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황정민01
황정민01

연기라는 길,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황정민은 오르고 또 올라왔다. ‘국제시장’ ‘베테랑’ ‘히말라야’ 세 편의 영화가 흥행 정상에 연착륙한 2015년은 아마도 그런 황정민에게 적지 않은 위로와 희열을 선사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화려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고 곧추세우며 단단해진 어떤 마음들인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다시 한 발 한 발. 황전민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10. ‘히말라야’ 완성본을 시사회 때 처음 보셨죠? 상당히 만족한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황정민: 그럼요. 제 영화인데 만족 안 할 리가 있나요. 우리가 ‘이걸 해 내다니!’ 하면서 봤어요. 찍는 동안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의 연속이었거든요. ‘베테랑’ 류의 영화는 많이들 찍어봐서 어떻게 해야 관객들이 좋아할지, 감이 오는 게 있어요. 그런데 산악영화는 찍어 본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니 감이랄 게 있나요. 스태프들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다들 ‘맨땅에 헤딩’ 하는 기분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죠. ‘이왕 하는 거 잘 해 보자. 다음 산악영화를 찍을 팀들이 우리 영화를 레퍼런스 삼을 수 있게 해 보자’ 하면서 이 악물고 했던 것 같아요.

10. 마지막 촬영 날 눈물을 쏟으셨더군요. 영화 촬영 끝나고 울기는 처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정민: 네. 정말이지 ‘개’울었습니다.(일동웃음) 저희가 메이킹 필름이 있어요. 포털에 공개된 메이킹 말고, 스태프들의 고생이 담긴 메이킹이요. 쫑파티 때 메이킹을 틀었는데, 눈물바다였어요. 그걸 VIP시사회 때 가족 상영관에서 틀었어요. 그때도 눈물바다였죠. 감독님도 울더라고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감사의 인사를 하다가 감정이 확 올라왔나 봐요. 저도 그렇고 현장에 있던 연출부 애들도 그렇고 다들 놀랬죠.

10. 단순히 고생했다는 의미의 눈물들은 아닌 것 같네요.
황정민: 그럼요. 단순 고생과는 차원이 달라요. 촬영현장에서 우린 그냥 똘똘 뭉친 한 팀이었어요. 스태프와 배우로 나뉜 게 아니었죠. 무거운 장비들이 많았는데 그걸 누가 옮기겠어요. 여자 스태프에게 들게 할 수 없으니까 남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분담해서 날랐어요. 저는 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있으니 가장 무거운 걸 들고 앞장섰죠. 대장으로서 가벼운 짐을 들 수는 없잖아요. ‘짜치게!’(일동웃음) 북한산 꼭대기부터 밑까지 매일 오르락내리락 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숙소가 정상에 있었다면 촬영은 아래에서 진행됐거든요. 내려갈 때 1시간 30분, 올라갈 때는 2-3시간 정도가 걸렸어요.
황정민02
황정민02
10. 자동적으로 운동도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황정민: 네팔이랑 몽블랑 다녀와서 북한산에서 찍은 게 있어요. 그땐 정말 날아다녔어요. 스태프들 모두가 “(가소롭다는 듯)참, 나!” 이러면서 말이죠.(일동웃음) 북한산 백운대까지 일반적으로 1시간 30분이 걸린대요. 그런데 우린 그걸 30분 만에 올라갔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었던 거예요. 그런 상황을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똘똘 뭉쳐서 이겨낸 거고요.

# “후회 할 거면, 아예 안 하든가. 한다면 후회를 남기지 말든가!”

10. 그나저나, “제 영화인데 만족 안 할 리가 있냐”라는 말이 상당히 인상적이네요. 결과물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만족이라는 건 끝이 없으니까.
황정민: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제 영화를 보고 나서 만족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해도 저는 무조건 만족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밖에 찍을 능력이 안 되는 거니까, 그렇게 찍은 거잖아요.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됐던 거고요. 안 되는 걸 어떻게 늘리겠어요. 그 안에서 저는 노력을 하는 것뿐이죠. 다만, 그런 경험들이 큰 공부가 됩니다. 다음번에는 절대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 하는.

10.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니까요.
황정민: 절대 후회 안 합니다. 후회 할 거면, 아예 안 하든가. 한다면 후회를 남기지 말든가! 둘 뿐이죠.

10. 그런 본인의 성격을 잘 알기에, 현장에서 더 치열해지는 면도 있겠습니다.
황정민: 맞아요. ‘히말라야’는 특히 레퍼런스가 될 작품이 없었기에 현장에서 돌봐야하는 것들이 더 많았어요. 사실 산에 올라가면 고글과 마스크도 안 벗어요. 동상이 걸리니까. 그런데 고글을 쓰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잖아요. 대사도 안 들리고. 그런 부분에서 슈퍼바이저 했던 산악친구들과 고민과 고민을 거듭했어요. 늘 여러 가능성들과의 싸움이었죠.

10. (이 질문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영화를 보면 박무택(정우) 아내(정유미)가 시신을 수습하는 원정대에게 포기를 권하며 “오빠가 산을 좋아하나 봐요. 대원들이랑 같이 산에 남아있고 싶은 가봐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조심스러운 질문인데, 산 사람 박무택 입장에서는 죽어서 산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잠시 해봤어요. 과연 데려오는 것만이 옳은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조금 들었습니다.
황정민: 고(故) 박무택 대원이 있는 곳이 망원경을 통해 실제로 보여요.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그가 있어요. 그러니까 전 세계 산악인들이 그 주검을 밟고 지나가게 되는 거죠.
히말라야
히말라야
10. 아… 그건 또 완전히 다른 문제군요.
황정민: 그렇죠. 저는 그래서 엄홍길 대장님의 뜻이 충분히 수긍 가더라고요. 그가 표지판으로 쓰이는 게 싫었던 거죠. 그게 한국 사람들의 정서인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지니는 힘이기도 하고요. 전 세계 산악 역사상 이런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위험해요. 구조하러 갔다가 자칫 죽을 수도 있어요. 자기 몸 하나 가누기가 힘든데, 주검을 데리고 내려오겠다? 보통의 정신으로는 못하죠. 대단한 겁니다.

10. 이번 영화를 찍으며 외로움과 자주 조우했다고 들었습니다.
황정민: 엄청나게 외로웠죠. 대장 역할을 하다 보면, 애들에게 큰 소리를 쳐야 할 때가 있어요.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요. 솔선수범해야 하는 지점들도 많죠. 그래야만 내가 애들에게 야단을 칠 수 있어요. 나는 안 하면서 시키기만 하는 건 완전 ‘양아치’잖아요. 그런 소리를 듣기 싫으니까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 했어요. 저도 고소가 왔어요. 사람인데 왜 안 그렇겠어요. 그럼에도 “난 괜찮아. 난 산악인 체질인가 봐” 이야기 하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혼자 방에 들어가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나’ 자괴감에 빠지곤 했죠.

10. 자신과의 싸움이셨군요.
황정민: 정말 그랬어요. 촬영하면서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어요 ‘제발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기를!’ ‘사고 없이 잘 끝나기만을!’ 그런 강박이 있다 보니 촬영 마지막 날 “자, 촬영 다 끝났습니다!” 하는데 와르르 무너진 거죠. 커다란 무게감들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울컥 하더라고요. 남자가 나이 처먹고 엉엉 울었어요. 창피하게.(웃음) 그만큼 저에겐 큰 무게감이었던 것 같아요.

10. 나이가 들수록 남자는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더군요.(웃음)
황정민: 그렇긴 해요. 하하하. 그런데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거든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데, 그때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니까 미치겠더라고요.

# “사랑이라는 감정 이야기할 때, 가장 행복해요”

10. 말씀하셨듯, 현장에서 점점 선배가 돼 가고 계십니다. 어떤가요. 어릴 때 선배들 사이에 있을 때와 지금처럼…
황정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아우~ 그때가 좋죠. ‘엉깔’수도 있고. 스태프들과도 술 마시며 키득키득 어울렸는데, 이제는 빨리 일어나 줬으면 하는 나이의 사람이 돼 버렸어요. 돈만 내 주고 빨리 갔으면 하는 사람이요.
황정민04
황정민04
10. 아, 뭔가 짠하네요.
황정민: 그런데 그런 순간이 와요. 어쩔 수 없어요. 그런 것들을 ‘히말라야’를 하면서 공부가 많이 됐어요. 대장으로서, 극을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 배우 황정민이 아닌 인간 황정민으로서 ‘어느 순간 이렇게 됐구나’ 하죠. 그런 것들을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나이인 것 같아요. 아마 앞으로 더 그러겠죠. 그러려면 ‘잘 늙기를 원한다고 얘기만 하지 말고, 꼰대처럼 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매일 해요. 그런 공부들을 이번 작품에서 많이 했어요.

10. 40대 남자들을 보면 스스로가 꼰대가 되지 않을까란 불안을 안고 있는 것 같아요.
황정민: 그런 두려움이 있어요. 내가 꼰대로 보이면 어쩌나 해요. 자신도 모르게 꼰대가 되기도 하고요. 그럴수록 스스로가 그 부분을 더 의식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배우로서 제가 잘 늙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50-60대에도 멜로를 찍고 싶거든요. 그러려면 잘 늙어야 해요. 전 진짜 60에도 멜로를 할 겁니다. 비웃으시면 안 돼요~ 하하하.

10. 비웃긴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 운명’ ‘행복’을 30대에, ‘남자가 사랑할 때’를 40대에 하셨잖아요? 황정민이 그리는 50대 멜로도 궁금합니다.
황정민: 저는 멜로가 너무 좋아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사랑은 모두가 아는 감정입니다. 관객 분들도 모두 사랑에 아파해 봤고, 사랑에 기뻐해 봤잖아요. 사랑이 지닌 디테일들을 모두 알 거란 말이죠. 멜로는 눈 하나의 깜박임에도 다른 느낌을 내요. 그런 디테일함을 잘 해낼 때 오는 쾌감이 분명 있어요. 그래서 너무나 하고 싶은데 잘 안 만들어지니까, 제작자들에게 부르짖죠. “하자~! 멜로를 해야 한다”(웃음)

10 누구나가 잘 아는 감정이기에 오히려 만들기 어려운 지점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멜로 장르가 뜸한 걸까요?
황정민: 음… 장사가 안 돼서?(웃음)

10. 하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같네요.
황정민: 맞아요. 좋은 멜로가 없는 것도 문제죠. 사랑이라는 감정을 디테일하게 다루기보다, 상업적인 부분에서 타협하기도 하니까. 이전에는 봄-가족영화, 여름-블록버스터, 가을-멜로, 이런 공식들이 있었어요.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 싶기도 해요. 요즘은 그런 거 없이 잘 되는 영화 장르에만 우르르 몰리니까. 아, 아쉽네요.
황정민05
황정민05
10. ‘행복’도 그렇고 ‘남자가 사랑할 때’도 그렇고, 멜로 캐릭터임에도 일방적으로 착하지 않은 남자를 보여줬어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느낌이랄까. 반면 근 1년 사랑받은 ‘국제시장’ ‘베테랑’ ‘히말라야’의 캐릭터들은 선한 인상이 많이 강합니다.
황정민: 그런데 저는 캐릭터 위주로 작품을 선택하지 않아요. ‘온리’(only) 이야기! 이야기 안에 캐릭터가 살아 숨 쉰다고 믿거든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들과 소통해야 인물이 살아 숨 쉬지, 이야기는 별로인데 캐릭터만 좋다? 아우~ 별롭니다.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일동웃음) 2015년에는 어찌하다보니 우연치 않게 착한 인물만 했는데, 올해엔 정우성과 함께 하는 ‘아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웃음) ‘아수라’에서 연기하는 박성배는 악의 원흉이거든요. 사람들이 봤을 땐 굉장히 근사한 정치인인데, 속은 악의 도가니인 인물입니다. 아, 너무 어려워요. 캐릭터 안에 약간의 비릿함도 있어야 하고, 능글능글함도 있어야 하는데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요. 왜 정치인들 보면 그런 게 있잖아요. 입이랑 눈이랑 따로 노는, 그런…(일동 웃음)

10. 놀라운 연기파들이죠! ‘신세계’ 정청(황정민)의 경우 겉은 영락없는 악인인데 속은 순수함이 있는 인물이었어요. ‘아수라’ 박성배와는 반대의 경우죠. 연기하는 입장에서 어떤 게 더 난해하나요.
황정민: ‘아수라’가 더 어려워요. 진짜 너무너무 어려워요. 요즘 어떻게 인물을 표현할까 고민의 연속입니다. 죽을 것 같아요.

# “나의 2015년을 표현한다면, ‘헐!’ ‘대박~!’”

10. 2015년 한국영화를 말할 때 황정민을 빼놓을 수 없어요. 한해 동원 관객수만 3000만입니다.
황정민: 미~친 거죠! 축복이고요. 제 인생에서 2015년을 표현한다면, “헐!” “대박~!”입니다. 인생에서 들춰낼 수 있는 한 해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죠. 그런 축복받은 해를 보낼 수 있게 해 준 관객들에게 너무너무 감사해요.

10. 배우 황정민 인생에 또 잊을 수 없는 해가 있다면요.
황정민: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촬영한 2000년을 잊을 수 없어요. 조연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큰 역할을 연기했어요. 그 영화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겁니다. 아직도 기억이 선해요. 제 이름이 박혀 있는 빨간색 의자를 받던 순간을요. 현장에서 단 한 번도 앉지 않았어요. 못 앉겠더라고요.

10. 배우들에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처음 받는 순간이 엄청난 의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자기만의 의자가 없는 분들이 현장에는 더 많잖아요? 의자 하나에 참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오가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어요.
황정민: 그래서 저는 요즘 현장 의자에서 제 이름을 지우거나 벗기곤 해요. “당장 벗겨라. 창피하니까” 그래요. 누구나가 앉을 수 있는 의자로 해 달라고 하죠. 의자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다만 첫 의자는 제게 좀 다르죠. 그건 굉장히 커요. 그 힘으로 지금도 달리고 있는 거니까요. 그 의자는 지금 저희 집에 있어요. 제 책상의자죠. 애가 하도 그 위에서 뛰어 놀아서 천이 많이 늘어나있습니다.(웃음)
황정민06
황정민06
10. 연기와 등산은 뭔가를 극복해 간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텐데, 연기적 한계를 느낄 때가 있나요?
황정민: 늘 느껴요. 작품을 받으면 대본에다 ‘왜?’를 적어요. 하필 왜! ‘왜 이 시기에 이 사람들과 이 작품을 할까. 왜 이 인물이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까’하는 질문을 늘 해요. 깡패든 형사 역이든 다시 안 할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신세계’의 정청이 다시 떠오르지 않아야 하고, ‘베테랑’의 서도철이 생각나면 안 되죠. 캐릭터 구축을 하는데 분명히 한계점이 있어요. 그런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늘 노력해요.

10. 2월에 또 ‘검사외전’으로 관객을 만나요. 정말 열심히 달리고 계십니다.
황정민: 소처럼 일한다고 하더라고요. 소보다 더 일하는 것 같기도 해요. 요즘은 소가 그렇게 일을 많이 하지는 않잖아요? 하하하

10. 흐르는 시간이 두려워서 더 열심히 달리는 것도 있을까요?
황정민: 그것도 없지 않아 있어요. 너무 아까워요. 시간이 가는 게. 그리고 40 넘어서 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졌어요. 너무 즐거운데 시간이 빨리 가니까 아쉬운 거죠. 지금이 제겐 딱 좋은 시기인 것 같아요. 아깝지 않게 지금을 보내고 싶어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