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캐롤
캐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케케묵은 질문인 건 알지만, ‘캐롤’을 마주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를 만나 첫 눈에 빠져들 확률은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을. 사랑에서 확률의 싸움은 보다 복잡하다. 당신이 사랑을 느낀 상대 역시 당신을 운명으로 느끼느냐/아니냐에 따라 확률은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캐롤’을 보면서 오래 전, 내가 사랑했으나 나를 끝내 사랑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동시에 사랑하는 일은 확률상으로 희박한 일”이라고,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그러니까, ‘캐롤’은 사랑의 기적에 관한 영화다. 만나는 순간,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명징하게 예감했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이유는 알 방법이 없어.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아니냐 뿐이야. 서로 부딪히는 핀볼들처럼.”

1950년대 뉴욕. 백화점 장난감 가게 점원 테레즈(루니 마라)와 그 곳은 찾은 손님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만나는 순간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테레즈가 찾아주면서 두 사람은 두 번째 만남을 갖는다. 딸의 양육권을 두고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인 캐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친구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테레즈. 각자의 상황에 결핍을 느끼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게 빠져든다.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는…알 방법이 없다.

# 영락없이 사.랑.에.빠.진.자

캐롤은 행복한 여자다. 적어도 그녀가 처해 있는 배경만 두고 보면 그렇게 보인다. 대저택이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이 있고, 사랑하는 아이가 있는, 그런 포장지가 좋은 삶. 하지만 그 행복은 그녀 안의 어떠한 진실이 은폐돼 있기에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캐롤에게 그 진실을 묵인할 수 있는 인내심이 있었거나, 그러한 진실을 알아챌 세심함이 부족했다면 그녀의 훗날 묘비명엔 ‘캐롤, 하지 에어드의 아내로 잠들다’가 새겨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캐롤은 자기 안의 진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캐롤은 자신의 사랑 촉수가 동성에게로 향해 있음을 잘 알고 있고, 이미 여자와 사랑을 나눈 경험도 있다. 그러니까 캐롤은 자기 내면의 결핍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 안에서 행복할 수 없는 여자였다.
캐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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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젊은 테레즈는 행복하다/불행하다로 규정되어지기 애매한 여자다. 그녀는 딱히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삶에서 충족감을 느끼는 듯 보이지도 않는다. 캐롤과는 정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테레즈는 아직 자신 안의 진실을 모르기에, 그러니까, 각성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결핍이다. 그런 테레즈의 결핍이 캐롤을 만나는 순간,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하나 둘 맞춰지듯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테레즈라는 행성은 오로지 캐롤 주위에서만 공전하기 시작한다. 테레즈는 캐롤이 던지는 무수히 많은 제안들, 그러니까 “우리 집에 와서 식사 할래요?” “함께 여행 갈래요?”라는 캐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치의 고민 없이 기꺼이 응답한다. 캐롤의 말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캐롤의 감정을 살피고, 캐롤을 위해 선물을 고르고, 선물을 받아든 캐롤이 기뻐하는 모습에 기뻐하는, 오로지 캐롤, 캐롤, 캐롤… 캐롤로 뒤덮인 테레즈는 누가 봐도 영락없이 사.랑.에.빠.진.자.다.

# ‘캐롤’이 보통의 사랑이야기로 읽히는 건

이 영화에는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터부시되던 1950년대 시대상과 계급과 나이의 차이가 던지는 의미에 대한 깊고 너른 시선이 있다. 그러나 굳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본다. 이 영화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흔히들 말하는,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라는 개념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 앞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 사랑 앞에서 관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지점에서 흘러나온다.
캐롤3
캐롤3
토드 헤인즈 감독은 캐롤이 테레즈에게 느끼는 ‘진짜 마음’을 알리기를 오래도록 유예한다. 그래서 사랑에 푹 빠진 테레즈가 캐롤의 진심을 알기 위해 탐정의 심정이 될 때, 관객 역시 테레즈와 같은 마음이 된다. 사랑에 빠진 이가 응당 마주하게 되는 질문. ‘저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가’ 그 질문은 캐롤이 테레즈를 멀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극대화 된다. 아마 관객이(특히나 짝사랑을 해 봤거나 짝사랑 중인 관객이) 테레즈에게 가장 이입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내게 보여준 행동들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나요?’ 도통 읽히지 않는 캐롤이라는 존재 앞에서 테레즈는 한 없이 외로워진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인 이 영화가, 보통의 사랑이야기로 읽히는 건 아마도 ‘캐롤’이 지니고 있는 마법일 것이다. 훌륭한 멜로 영화가 그래왔듯, ‘캐롤’ 역시 특수한 플롯을 입었을 뿐 종국엔 그것으로 세상 수많은 연인들이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게 한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질주하는 듯 했던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에 균열이 오는 순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어느새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 테레즈 혹은 캐롤의 감정에 동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앞에서 밝혔듯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사랑의 신호에 응답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테레즈의 행동들 하나하나에서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래서 테레즈가 자신이 놓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인정하면서 한 뼘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지도. 그래서 그들의 관계가 전복되는 순간, 캐롤 역시 간절하게 테레즈를 원했음이 밝혀지는 순간, 테레즈가 한없이 부러워졌으리라.

# 이 사랑은 그러므로 결핍이 아니다
캐롤
캐롤
‘캐롤’은 에로틱한 무드를 내내 흘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캐롤’에서 가장 에로틱한 순간은 두 여성이 섹스를 할 때가 아니라 섹스를 연상케 하는 은유 넘치는 제스처를 취할 때다. 가령 테레즈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캐롤을 훔쳐볼 때, 캐롤이 테레즈에게 화장을 해 줄때, 두 여자가 향수를 서로에게 뿌린 후 그 향을 음미할 때, 상호 애무에 가까운 에로틱한 환각을 느꼈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이러한 장면은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라는 배우가 없었으면 분명 그 감흥이 덜했을 것이다. 감수성 뛰어난 배우들이 자신들의 장기를 펼칠 수 있는 장면을 만나고, 그러한 장면을 관객이 또 만날 수 있다는 건, 영화가 주는 하나의 축복이다.

사랑은 상대를 통해 나를 보는 것인지 모른다. 진짜 사랑은 그 사랑의 끝이 어찌됐든, 상대로 인해 내가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과 영화가 끝났을 때 캐롤과 테레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 되든, 이 사랑은 결핍이 아니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캐롤’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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