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생의 기회라고 할 만한 결정적 순간은 봉오리를 굳게 다물고 있는 꽃에 우연히 날아들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알아봐 주지 않아도, 작은 역할만이 들어와도 연기가 재미있어서” 멈춰 서 있지 않았던 정유미는 단 한 장면만 출연하는 영화 <실미도>의 단역도 마다치 않았고, 중국 드라마 <파이브 스타 호텔>에 출연하게 됐을 때는 매일 밤 울면서도 밤마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근성까지 보여줬다. MBC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서 한동수(현빈)을 쫓아다니는 구김살 없는 아가씨 민은지, <보석비빔밥>의 애교 있는 이강지를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그동안의 성실함을 인정받아서였다. 그렇게 어려운 길목에서 한층 씩 성장의 계단을 밟아온 그가 촬영 현장에서 유일한 사치로 즐기는 커다란 컵에 담긴 커피 한 잔에 어울리는 노래라고 추천한 다음의 노래들은, 그래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 지칠 때 자신을 추스를 수 있게 해주는 소박하고 따뜻한 노래들인지도 모른다.
10cm의 노래는 맛깔스럽다. 정유미가 커피 한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가장 먼저 ‘아메리카노’를 떠올린 것도 그런 맛깔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마치 TV에서 맛있는 맛집을 소개할 때, 야근 중에 들어간 맛집 블로그에서 야식 테러 사진을 봤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가득 배어 나오는 군침처럼 말이다. 한국어를 잘 모르는 외국인도 록 페스티벌에서 합창에 참여하는 노래가 된 ‘아메리카노’는 쉽고, 재미있고, 솔직하다. 무엇보다 젬베와 어쿠스틱 기타로 이루어진 따뜻한 사운드와 ‘아메아메아메’를 부르는 권정열의 묘한 매력의 보컬은 쓴 커피를 자꾸 찾게 하는 이상한 매력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쓰디쓴 커피는 어른의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마시는 커피를 몰래 한입 훔쳐 먹고 이런 것을 왜 마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도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가 쌓이면서 조금씩 커피의 맛을 알아나간다. 정유미가 “듣고 있으면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노래”라고 추천한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조용히 듣는 것만으로 가슴을 흔든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하는 노래”라는 정유미의 말처럼 김광석의 소박한 목소리는 인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특유의 감성과 목소리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던 영화 <원스>(Once)를 보자마자 OST를 구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정유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붐을 일으키기 전 “초기에 극장에서 봤는데, 곳곳에서 들리는 노래가 아주 좋아서 집에 오자마자 노래부터 찾아들었다”라는 정유미가 추천한 곡은 글렌 핸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가 함께 부른 ‘Falling Slowly’. 인생의 씁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아픔을 때로는 섬세하게, 그러다가도 폭발적으로 토해내는 ‘Falling Slowly’는 아무 군더더기 붙이는 말없이도 모든 사람이 가슴 속에 품은 각자의 사연들을 위로한다.
밥 딜런의 노래 중에서도 정유미가 추천한 곡은 ‘Mr. Tambourine Man’. 결코 쓸쓸한 정서를 가진 곡이 아님에도 어쿠스틱 기타 한 대에 실린 밥 딜런의 목소리는 인생의 깊이가 담겨 있다. “해질녘에 밥 딜런의 목소리와 함께 한 커피 한잔은 정말 환상적일 것 같다”라는 정유미의 말처럼 서정적이면서도 뭉근한 비유의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허스키하게 변해가는 밥 딜런의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느낄 수 있는 ‘Mr. Tambourine Man’은 따뜻한 갈색 햇볕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해질녘 듣는 사람의 기분을 왠지 행복하게 만들기도, 또는 차분하게 가라앉히기도 하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정유미가 추천한 민디 글레드힐의 ‘California’는 귀여운 가사와 상큼한 보컬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기분을 전환해줄 노래다. “따뜻한 봄날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잔과 듣고 싶은 노래”라는 정유미의 말처럼 한가로운 어느 봄날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이 노래를 듣는 상상을 해보자. 마치 CF의 한 장면 같다. ‘`Pack your bags and lock your door I`ll take you places you`ve not been before’라는 가사처럼 왠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만큼 기분이 두둥실 떠오르는 ‘California’로 늘 비슷비슷한 일상에 지친 권태로운 나에게 사랑스러운 기운을 선사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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