿐, 그는 다시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고, 또 거기서 연기의 새로운 면면을 찾아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엄기준은 참 잘하고 있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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