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디서비디언스’ 포스터/사진제공=필름4 프로덕션스
영화 ‘디서비디언스’ 포스터/사진제공=필름4 프로덕션스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독실한 유대교 신자는 아니다. 실제 이스라엘 의회의 구성비를 보면 오소독스 유대인(Orthodox Jew), 곧 정통 유대교인이 30% 정도 된다고 한다. 유대인 모두를 묶어주는 강력한 끈은 유대교라기보다 오히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시오니즘이다. 이는 잃어버린 땅 팔레스타인을 회복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 여전히 정통 유대교가 굳건히 서 있다. 영화 ‘디서비디언스(Disobedience)’의 배경은 런던 근교의 핸돈(Hendon)이라는 유대인 마을이고, 마을 중심에 유대교 회당이 있다. 그러니까 핸돈은 이스라엘 전체의 축소판이라 하면 좋겠다.

회당 예배 중에 랍비 라브가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숨을 거둔다. 그는 온 마을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기에 사람들은 큰 슬픔에 빠졌고 장례 준비는 그의 수제자 랍비 도비드(알렉산드로 니볼라)에게 맡겨진다. 그리고 라브가 담당했던 회당장(로쉬 하크네트) 지위도 당연히 도비드가 이어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라브의 외동딸 로윗(레이첼 와이즈)이 장례식에 참석하러 핸돈에 찾아오면서이다.

레이첼 와이즈와 공동 주연을 맡은 에스티 역의 레이첼 맥아담스가 등장하기까지 무려 15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그 때까지 로윗은 마을 사람들의 냉랭한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데 그녀가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자유분방한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윗이 나타나자 다들 ‘도대체 누가 연락을 한 거야?’라며 수군대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십계명에도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를 어기고 제멋대로 살다가 아버지와 의절한 불효자 아닌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감옥에 들어온 기분이 든 로윗에게 에스티의 등장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았다. 로윗과 에스티와 도비드는 어릴 적 단짝친구였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유대교의 독특한 전통들이 다수 등장한다. 회당의 정면에 놓인 모세오경(토라), 그와 마주한 랍비의 설교단, 회당 홀에 자리한 남자들과 2층에 앉아있는 여성들, 랍비학교에서 선생과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식 교육, 정수리에 쓴 빵떡모자, 기도할 때 머리와 팔에 감는 성구갑(테필린)이 있다. 성구갑에는 신명기 6장 4-9절과 11장 13-21절을 적은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머리부터 내려쓰는 천인 탈리트, 안식일 식사, ‘장수하기 바란다’는 장례식용 인사말, 문설주에 박아놓은 성경구절 상자(메주자), 남성만으로 구성된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송 등등도 나온다.

영화 ‘디서비디언스’ 스틸/사진제공=필름4 프로덕션스
영화 ‘디서비디언스’ 스틸/사진제공=필름4 프로덕션스
이런 모든 유구한 전통에 대해 에스티는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나의 삶이라고 신뢰해. 우리 옳은 인생을 살아보자.” 어릴 적 친구인 로윗에게 끌리는 것과 별도로 그녀는 유대교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갖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를 단순히 ‘고리타분한 전통과 대담한 도전’ 식으로 넘겨짚기 불가능한 이유다. 분명 무엇인가 보다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 전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아주 흥미롭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디서비디언스’는 제목에서 암시하다시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삶과 스스로 선택한 삶 사이에 놓인 긴장감을 보여준다. 영화를 여는 순간부터 글자 그대로 ‘거역’의 기운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그리고 영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소재는 로윗과 에스티의 레스비언 코드이다. 감독은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하는지 약 5분 정도 리얼하게 묘사하는데 마치 도색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장면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장치로 여겨 마땅하지만 솔직히 좀 불편했다. 아무튼 두 사람을 인간의 양 측면을 각각 대변하는 존재로 이해하면 이야기의 진행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새 인생을 선택한 로윗과 예스런 삶을 유지하려는 에스티 사이의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아니, 자유분방한 뉴요커와 성실한 교사 사이에 놓인 일정한 거리를 인정해야 한다. 영화에서는 이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 조금은 걱정스럽고, 건조하지만 일면 풍부한 감성으로 살아 숨 쉰다. 이를 소화해내기 위해 할리우드 최고의 두 배우가 파격적인 연기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참으로 대단한 배우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더해 종교적인 책임과 로윗에 대한 애증과 아내 에스티의 관계를 고민하는, 3차원의 연기를 선보인 알렉산드로 니볼라오도 칭찬받을 만하다.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안식일 식사에서 집안 어른들과 로윗이 나누는 설전과 ‘우리 아이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곳에서 자라게 할 거야’라고 한 에스티의 대사가 기억난다. 그리고 영화 종결부에 나오는 라브의 고별예배 장면은 정말 좋았다. 회당 2층에 나란히 앉아 만감을 교차시키는 두 여성의 표정과, 도비드가 아내 에스티에게 ‘당신은 자유야’라고 부르짖을 때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종교인에게 큰 도전이 되는 영화다. ‘디서비디언스’는 2006년에 나오미 엘더만이 쓴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것으로, 2018년 영국독립영화제(BIFA)에서 단연 화제였다고 한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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