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100퍼센트] 21세기의 시트콤을 구하라
[강명석의 100퍼센트] 21세기의 시트콤을 구하라
“결혼하면 그게 뭐, 결혼하면 안 순수한가? 그렇게 치면 백설공주는, 남자 7명이랑 동거했는데 과연 아무 일도 없었을까?” MBC 에브리원 (이하 )의 이 대사를 기억하자. ‘21세기 시트콤’의 시대 정신에 대한 예언일지도 모르니. 이적은 MBC (이하 ) 첫회에서 미래 사회의 가치관 변화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시트콤의 가치관 변화는 2012년부터 시작됐다. MBN 은 늙지 않는 뱀파이어라는 설정을 빌미로 신동엽과 김수미를 부부로 만들었다. KBS 에서 아내와 사별한 차세주(차인표)가 첫 눈에 반한 건 왕모(심혜진)가 아니라 그의 딸 채화(황우슬혜)다. SBS 의 경자(류현경)는 이혼했고, 민혁(민호)은 부모를 잃었다. tvN 은 이혼한 남녀가 서로의 아이를 함께 키운다. SBS 부터 20세기를 주도한 대가족 위주의 시트콤은 사라졌다. 대신 21세기 가족이 시트콤에 등장했다.

21세기 시트콤이 선택한 가족의 해체

시트콤이 어느 날 갑자기 21세기 가족의 탄생을 알린 것은 아니다. 이미 에서 김수미는 술에 취해 사위에게 뽀뽀를 하는 등 전통적인 어머니 상을 벗어났고, SBS 의 오지명은 미용실의 젊은 미용사에게 잠시나마 연정을 품었다. 부터 까지 이어지는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은 한국 시트콤의 가족사다. SBS 에서 재혼 가정이 등장했고, MBC 에서는 노년의 로맨스와 재혼 과정이 그려졌다. 드라마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던 노인들이 시트콤에서는 욕망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은 할아버지이자 경제권을 쥔 가부장 이덕화는 젊은 여성과 결혼하며 가부장부터 가족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김병욱 감독이 에 ‘할아버지’를 출연시키지 않는 것은 상징적이다. 집안의 실권은 부모 없는 윤계상(윤계상)과 김지원(김지원)에게 있다. 까지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 가족의 재구성이라면, 는 가족의 해체다. 가족은 경제적 몰락을 겪고, 청춘들은 직장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산다. 의 주무대인 희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은 가족보다 동료들과 더 가족처럼 붙어 지낸다. 까지의 시트콤이 기존의 가족 제도와 시트콤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수용했다면, 2012년의 시트콤은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JTBC 는 한국 부유층의 상징과도 같은 청담동을 통해 빈부 문제와 한국인의 허위의식을 풍자한다. 그러나, 는 기존 시트콤처럼 어머니와 자식, 또는 형제 자매의 관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작품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메시지에 비해 그 틀이 눈길을 끌만큼 새롭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외양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의 한계
[강명석의 100퍼센트] 21세기의 시트콤을 구하라
[강명석의 100퍼센트] 21세기의 시트콤을 구하라
스스로를 ‘인디 시트콤’이라 규정한 는 시트콤의 변화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는 실마리다. 중산층 가장 대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사는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주인공으로 삼고, 밝은 조명의 스튜디오 대신 산 속에서 약초캐는 전영록(혁권)의 모습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담는 이 시트콤은 어느 날 우리에게 다가온 시대의 풍경을 담는다. 인턴은 4대 보험도 안 되는 직장에서 종일 일하고, 스타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힘’과 오디션 프로그램의 ‘편집’에 의해 탄생한다. 청춘들은 돈 없는 현실에 막혀 결혼조차 하지 못한채 차라리 아이로 돌아가길 원한다. 기존의 틀에 담기엔 현실의 변화가 눈에 보일 만큼 급격하다. 실제로 방송사 바깥에서 저예산 인디 시트콤으로 출발한 는 21세기에 시트콤이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드라마도, 영화도 하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의 세상사가 대담한 설정과 형식 속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2011년은 고물가, 트위터, 현빈, TV 오디션 프로, 안철수, 그리고 여전히 돈, 돈의 해였다”라는 대사로 시작한 는 그 호기로운 시대 선언을 이어가지 못했다. 백진희로 대표되던 88만원 세대의 고난도, 경제적인 위기에 처한 안내상 가족의 고단한 삶도 사라졌다. 출연자들은 김병욱 감독의 전작처럼 모여 식사를 하고, 게임을 하고, 연애를 할 뿐이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진 윤계상은 언제나 착한 미소를 지을 뿐,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에 대한 부담은 지워져 있다. 오히려 SBS 같은 과거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에서는 잘나가는 의사라도 병원 소유주에게는 비위를 맞출 수 밖에 없는 속된 현실이 있었다. 가 후반으로 갈수록 출연자들의 애정관계를 중심에 둘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사랑 외에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 현실이 휘발 됐기 때문이다. 동시간대에 방영하는 도 차세주는 아내와 이혼한 것이 아니라 사별한 것이고, 그는 모든 가족을 넉넉하게 품는 반듯한 가장이다. 젊은 선녀에 대한 연정이라는 설정을 지워내면, 는 과거 홈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상파 일일 시트콤도 과거와 달라진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지상파 일일 시트콤은 ‘인디 시트콤’처럼 파격적일 수는 없다. 변화 중인 시대 속에서, 시트콤은 변화와 안정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있는 셈이다.

기로에 선 시트콤
[강명석의 100퍼센트] 21세기의 시트콤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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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전도, 변신 후도 아닌 변신 중에 있는 시트콤의 딜레마는 에피소드의 구성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는 선녀 왕모가 지상 세계에서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한 회 내내 반복한다. 도 못생긴 여자를 어떻게든 예쁘게 보려고 노력하는 뱀파이어 왕자의 이야기가 한 회 동안 반복된다. 한가지 웃음 포인트를 반복하고, 약간의 오해와 그 해결을 통해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기존 시트콤의 형식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웃음은 대부분 별난 캐릭터의 별난 행동을 반복하는 것에서 나온다. , 등 시트콤과 드라마의 경계를 허문 미국 드라마들은 기존 시트콤처럼 빠르게 치고 받는 웃음 대신 캐릭터의 현실에 바탕을 둔 아이러니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스릴러와 코미디 양쪽의 균형을 절묘하게 잡는 시나리오를 선보였다. 반면 한국 시트콤은 외양은 변했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트콤은 20세기든 21세기든 대부분 주 5회 방영되고, 과거와 비슷한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된다. 시트콤은 여전히 드라마에 비해 ‘저비용 고효율’의 장르처럼 인식되고, 빡빡한 제작 환경은 과감한 설정을 완성도로 이어가는데 한계를 낳는다.

그래서, 시트콤이 쏟아지는 지금의 상황은 아직 ‘붐’이나 ‘전성기’보다는 생존을 건 진화와 퇴화의 기로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편과 케이블 채널을 통해 작품 수는 늘어났고, 달라진 시대와 미국 시트콤의 영향은 한국 시트콤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제작 환경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고, 제작진은 달라진 설정으로 무엇을 말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시트콤의 진정한 21세기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대중을 만족시키는 작품이 등장하는 순간에 올 것이다. 어떤 미래학자들은 21세기동안 기존의 가족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21세기의 시트콤 역시 그렇게 될지 모른다.

글. 강명석 기자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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