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룡을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영화 을 끝낸 그를 둘러싼 관심은 MBC 의 최 관장이 끌어온 것이었다. 완성도나 시청률, 그 어느 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웠던 드라마의 구원투수는 애초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 관장이었다. 전형적으로 소비되기 쉬었던 캐릭터를 전혀 반대의 지점에서 돋보이게 했던 류승룡의 내공은 그 이후, 기다렸다는 듯 폭발하기 시작했다. , , 처럼 선과 악, 주연과 조연이라는 기계적인 이분법을 떠나서 날카롭게 시선을 파고들던 그는 2011년, 745만 관객을 동원한 로 배우로서 이전과는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하 )의 임수정, 이선균과 함께 만들어낸 로맨틱 코미디가 궁금했다. 더 큰 규모, 더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프로젝트로 옮겨갈 수 있었던 시점에서 택한 이야기는 정인(임수정)과 두현(이선균) 중심이었고, 그가 맡은 전설적인 카사노바 성기는 이제껏 해본 적 없는 판타지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게 성기에 대해서, 현 지점에서 배우로서의 계획과 야망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질문보다 더 단단한 답을 들었다.

의 카사노바 성기는 엄청난 설정들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여자들이 목숨을 걸 만큼 마성의 남자인데다가 스페인어, 불어, 아프리카어까지 능통하고 예술적인 능력도 뛰어나다. 거기에 엄청난 부자이기도 한데 이쯤 되면 현실에는 없는 인물 아닌가.
류승룡: 그래도 성기의 엉뚱한 모습이나 예측 불허의 돌발상황, 참신한 아이디어? 그리고 좀 섬세한 부분들, 느끼한 부분들에다 약간 허당 같은 부분은 내 안에서 많이 골라냈다. 비 맞아가지고 불쌍하고 귀여운데 만지고 싶지 않은 강아지 같은 느낌이랄까? (웃음) 그동안 대중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대학교 친구들이나 날 아는 지인들은 완전히 나라고 하더라. 내 안에 있는 모습 중에서도 무엇을 절제하고 극대화 시켜야 될 지를 결정하는 것이 제일 어렵고 고민되는 작업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중적인 모습이 있고 자기 안에 자기가 너무 많으니까. 그걸 잘라버리거나 퇴화시키거나 하면서 사는데 최면술처럼 내 안에 있던 기억이나 습성을 끄집어내서 효율적으로 극대화 시키는 작업이 연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성기가 비호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류승룡 “계속 파다보면 남들도, 나도 몰랐던 맑은 물이 나오지 않을까”
류승룡 “계속 파다보면 남들도, 나도 몰랐던 맑은 물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연기를 한다면 배우는 자기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파악 하고 있어야 하겠다. 하지만 대게는 자기가 몰랐던 모습을 주변을 통해 알게 되거나 스스로에 대해 의외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류승룡: 물론 그런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에만 해도 사십 인생동안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겠나. 그러나 그건 빙산의 일각이다. 모든 것을 내 안에서부터, 내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오만이다. 수많은 관찰들, 간접체험들, 혹은 여행이나 책을 통해서 체화시킨 것들에 덕을 보는 것도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없는 것들, 내가 몰랐던 부분을 끌어내주는 감독들에게 감사한 거고.

전설적인 카사노바로 설정된 성기는 현실에서의 간접 경험만으로 체화하기엔 한계가 있는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정인과 두현의 불화를 해소해주는 일종의 큐피드 같은 역할인데.
류승룡: (이)선균이 맡아왔던 인물처럼 어디선가 봤을 법한 생활연기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내가 그동안 했던 의 쥬신타나 도 그랬고 현실에서는 약간 전형성을 띤 인물을 맡았던 것 같다. 성기 같은 경우는 유니크하고 코믹한 인물이다. 그래서 오버 연기나 뮤지컬적인 요소들, 예전 신성일 선생님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인물은 현실속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그런 바디 랭귀지로 관객과의 거리를 뒀던 거고 그게 좀 주효한 거 같다. 사실 (이)선균과의 신에서 큰 물고기를 먹는 것 같은 건 비호감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판타지적인 인물이라는 관객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공감을 얻어낸 것 같다.

그런 오버 액팅을 지양하는 배우라고 생각했기에 는 더욱 의외였다. 의 최 관장만 해도 그간 TV에서 그렸던 전형적인 게이와는 전혀 다른 일상적인 인물로 표현하지 않았나,
류승룡: 사실 오버 액팅은 완전, 절대로 금기시 하는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규동 감독님과 굉장히 많이 얘기했고 그게 이 역할에는 필요한 거라는 합의가 있었다. 카사노바를 너무나 리얼하게 연기했다면 되게 진지하고 무거웠을 거다. 이 영화에 환기라는 게 없으니까. 성기는 두현과 정인 사이에서 촉매가 돼야지 불안한 요소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성기가 정인을 어떻게 꼬실 지 재밌게 봐야지 가슴을 졸이면서 보면 안 되거든. 그런 면에서 오버액팅이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성기라는 귀엽기도 하면서 허당인데다가 보호해주고 싶은 마성남 캐릭터를 만나기 전에 카사노바형의 남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류승룡: 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좀 기운이 음하다. 뭐 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있지 않나. 국빈관이나 그런 데. (웃음) 성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굉장히 다재다능하고 능력도 있고 자기관리도 뛰어나고. 외국어나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들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면 얼마나 머리도 좋겠나. 그러다보니까 사교도 좋은 사람이지. 동성이나 남녀노소, 어린아이들 하고도 한참동안 같이 놀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두현이하고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게 된 거다. 정인과의 카운슬링도 해주지 않나. 어떤 관계든지 우정으로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주위에 없더라. (웃음)

성기는 외국어에 커피, 음악, 미술 등 여러가지 면에서 유능하지만 정작 정인이 성기에게 끌린 것은 그런 작업의 기술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었다. 결국 남자가 여자에게 어필하는 것은 그런 사소한 것이라는 뜻이 될 수 있을까.
류승룡: 오해다. 그런 배경들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성기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부자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런 거 하나도 없이 거지인데 말 잘 들어주고 그러면 귀찮고 무섭지. (웃음) 남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내실을 기한 상태에서 그렇게 얘기도 잘 들어주고 했을 때 호감인 거지 머리는 텅텅 비고 성격도 이상하고 인격적으로 결함 있는 애가 그러면 경계되고 무섭다. 그건 분명하다. 성기 같은 배경 없이 나 같이 생긴 애가 그러면 무섭고 느끼하지. (웃음)

“정인과 두현의 문제는 소통의 부재”
류승룡 “계속 파다보면 남들도, 나도 몰랐던 맑은 물이 나오지 않을까”
류승룡 “계속 파다보면 남들도, 나도 몰랐던 맑은 물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멋진 남자상에 성기가 근접해 있는 건가.
류승룡: 나는 그렇게 접근했다. 멋진 남자에게는 능력도 능력이고, 유머도 있고, 귀여운 부분도 있어야 된다. 개인적으로는 우유통 들다가 정인에게 밀리는 부족한 모습 같은 게 좋더라. 기초적인 건데 여자들에게 모성애나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러운 강아지처럼 불쌍하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어서 쉽게 접근하기는 뭐한데 뭔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성기의 모습들이 좋더라. 함부로 보이지 않고.

성기 캐릭터를 위해 여성을 유혹하는 비법을 담은 책도 많이 봤다고 하는데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나의 어떤 점이 여성에게 어필했던 것 같나.
류승룡: 그냥 얘기 잘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진심을 담아서 얘기해줬던 것, 그게 최고인 것 같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그리고 여자가 외로울 때, 필요할 때 언제든 달려가 주는 것. 남자들이 그걸 못한다. 여자가 날 필요로 할 때 자기 몸 피곤하다고 못 달려간다. 그런데 그럴 때 무조건 가야된다. 여자들은 꼭 시험에 들게 하거든. 아주 어려운 시험에. (웃음)

배우로서가 아닌 결혼 9년차의 남편 류승룡은 부부문제를 다룬 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더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류승룡: 정인과 두현의 문제는 소통의 부재다. 대화 방법의 잘못됨과 단절,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누가 봐도 정인은 옳은 말만 하고 누가 봐도 두현도 정상적인 사람이다. 둘 다 공감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두 배우가 잘 했는데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와인을 마시면서 “여보, 오빠 나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너무 외롭다” 이런 얘기를 했으면 그 지경까지는 안 왔을 거 같다. 근데 대번에 성기가 두현에게 하는 말이 일단 정인이 직업을 구하게 하라고 하지 않나. 딱 해결책을 찾아주는 거지. 그러면서 정인의 내면에서 하고 싶었던 자아를 찾는 작업을 성기를 통해서 하게 되는 거다.

결혼 생활 선배로서 실질적인 조언을 한다면.
류승룡: 영화에서도 정인과 두현은 싸우고 막 나가고 그런다. 그런데 싸우면 그 분을 하루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각방을 쓰면 안 된다. 절대로. 그 날 풀고 자야한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런 방법 쓴다. 매일 있었던 일들을 서로 다 얘기 한다. 아주 힘들었던 얘기는 안하지만 집사람한테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묻고 얘기한다. 얼굴은 모르지만 집사람이 만나는 아줌마들 이름까지도 다 안다. (웃음) 또 집사람도 (이)선균이가 어떻고 (임)수정이가 어떻고 현장이 어떻고 이런 걸 다 안다. 아마 실제로 보면 되게 반가울 거다. 그런 얘기를 통해서 공통적인 관심사가 생기고 서로의 일상이 생경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기처럼 열병을 앓는 사랑, 보고 싶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진짜 헤어지기 싫은 상태는 6개월에서 1년이면 끝난다. 그 다음부터는 신뢰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사는 것, 생각이 같은 것이 중요하다.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같이 쇼핑을 한다거나, 여행을 가고, 누구 뒷담화를 같이 한다든가 하면서 공통 관심사 유지해야 한다.

지금처럼 영화를 끝내고나서 극중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떤가. 현재는 를 촬영 중이고 을 준비 중이다. 이미 내 주파수는 다른 인물에 맞춰져있는데 이렇게 지난 인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배우들에게 곤혹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류승룡: 기존에 많은 전작들을 거치면서 그런 트레이닝은 충분히 된 것 같다. (웃음) 감정의 분리수거와 마찬가지로 일의 분리수거도 중요하다. 오늘 하는 일이 다른 거랑 섞이지 않게 하는 것. 공부를 잘하려면 정리를 잘 해야 한다지 않나. 옷이 200벌이면 100벌을 버리면 입을 옷이 더 많아진다고 하고. 정리의 미학이거든. 오늘은 무조건 말고 다른 건 없다. 내일은 감독님 하고 신바이신하고, 그럼 또 딴 건 없다. 그 다음날은 무대 인사. 그 다음은 촬영. 그렇게 분리수거를 하는 방법들을 잘 정립시킨 것 같다. 설사 너무 좋은 게 있더라도 음식물 쓰레기랑 섞이면 버려야 되지 않나. 그리고 쓰레기를 그때그때 묵히면 안 되고 버려야한다. 그래야 냄새가 안 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스스로 봤을 때도 대견하다”
류승룡 “계속 파다보면 남들도, 나도 몰랐던 맑은 물이 나오지 않을까”
류승룡 “계속 파다보면 남들도, 나도 몰랐던 맑은 물이 나오지 않을까”
분리수거의 다른 지점을 건드려 본다면 의 허균은 어떤 인물인가. 이미 촬영이 80% 정도 진행됐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허균은 의 작가가 다인 경우가 많다.
류승룡: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이다. 고서나 자료를 찾아봤는데 실제로 허균은 식탐도 많았고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현실에 대한 불만이 어마어마했던 사람이더라. 당대의 현실하고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허균이란 인물이라면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 천민을 왕으로 세울 수 있었던 거다. 허균은 지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근엄하고 유머러스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에선 지적장애를 앓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연기적인 테크닉 측면에서는 가장 큰 도전이 될 것 같다.
류승룡: 그래서 좀 걱정이다. 지적장애에도 여러 가지 증후군이 있고 이번에 롤 모델을 만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게 설정은 7살짜리 수준의 지적 능력인데 그 친구가 도저히 구사할 수 없는 언어를 통해서 정보를 전달해야하니까 어휘 수준이 높다. 그러면 가짜처럼 느껴지고 안 그러자니 영화가 불친절해지고 너무나 강박이 많이 생긴다. 연기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성기의 전형성을 깨려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기존에 알고 있는 바보 연기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분들에게, 그 분들의 부모님에게 두 번 돌을 던지고 싶진 않다. 그분들의 진심을 그리고 싶다.

현재 시점에서 배우로서 류승룡은 어떤 방향성을 가질까. 배우로서 이미 한두 차례 터닝 포인트를 지났다. 로는 흥행이라는 쉽지 않은 고지까지 올라간 데다 다작으로 소모되는 느낌도 들었을 것 같다.
류승룡: 예전 같으면 한 번에 세 작품에 에너지를 부었던 걸 요즘엔 하나씩 하나씩 더 신중하게 만드는 작업들이 느는 걸 보면 확실히 바뀐 것 같다. 계획 같은 건 특별히 없고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는 게 다다. 물론 내가 소모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걱정은 있었다. 1년에 4편씩 찍으니까. 어떤 캐릭터를 하고나면 나중에 같은 역을 다시 하기는 어렵다. 한계가 있는 게 우리나라 남자배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형사 아니면 검사 아니면 북한 아니면 남쪽 아니면 조폭이다. 그런데 나는 그걸 거의 다 한 거다. 그런 면에서 걱정했지만 지금은 다시 형사를 하든 조폭을 하든 그 캐릭터를 파면 맑은 물이 나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준익 감독님께서 찍을 때 하신 말씀이 있다. 동시에 서너 작품을 찍고 있을 때였는데 감독님에게 “저는 남들이 한 작품 하는 동안 다섯 작품을 해야 생활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배우는 한 캐릭터 떠나보낼 때마다 총알이 없어집니다. 저는 너무 다작해서 힘들고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승룡아, 땅을 파면 팔수록 맑은 물이 나온다. 물론 니 손톱이 깨지고 찢어지고 아프겠지. 하지만 땅을 파면 팔수록 더 맑은 물이 나와. 너한테 한계를 두지마. 다작? 그러지 말고 니가 후회 없이 그 캐릭터를 파. 그럼 거기서 다른 사람들이 상상 못하고, 너도 모르는 맑은 물이 나올 거야.” 나는 그 말을 붙잡고 여기까지 왔고 그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스스로 봤을 때도 대견하긴 하다. 그래서 앞으로 더 책임감이 가지고, 신중해야할 것 같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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