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의 진 태트록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 굳히는 중
저음의 목소리와 강단 있는 표정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 굳히는 중
저음의 목소리와 강단 있는 표정

저음의 목소리에 강단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작은 체구임에도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배우 플로렌스 퓨. 영국 출생의 플로렌스 퓨는 2014년 영화 '폴링'으로 데뷔해 자신만의 색깔로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중이다. 특유의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성격과 여장부 같은 모습, 길들지 않는 말괄량이 같은 천진함과 신경쇠약적인 면모까지. 한 가지 색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원석 같은 배우다.
지난 15일 국내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에서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과거 연인인 진 태트록 역을 맡아 짧지만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플로렌스 퓨가 맡은 진 태트록은 반항적이면서 생각을 예측할 수 없지만, 오펜하이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중적인 캐릭터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위해 들고 온 꽃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도 발길이 끊이면 왜 오지 않았느냐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7) 캐서린 역

소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결핍되고 억압되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던 소녀가 여성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적 없는 결혼과 가로막힌 활동에 절망하는 대신 일탈을 선택한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하인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 지루함을 느끼며 고단한 표정은 점차 짜릿함을 즐기며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모습으로 변한다. 플로렌스 퓨는 악랄하고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광기 어린 집착을 표현해냈다.
■ 영화 '미드소마'(2019) 대니 역

'유전'(2018), '보 이즈 어프레이드'(2023)의 감독 아리 에스터는 '미드소마'를 통해 낯선 공포를 선사한다. '미드소마'에서 플로렌스 퓨는 가족을 애도하는 시간으로 괴로워하지만, 잠시 현실을 잊고 전통 의상과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마을의 규칙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한 명씩 사라지는 남자친구의 친구들과 성스러운 의식을 지속하는 기묘한 분위기의 마을 사람들. 플로렌스 퓨는 삶의 의욕을 잃는 초점 없는 눈빛과 죄책감에 울분을 토해내는 목소리, 5월의 여왕으로 추앙받으며 생기와 활력이 돈 얼굴로 단계적으로 감정을 쌓아간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분에 빠져들게 하는 '미드소마'는 플로렌스 퓨의 연기를 주목하면 좋을 듯싶다.
■ 영국 BBC one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8) 찰리 역

'리틀 드러머 걸'에서 플로렌스 퓨는 정체를 숨긴 요원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게 끌려 여행을 떠나지만, 목숨을 위협하는 작전에 휘말리게 된 대니 역을 맡았다. 테러리스트라는 배역을 연기해야 하는 찰리는 스파이가 되어 이스라엘 정보국 요원들을 위해서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테러 작전에 침투해야만 한다. 스파이를 해야 할 이유가 부재한 대니의 서사에 점층적으로 감정적 개연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단연 플로렌스 퓨의 연기.
이미지 트레이닝하며 훈련하는 상황에서 실전으로 넘어가 목숨을 걸고 역할에 이입해야 하는 찰리는 진실과 거짓, 사랑과 첩보를 오가는 상황에 놓여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듯 경계를 넘나드는 찰리의 당돌함과 두려움을 가까스로 숨기는 뻔뻔함은 6부작 드라마 시리즈의 흐름을 유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특히 '진짜'가 되기 위해서 마음마저도 숨기는 찰리의 철저함은 어지럽고 불안정한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한다.
■ 영화 '작은 아씨들'(2019) 에이미 마치 역

플로렌스 퓨는 '작은 아씨들'에서 넷째 에이미를 연기했다. 첫째 언니 메그(엠마 왓슨), 둘째 조(시얼샤 로넌), 셋째 베스(엘리자 스캔런)을 보면서 자기 삶을 견고하게 쌓아가는 막내를 보여줬다.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스토리와 캐릭터인 만큼 기존의 막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징징대는 모습 대신에 어리숙하지만,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소녀로 묘사된다. 특히나 둘째 언니 조에게 사랑에 빠진 로리(티모시 샬라메)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며 다가가려고 하지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존의 강인하고 당돌한 보여줬던 플로렌스 퓨의 색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플로렌스 퓨는 어떤 장르를 입어도 어울리는 매력적인 배우. 그만큼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할리우드에 자신의 발자국을 하나씩 남기면서 필모그래피를 천천히 쌓아가는 플로렌스 퓨. '오펜하이머'에서 킬리언 머피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만큼이나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다. 플로렌스 퓨의 연기 변신이 다시금 기다려진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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