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마다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달력의 날짜 외에 리셋되는 것은 없으며 새해는 지난해의 유산을 안고 출발한다. 가 연말마다 드라마에 대해 결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다. 왜 올해는 지난해처럼 KBS 와 MBC , KBS 같은 작품들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다음해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이것은 올해의 드라마들을 심판하겠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재밌는 드라마를 내년에도 보고 싶은 열혈 시청자의 제언에 가깝다. 그러니 이 문제제기에 대해, 가 선정한 올해의 작품과 인물들에 대해, 그리고 결코 유쾌할 수 없던 ‘노땡큐’의 순간들에 대해 함께 열띠게 이야기 나눠주시길. 그리고 가 준비한 조금은 엉뚱한 시상식 역시 마음 열고 즐겨주시길.대한민국의 2011년은 고물가, 트위터, 현빈, TV 오디션 프로, 안철수, 그리고 여전히 돈, 돈의 해였다. MBC (이하 )의 이적은 먼 미래에 2011년을 이렇게 회상한다. 여전히, 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현실 때문에 누적된 피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2011년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돈에 얽매여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MBC 의 구애정(공효진)은 본인의 자존심과 사랑을 지키는 것만큼 안정적인 일이 필요하며, KBS 의 노순금(성유리)은 애초에 직업적 자존감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식모다. 고시원의 방세를 걱정해야 하는 진희(백진희)와 집이 폭상 망해버린 안내상(안내상)네 육식솔처럼 의 주인공들 역시 당장 역시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
드라마, 현실의 비극을 앓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정치 혹은 윤리적 문제에 무관심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민주주의적 통치 철학에 대해 고민했던 2010년의 KBS , SBS , 2009년의 MBC 등은 시대착오적 통치 시스템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었다. 이런 비판 이후에 등장한 돈에 대한 관심은 퇴행적 욕망이라기보다는, 경제만은 살려주겠다던 말이 이제 보니 공수표라는 뒤늦은 후회에 가깝다. 지난 총선에서 뽑혔던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서민들의 경제적 토대를 뒤흔들 FTA 비준을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눈앞의 현실이지만 그것을 개선해줄 해결책은 요원한 무력감. KBS 의 소영(장나라)이 당찬 커리어우먼보다는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소시민적 캐릭터였던 건, 구김살 없는 캔디 캐릭터인 KBS 의 재인(박민영)이 돈 앞에 꿋꿋하다기보다는 꿋꿋한 태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려운 변화다.
하여 과거의 신분 상승 판타지로는 현실의 고민을 잊게 해주기 어렵다. 2010년을 알린 것이 의 시작이었다면, 2011년을 알린 건 SBS 의 퇴장이었다는 건 그래서 흥미롭다. 계급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듯했지만 결국 이 드라마는 진정한 노블레스 김주원(현빈)과 씩씩한 서민 길라임(하지원)의 동화 같은 사랑으로 끝났다. 그리고 이후 등장한 일련의 드라마들은 이 세계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MBC 속 JK그룹을 유지하는 것은 부의 집중을 위한 지주사 설립과 정관계와의 밀착, 그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며느리조차 본명이 아닌 K로 불려야 하는 철저한 도구주의다. 한편 SBS 는 기업의 주인이 노동자가 아닌 주주가 된 시대에 투기 세력에 의해 기업이 어떤 식으로 좌지우지되는지 보여준다. 이 재벌 드라마들은 자본이란 이름의, 우리의 일상도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의 맨얼굴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2011년이 만들어낸 어떤 성과다. 하지만 그 리얼리티는 동시에 현실의 시름을 더욱 깊게 한다. 인숙, 그리고 의 도현(장혁)은 거대한 비윤리적 시스템에 맞서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 안에 편입된다. 김주원이 아닌 길라임의 세계에만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기다리는 건 처남 집에 얹혀살고 하루 두 시간만 자고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하는 의 우울한 세계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정직한 절망 이후 희망의 전망을 어디서 성취할 수 있는가.
초인을 기다릴 것인가, 광야를 비옥하게 할 것인가 SBS 가 흥미로운 작품이라면, 길라임이 김주원을 구원하는 이야기여서다. 노은설(최강희)은 자신의 상식으로서 대기업의 비리를 고쳐나가려 하고, 그 기업의 자제 차지헌(지성)에게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두하는 회장”은 되지 말라고 말한다. 신분 상승 혹은 성공에의 서사를 지운 자리에서 상식을 지닌 일반인은 오히려 희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SBS 와 은 이런 요청에 대한 히어로물의 대답으로 보인다. 의 현대판 의적 이윤성(이민호)은 반값 등록금 같은 동시대의 현안들을 돌파한다. 동시에 대중들이 자신들을 힘겹게 하는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각하도록 돕는다. 충격적이었던 마지막 회 역시 윤지훈(박신양)의 순교를 통해 이명한(전광렬)의 각성과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판결을 이끌어낸다. 대중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같이 호흡하는 능력자의 등장. KBS 가 박진감 있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지 못한 것은 대선 후보 장일준(최수종)이 수행하는 미션들이 정치권이라는 한정적 공간에서만 진행될 뿐 당장 대중이 느끼는 민생 현안과 연결되지 못해서다. 영토 확장에만 치중하는 군국주의적 왕을 다룬 KBS 과 역시 마찬가지다.
SBS 의 선전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드라마 속 세종(한석규)이 한글 반포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모든 이가 글을 통해 서로 논쟁하고 협의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세계다. 세종이 물러나면 권력의 세습과 비리가 민생을 좀먹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대중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반성하고 행동한다면 역사는 진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성군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드라마 시장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요원한 제 2의 노희경, 제 2의 김수현 의 세종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스템을 뜯어 고치지만 드라마 업계는 최근 몇 년 동안 구조적으로 정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쪽대본과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스케줄은 KBS 의 주연배우 한예슬의 출연 거부 사태로 이어졌다. 스타 배우에 기대 당장 편성 따내는 것에만 급급한 상황에서 온전한 대본으로 차근차근 스케줄을 맞추는 합리적 시스템을 기대할 수는 없다. 지난해 라는 메가 히트 드라마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2007년 KBS 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 맥락 없이 등장인물이 귀신에 빙의되는 SBS 같은 작품이 임성한 작가라는 이름값만으로 편성되고 끝까지 방영될 수 있는 시대에 새로운 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그’ 종편 채널에 노희경 작가의 신작이 방영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시청자를 끌어오기 위해 노희경과 정우성의 네임밸류에만 기대는 편성의 안일함이다. 올해 볼만한 로맨스물이 홍정은, 홍미란 작가의 과 김수현 작가의 SBS 정도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일가를 이룬 작가들이 여전히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건 반길 일이지만 제 2의 노희경, 제 2의 김수현의 낌새조차 느낄 수 없는 상황은 암담하다. 만약 올해 쾌재를 불러야 할 일이 있다면 이 루마니아에 수출됐다는 사실이 아니라 KBS 을 통해 같은 실험적 장르물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6부작을 예상하고 만들었던 이 짜임새 있는 이야기는 결국 미니시리즈 편성을 받지 못해 8부작으로 방영됐다. 이런 작품이 16부 편성을 받을 수 없는 것에 문제제기를 할 것인가, 8부작으로라도 방영될 수 있는 것에 감사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고 지친 일상을 최소한 TV로라도 위로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이미 한 번 경험한 것이지만, 잘못된 선택은 한 번이면 족하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