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아버지는 그를 버렸고, 청국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일본은 애초에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평생 함께 살고 싶었던 소녀와 아저씨는 나라가 찾아내 죽였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의적이 되니 끊임없이 추격자가 따라 붙는다. 훔치고, 도망치고, 죽인다. 그리고 상처 입는다. 하지만 그의 육신이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신도, 왕도, 자본가도 아니기에. 조선 팔도를 신출귀몰하는 그의 활약은, 사실 어디서도 마음 편히 잘 수 없는 방랑기다. 마음은 외롭고, 하나둘씩 살생의 수를 늘려가는 손은 무뎌진다. 그의 행동은 정의를 위한 것이었나, 모든 땅과 모든 사람 곁에서 정착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화풀이였나.

고우영 화백은 30년 전 <일지매>에서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이 겪는 고뇌 이상의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로부터 부정당한 나는 과연 무엇인가. 내가 행하는 행동은 정의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내가 정의를 위해 저지르는 그 모든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행동인가. 일지매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끝없이 방랑한다. 하지만 원치 않았던 그 여행의 끝에는 영웅의 깨달음 대신 자신이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지독한 고독만이 남는다. 난세는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는 시대와 맞서면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 시킨다. 그러나 둘의 불화가 낳은 것은 아이를 점점 암흑 속으로 몰아넣는 절망뿐이다.

그래서 MBC <돌아온 일지매>의 6회를 보고 눈물이 날 뻔 했다. 황인뢰 감독이 HD 와이드 TV의 영상으로 일지매가 살아갔던 공간을 채우면서, 고우영 화백이 창조한 일지매의 평생에 걸친 망명기는 완벽하게 완성된다. 시대가 버린 아이가 제 몸 하나 쉴 곳을 찾아 청에서 조선으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조선팔도의 곳곳으로 돌아다닌다. 그렇게 인조 시대의 참혹한 조선은 우리 앞에 재현됐고, 수백 년 전 평생을 떠돌다 간 아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돌아왔다. 그 아이가 이 시대에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히 잠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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