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th BIFF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영화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인터뷰
임선애 감독. /사진=이하늘 기자
임선애 감독. /사진=이하늘 기자
임선애 감독은 얼핏 지나칠 수도 있는 사회의 뭉뚱그려진 지점들을 발굴해 따스하게 보듬어준다. 첫 장편 데뷔작 '69세'(2020)를 시작으로 한 발자국씩 차분히 발을 내딛는 임선애 감독은 두 번째 장편 영화 '세기말의 사랑'(2023)으로 올해 부산을 찾았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부문에 선정된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새천년을 앞두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영미(이유영)가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임선우)을 만나 불편한 동거를 하며 잃었던 삶과 사랑을 회복해가는 이야기다. 영미의 망가졌던 세상이 유진과의 만남으로 복원되듯, 우리는 '세기말의 사랑'을 만나며 품 안에 담아둔 상처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Q.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파노라마 부문에 '세기말의 사랑'이 공식 초청됐다. 전작 '69세'는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되었고, KNN 관객상을 받기도 했다. '세기말의 사랑'으로 부산을 다시 찾은 소감은 어떤가.

2년 전, 부산 아시아 프로젝트 마켓에 선정됐었다. 영화를 완성하고 다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서 스스로 기특한 마음이다. 요즘 영화 시장이 어려워서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캐나다의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는 첫 상영이다. 같이 연기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한자리에 모일 수 있어서 즐거웠던 것 같다.


Q. '세기말의 사랑'이라는 제목은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하고 낭만적인 사랑에 관한 느낌이다. 특히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1999년에는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는 믿음에 사람들이 불안해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2013년도에 한예종 전문사 시나리오 졸업작품으로 썼던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2012년을 배경으로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에 2012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영미는 큰어머니 집에서 얹혀사는 인물이고, 직장인 공장에서도 일종의 비호감 캐릭터로 표현된다. 그런 인물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용기 내서 고백하려면, 큰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더라. 세상이 끝나는 정도의 계기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웃음) 나는 1999년을 통과한 세대다. 그때 실제로 밀레니엄 버그라고 데스크탑에 있던 파일은 플로피에 넣고, 라면과 참치캔을 사다 놓기도 했다. 나 역시도 불안했구나. 세상이 내일 멸망한다면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Q. 극 중에서 영미(이유영)는 왠지 모르게 이경미 감독의 '미스 홍당무' 속 양미숙(공효진) 캐릭터를 연상시킨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과 비뚤어진 모난 이빨, 푸석거리는 피부로 그려지지 않나. 심지어 직원들은 영미를 보고 "세기말 떴다"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영미는 자기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상황에 이끌려서 산 것 같다. 영미 스스로가 공장 안에서 위축되었다기보다는 분위기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해'라고 주눅 들어있다. 보통 선입견 안에서 장애인이라고 할 때, 많이 불편하고 연민하는 시선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유진이 오히려 영미보다 당당하고 요구하는, 즉 영미에게 없는 면을 유진이 갖고 있다. 약자인 두 사람의 이야기다. 두 인물이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존중감을 깨닫는 지점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들이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아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Q. 영미 역의 이유영 배우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이유영 배우가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스펙트럼도 넓은데, 섬세한 연기도 잘하더라. 이유영 배우의 얼굴에서 뭔가 개구진 표정들을 엿봤던 것 같다. 영미 캐릭터는 마냥 소극적이지 않다. 머플러 안에 입을 가리고 '저것들은' 하면서 이상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유영 배우가 유약해 보이는데 단단해 보이는 느낌을 받았고, 영미의 양가적인 감정을 연기하는데 제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영 배우는 망가지는 것에 대한 거리낌도 없었다.


Q. 공교롭게도 1999년의 마지막 날에 영미의 세계는 무너져내린다. 이모의 장례식장 발인과 짝사랑하는 도영의 공금횡령을 몰래 돕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나.

큰어머니라는 존재가 짐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미를 구원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영미는 큰어머니의 죽음이 이뤄지고 도영에게 자정까지 나랑 있어 주면 안 되냐고 묻지 않나. 아마 영미는 세상이 망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어쩌면 고단한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미의 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 거다. 외피를 하나씩 걷어낸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겠다. 아마 영미가 많이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Q. 영미가 흠모하는 같은 회사 직원, 구도영 캐릭터는 현실적이지만 순애보적인 면도 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있고 눈길이 간다. 노재원 배우와는 어떤 인연으로 작업하게 됐나.

사실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69세' 때도 동인(기주봉) 캐릭터가 로맨티스트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웃음) 내가 만드는 영화 안에서 폭력적이고, 무례한 인물을 정면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도영은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쫓기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도영이 용기를 가지는 인물로 그려지길 바랐다. 어떤 작품에서 노재원 배우를 봤는데 눈에 띄더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름을 적었던 것 같다. 이 배우와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계속 추적했다(웃음) 그런데 노재원 배우의 소속사 대표와 내가 인연이 있어서 연락을 할 수 있게 됐다. 시나리오 완성되면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Q. 짙은 선글라스와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처음 등장한 도영의 아내 유진(임선우)는 고슴도치 같은 캐릭터다. 장애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유진은 겉보기에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지만 누구보다 아픔이 많지 않나. 임선우 배우가 배역을 맡기까지 고민도 많았을 것 같다.

유진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도록 첫 등장을 자동차 좌석에 앉아있는 장면으로 구성했다. '영미가 왜 화장실까지 굳이 따라가야 하지'라는 의문점이 들었으면 했다. 유진은 영미가 딱 봤을 때, 외형적으로 질투를 할 수 있는 호감형 외모를 지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딱 포스가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랄까. 실제로 임선우 배우가 지닌 차도녀 같은 느낌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약간 도발적이고 개구진 모습을 봤는데, 더 보고 싶더라. 사실 임선우 배우가 표정으로만 연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온몸으로 연기했다. 신체를 모두 제어해야 해서, 촬영이 끝나고 2~3개월 정도는 재활하셨다.


Q. 영미는 어린 시절 생긴 화상 흉터를 감추고 다니다가, 화장실에서 유진에게 처음으로 내보인다. 그 장면에서 유진은 "한번 만져봐도 되냐"라고 묻는다. 유진의 손을 영미가 스스로 들어 가져다 대는 장면은 마치 상처를 직면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가장 감추고 싶은 사적인 공간이 화장실 아닌가. 영미도 유진 앞에서만큼은 상처를 드러냈으면 했다. 단순히 외피에 있는 상처가 아니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내면의 트라우마를 말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영미의 화상도 일종의 장애가 아닌가. 결국은 같은 사람이란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끝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내면을 탁 드러낸 거다. 최초로 그 상처를 만지게 되는 것은 유진의 손이지만, 자신의 손으로 끌어오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보듬어주는 순간이라는 것을 은유하고 싶었다.


Q. 유진과 도영이 마지막 접견을 PC 통신으로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꺼진 윈도우 화면 너머로 유진이 "거기 있냐"라며 도영을 부르지 않나.

요즘은 보고 싶으면 연락해서 보는 것이 너무 당연한 시대가 아닌가. 유진이 21세기에 걸맞게 화상 접견을 했지만, 사실 유진에게는 어려움이 있다. 윈도우 화면은 손가락 한 번만 까딱하면 사라지지 않는데, 유진은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 유진을 통해서 장애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고증적으로 맞는지 찾아봤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더라. 그 신은 시나리오 초반부터 변함없이 갖고 있던 장면이었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Q. 전작 '69세'도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세기말의 사랑'도 그렇지 않나. 감독님이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결국 사랑이 꼭 남녀 간의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유진이 도영과의 접견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말한 이상한 여자를 만났었다. 네가 처음으로 안심이 되더라"라는 말이 사랑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이 말 안에는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 '그 사람이랑 잘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말들이 포함된 거다. 사랑이 꼭 내 곁에만 둬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반대로 도영은 "나는 네가 안심이 안 돼"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 역시도 사랑의 언어다. 두 여자도 서로를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퀴어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가 나를 껴안을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을 기꺼이 껴안아 줄 수 있는 것이 사랑 아닐까.


Q. '세기말의 사랑'을 관객들에게 소개해달라.

스스로 자기 삶을 구원하는 이야기다. 결국 사랑도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영미와 유진이 서로 만나면서 일종의 각성 혹은 그동안 내지 못했던 용기나 숨겨둔 상처를 마주하는 순간으로 봐주면 좋겠다. 장애인의 인권에 관한 영화보다 두 여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으로 가볍게 진입하시면 좋을 것 같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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