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전도연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신세기 멜로 영화 <접속>부터 박찬욱 감독을 주류세계로 안전하게 착륙시킨 <공동경비구역 JSA>, 외로운 섬 같던 김기덕 감독과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았던 <섬>을 비롯해 올해 로테르담 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었던 박찬옥 감독의 <파주>에 이르기까지 명필름이 제작한 혹은 심재명 대표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일견 서로 다른 외양을 하고 있지만 동일한 밀도를 자랑한다. 안전하지만 안주하지 않고, 재기 넘치지만 품격을 잃지 않는 영화들에 새겨진 ‘메이드 인 명필름’은 그래서 믿고 볼만한 영화를 상징하는 영구적인 주소다.
“가족은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강조하는 영화,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영화들은 개인적으로 참 싫어해요. 어쩌면 가족이란 인간사 비극의 우물 같은 곳이기도 하고, 한 개인의 상처의 지하창고 같은 곳이잖아요. 대신 가족과 시대 혹은 가족과 개인의 관계망을 내밀하고 유니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들은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김지운 감독의 기괴한 코미디 <조용한 가족>부터 독특한 뮤지컬 판타지 <구미호 가족>, 처제와 형부 사이에 드리운 짙은 안개 속을 서성이는 <파주>까지 그간 심재명 대표가 제작한 작품 속에서 심상치 않은 가족영화의 제목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 심재명 대표가 추천하는 다섯 편의 기묘한 가족영화들과 함께 가슴 밑바닥 창고에 숨겨놓았던 가족들의 진짜 얼굴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1993년 | 라세 할스트롬
“불행하기 짝이 없고, 어이없는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 미장센이 탁월했던 영화였어요. 특히 뚱뚱한 엄마가 죽고 그 집을 태워버리는 장면은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예요. 명기획 시절,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었지만 여전히 무모했고 또 막연했던 시기에 봤었는데,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몰랐던 길버트 가족의 성장을 보면서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추억의 명화’예요.”
어머니는 뚱뚱하다. 동생은 바보다. 아버지의 자살 후 거동하기 힘들 정도의 뚱보가 되어 집안의 가구처럼 박혀있는 엄마, 낮은 지능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골칫덩어리인 막내 동생(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자기 치장에만 빠져있는 사춘기 여동생까지. 끔찍한 나머지 남몰래 태워버리고 싶을 가족들을 끌고 가야 하는 길버트 그레이프(조니 뎁)는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암흑 같은 길버트의 삶에 떠돌이 소녀 베키(줄리엣 루이스)가 마법의 빛처럼 찾아온다.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초콜릿>, 개봉을 앞둔 <디어 존>의 감독인 라세 할스트롬이 그려낸 역설의 동화.
1999년 | 샘 멘데스
“가족 구성원들 간의 냉소와 미음과 증오를 어떻게 저렇게도 살벌하고 끔찍하게 그려낼까, 마치 면도날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날카로운 영화죠.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 케빈 스페이시의 목소리로 보이 스카우트 시절에 바라봤던 하늘에 대한 내레이션이 흐르는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름대로 잘 살아보고자 노력했고, 가족을 이루고 행복 하려 했던 중년남자의 비극 앞에서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피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을 자는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던 특별한 미국가족영화였어요.”
그저 그런 직장과 그보다 더 못한 가족들의 푸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중년의 가장 레스터(케빈 스페이시)의 공동화 된 인생을 그린 샘 멘데스 감독의 데뷔작. 딸의 친구에게 사춘기 소년 같은 환상을 품는 남자의 상상, 미나 수바리의 나신 위로 붉은 장미 꽃잎이 떨어지던 판타지는 이후 수많은 미디어에서 패러디 한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힌다.
2008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미장센만 보면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같지만 정작 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주제는 참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다운 영화예요.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저 가족에 끼어서 마루에 앉아 옥수수튀김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불현듯 그들의 숨겨진 상처를 발견할 때면 도망치고 싶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며느리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가 욕조에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틀니를 뽑는 순간 다시 한 번 무장해제 되는 느낌이었죠. 가족 중 누군가를 잃고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담은 사려 깊은 영화예요.”
상처는 지워지지도 떨쳐지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뛰어도 뛰어도. 15년 전 불의의 익사사고로 잃은 아들의 기일에 모인 가족은 여전히 살얼음 위에 덮어놓은 푸른 잔디처럼 아슬아슬한 평화의 풍경을 보여준다. 아베 히로시의 무심한 연기도 일품이지만 어머니 역의 배우 키키 키린은 잔잔한 공포와 슬픔이 무엇인지를 조용한 연기 속에 탁월하게 풀어낸다.
1997년 | 이안
“당시 한국은 독립영화 상영관도 없던 상태라, 상업영화의 틈바구니 속에 그저 스와핑, 에로틱 불륜영화로 포장되었던 안타까운 기억이 나요. 냉정한 시각으로 70년대 미국 중산층 가족의 붕괴를 그리는 이안 감독의 시각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마치 얼음 속에서 같이 눈보라는 맞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특히 딸로 등장한 크리스티나 리치의 ‘발가락양말’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웃음). 자기 안에 소용돌이치는 분노를 도발적으로 표현해내는 그 배우의 기묘한 표정이라니. 그러고 보면 <조용한 가족>에 나왔던 고호경 씨가 크리스티나 리치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구요.”
1973년의 미국, 스위트 홈은 없다. 가족식탁의 온도가 얼음에 가까워질수록, 그 구성원들의 내부는 더욱 뜨거운 폭풍 속으로 달려간다. 어른들은 삶의 허무함을 더 큰 쾌락 속에서 보상받으려 발버둥치고, 아이들은 불장난 속에서 성장하기도 전에 소멸해간다. 대만출신으로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거쳐 할리우드에 안정적으로 입성한 이안 감독의 대표작.
2009년 | 웨스 앤더슨
“”여우에게 닭을 사냥하지 말라면 도대체 어떡하라는 건가“ 자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여우가족의 생존분투기를 담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이예요. 주인공인 미스터 폭스를 연기하는 조지 클루니를 비롯해서 메릴 스트립, 빌 머레이 등 할리우드 쟁쟁한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만 듣고 있어도 너무 재미있어요. 특히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연기나 연출도 없고 의도된 풍자나 교훈도 없이, 계속 킬킬 웃게 만드는 영화죠. 우아한 유머, 약간의 냉소가 섞인 쿨한 정서가 인상적이고 특히 프로덕션 디자인의 기가 막히게 세련되어 한 장면 한 장면이 미술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품이 넘치는 독창적인 애니메이션이에요.”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여우가족이 자신들을 전멸하려는 농장주 인간에게 대항하면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투쟁사. 기괴한 가족이라면 이들을 따라올 수 없는 <로얄 테넌바움>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첫 애니메이션 작품인 <판타스틱 Mr. 폭스>는 역시 <찰리와 초콜릿공장>으로 유명한 기괴한 상상력의 아동문학작가, 로알드 달의 원작 <멋진 여우씨> 만나 환상의 마리아쥬를 선사한다.
2010년 상반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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