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비 내리는 고속도로 휴게소, 남자가 잠시 커피를 사러 다녀온 사이 여자는 사라진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두었던 행복한 연인이었지만 남자에게 남은 것은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머리핀 하나뿐이다.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지만 여자의 흔적을 따라 한 발 내디딜수록 질문은 낯선 공포로 바뀌어 남자를 덮친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시작부터 차분히, 그러나 집요하게 보는 이의 숨통을 짓누르는 영화 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버블 경제 시대의 거품이 꺼진 90년대 초반, 침체된 일본 사회의 공기를 2012년의 대한민국으로 가져오는 데 변영주 감독은 꼬박 5년을 바쳤다. 거대한 성처럼 탄탄하게 쌓아올려진 원작과 싸우며 20고까지 시나리오를 다시 썼고, 투자 문제로도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원작에 반했던 한 사람의 독자이자 작품 안에서 동시대성을 그려내고 싶은 창작자로서 그는 손 떼고 싶은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저더러 시나리오 쓰느라, 저예산으로 찍느라 힘들겠다고 하지만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 등 고생한 배우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앞으로 제가 영화를 못 만들거나 불안한 시절이 또 온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마음은 저에게 거대한 힘이 될 거고, 그걸 또다시 느끼고 싶어서라도 다음을 준비하게 될 것 같아요.”

95년부터 99년에 걸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3부작을 만든 뒤 “할머니들만큼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영화는 못 봤지만 정말 수고하셨고 훌륭하십니다”라는 다소 씁쓸한 인사말을 듣는 데 지치기도 했던 변영주 감독은 “보지 않고서는 칭찬도 할 수 없고 욕도 하기 힘든 영화를 만들고 싶어” 극영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편의 외도에 괴로워하다 자신도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 빠져 드는 주부를 주인공으로 한 ,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에서 세상에 순응하지도 폭발하지도 못하는 열여덟 청춘을 그린 에 이은 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복기하되, 나에게 또 기회가 오지 않을지라도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를 잊지 않고자 하는” 그가 단단히 벼려 내놓은 무쇠 같은 영화다. 그리고 올해로 마흔 여섯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침이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서 깨곤 한다”는 변영주 감독이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들을 추천했다.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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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Descendants)
2012년 | 알렉산더 페인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중에서도 최고고,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던 영화중에서도 최고예요. 조지 클루니라는 배우가 정말 훌륭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소위 ‘로컬리티’라는 것이 단순한 지역주의가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영화 전체의 정서를 담당한다는 걸 너무나 잘 보여줘요.”

의 조지 클루니는 섹시한 사기꾼도, 성공한 해고 전문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의 맥길처럼 과도하게 코믹한 캐릭터도 아니다. 그가 연기한 맷 킹은 반항하는 사춘기 딸 때문에 힘들고, 아내가 바람피운 사실 때문에 황폐해진 서글픈, 하지만 그래서 보편적인 중년이다. 즉 이 작품에서 그의 연기가 훌륭하다면, 삶의 피곤함과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화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걸 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골든 글로브 역시 그에게 남우주연상으로 보답했다.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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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ystic River)
2003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는 이번 영화 만들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인데, 이 작품이 좋은 이유를 이 작품에만 한정해서 말하긴 어려워요.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정말 모두 다 좋거든요. 를 시작으로 그 후의 영화들은 각각 다른 것들을 묘사하면서도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나이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일대일로 붙어 그 결들을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대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소설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도 있지만, 훌륭한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건 감독에겐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세 친구가 엮인 이 미스터리에서, 각 캐릭터의 마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명실공히 거장의 자리에 오른 이 노감독은 한 사건이 만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어떻게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원작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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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eath In Venice)
1971년 | 루치노 비스콘티
“조금 부끄러운 취향일 수 있는데 전 정말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게 좋아요. (웃음) 초로의 작곡가가 아름다운 소년에게 사랑을 느끼는 역시 그런 탐미적인 매력이 있어요. 부르주아적인 낭만이라 해도 좋은데, 가령 그런 상상을 하는 거죠. 실제로 이런 영화는 존재하지 않지만, 같은 격변의 시대가 배경인데 그 와중에 죽어라 예쁜 여자 뒤만 쫓는 부르주아 남자의 이야기 같은 걸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취향이죠. 제가 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느낌도 그런 탐미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었어요.”

만약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소설 을 직접 영화화했다면, 완벽하게 아름다운 그레이 역으로 에 소년 타지오로 출연했던 비요른 안드레센을 골랐을 것이다. 주인공 구스타프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아름다움과 순수가 사람으로 현신한 듯한 타지오에게 마음을 뺏기고 그저 바라만 보는 과정이 말 그대로 너무 탐미적이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안드레센의 미모는 때로 설명 없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음을 증명한다.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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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awrence Of Arabia)
1962년 | 데이빗 린
“날 영화로 이끈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렸을 때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70㎜로 상영했던 걸 봤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신이 두 개 있어요. 영화 속에서 알리 역으로 나오는 오마 샤리프가 저 지평선에서 다가오는 롱 숏, 그리고 주인공 로렌스인 피터 오툴이 아라비아 족장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다가 안소니 퀸을 만나는 장면을 좋아해요.”

변영주 감독이 말한 알리의 등장 신만으로도 는 영화사에 남을 만한 고전 중의 고전이다. 결국 로렌스를 통해 서구식 영웅을 만든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아랍의 독립을 위한 로렌스의 순수한 열정이 결국 제국주의에 봉사했다는 씁쓸한 인식은 그 자체로 이 작품을 그저 그런 영웅 서사와 차별화한다.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황폐하게 차로 사막을 달리는 로렌스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순결함보다도, 순결함이 통할 수 없는 세계에 주목하게 한다.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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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tar Wars)
1978년 | 조지 루카스
“ 6부작은 언제나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할 때마다 보는 작품이에요. 저는 언젠가 이런 청춘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제게 는 청춘 연가거든요. 특히 모두들 ‘망작’이라고 했던 이 가장 좋았어요. 다스베이더의 탄생. 요즘은 모 통신사 광고에 그렇게 이용돼서 좀 싫지만, ‘워프’는 과학 기술이지 초능력이 아니라고요! (웃음) 어쨌든 제 꿈 중 하나는 에 대한 오마주 영화를 꼭 한 번 만들어보는 거예요.”

변영주 감독은 청춘물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광선검을 든 제다이의 정의감을 말할 것이며, 또한 누군가는 제국에 맞선 공화주의적 신념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만큼 이 거대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다양한 해석의 결을 지녔다. 제국의 등장과 공화정의 파괴, 그리고 영화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 다스베이더의 탄생과 그의 아들 루크의 등장 등 탄탄한 통시적 구조는 가히 압도적이다. 를 한 편도 보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단 한 편에라도 마음을 뺏긴다면 나머지 시리즈를 보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변영주│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영화
기나긴 시간을 거쳐 자신의 손으로부터 세상을 향해 를 내놓은 직후지만 벌써 다음에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다는 변영주 감독은,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 “이 세상에서 영화가 제일 중요하거나 영화만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믿는 것,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향해 그걸 건설하며 사는 사람인 게 제일 중요해요. 바꾸어 말하면 저에겐 제 다음 영화만큼이나 쌍용 자동차 해고자 문제가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해서, 관객들에게 정말 티끌만한 어떤 느낌이라도 제공해줄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영화보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는 이 맑은 눈의 감독을, 관객 이전에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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