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다카하타 이사오가 지난 4월 세상을 떠났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고가 아니었다. 그를 기리는 무언가를 바치고 싶었다. 나의 유년을 크게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숱한 작품들 중에서 한 작품을 꼽기는 어렵지만 ‘추억은 방울방울’로 되짚어 보면 어떨까 싶다. 사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중에서 ‘추억은 방울방울’은 덜 사랑받는 작품이다. 시골이나 농업에 대한 내용이 적잖이 교훈적으로 그려졌고, 어른인 타에코가 웃을 때마다 그려지는 팔(八)자 주름은 어린 타에코와 대비되어 덜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추억의 빛에 눈이 부시는 순간을 마주하게 해준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가구야공주 이야기’ 등 그의 애니메이션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잠식했다. 애니메이션계의 히치콕이랄까. 그가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빨강머리 앤’의 매튜나 ‘미래소년 코난’의 포비처럼 그와 닮은꼴의 캐릭터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꼽자면 침을 퉤퉤 뱉던 소년 아베랄까.
스물일곱의 타에코는 열흘이나 되는 휴가를 야마가타의 시골집, 즉 언니의 시댁에서 보낸다. 그런데 1969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근사한 추억거리가 없다는 타에코의 나레이션과 달리 그녀의 추억은 뭉클하고 애틋하기 그지없다.
타에코는 여름방학 때 학교에 와서 국민체조를 하는데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방학을 맞이해서 친구들은 하나 둘 시골로 떠나기 때문이다. 조부모부터 도쿄 토박이인지라 시골은 타에코가 가질 수 없는 꿈인 것이다.
문득 잦은 이사로 인해 전학왕이었던 나의 초등 시절이 되살아났다. 첫 초등학교는 여름방학 때 일정 횟수 이상 학교에 와서 조기체조를 하고 가면 상장을 주었다. 지독한 수줍음으로 존재감마저 미미한 열 살의 나는 큰 용기를 냈다. 남자애들 일색인 운동장을 첫 상장 욕심 하나로 달려갔다. 돌이켜보면, 방학 하면 시골이던 시절이었다. 산도, 바다도, 다른 나라도 아닌 시골로 충분했던 시절 말이다.
타에코처럼 멜빵주름치마를 줄곧 입었다. 공장에 다니는 이모가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색깔만 다른 멜빵주름치마를 물리도록. 통조림을 거쳐서 생과일로 파인애플을 처음 만난 타에코의 가족은 덜 부드럽고 덜 단맛에 급 실망한다. 역시 과일의 왕은 바나나라는 그들의 대화에서 바나나를 왕 대접했던 오래 전 우리 가족의 모습도 겹쳐진다. 문득, 과일계에서 바나나의 현 위치가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따로 받은 성교육을 리에가 발설해서 여자애들이 곤혹스러운 순간도 있다. 우리 반에도 리에 같은 친구가 있던 탓에, 남자애였던 반장은 광고에 나오는 생리대 이름을 노골적으로 읊어대며 놀리곤 했다. 1969년의 도쿄 소녀와 1980년대의 서울 소녀는, 미묘하게 추억이 닮아있다.
이 영화 최고의 시퀀스는 ‘첫사랑’이다. 옆 반의 야구 에이스 히로타가 타에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두 반의 가장 핫한 이슈가 된다. 급우들이 놀릴 때마다 소년 히로타와 소녀 타에코의 볼은 발그레해진다. 마치 둘의 볼처럼,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골목길 장면은 단연코 최고다. 타에코를 쫓아온 히로타가 묻는다. “비 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날을 제일 좋아해?” “흐.. 흐린 날.” “나랑 똑같네.” 변화구로 들어온 질문은 직구로 꽂힌다. 그날 밤, 타에코의 집 위로는 두둥실 하트달이 떠오른다. ‘추억은 방울방울’을 최고의 첫사랑 영화로 꼽기에는 멈칫하게 되지만, 최고의 첫사랑 장면을 가진 영화로 꼽기에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설렘의 극한을 보여준다.
타에코가 ‘불쑥 표주박섬’ 주제가를 부르며 예전 노래들에는 격려하는 가사가 많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정말 그러했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주제곡들은 특색 없는 일상을 독려했다. 주근깨 빼빼 마른 서울 소녀였던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울 지도 모른다는 용감한 생각을 품었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선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뜨거운 야망도 품었다. 그가 그린 세계는 차츰 나의 세계가 되었다. 덕분에 견고한 유년을 보내고 삶을 다사로운 눈길로 마주하는 중년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그 고마움을 한 줄로 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진심을 담고 또 담아서 하늘을 향해 외친다.
진정 고맙습니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의 숱한 작품들 중에서 한 작품을 꼽기는 어렵지만 ‘추억은 방울방울’로 되짚어 보면 어떨까 싶다. 사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중에서 ‘추억은 방울방울’은 덜 사랑받는 작품이다. 시골이나 농업에 대한 내용이 적잖이 교훈적으로 그려졌고, 어른인 타에코가 웃을 때마다 그려지는 팔(八)자 주름은 어린 타에코와 대비되어 덜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추억의 빛에 눈이 부시는 순간을 마주하게 해준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추억은 방울방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가구야공주 이야기’ 등 그의 애니메이션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잠식했다. 애니메이션계의 히치콕이랄까. 그가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빨강머리 앤’의 매튜나 ‘미래소년 코난’의 포비처럼 그와 닮은꼴의 캐릭터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꼽자면 침을 퉤퉤 뱉던 소년 아베랄까.
스물일곱의 타에코는 열흘이나 되는 휴가를 야마가타의 시골집, 즉 언니의 시댁에서 보낸다. 그런데 1969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근사한 추억거리가 없다는 타에코의 나레이션과 달리 그녀의 추억은 뭉클하고 애틋하기 그지없다.
타에코는 여름방학 때 학교에 와서 국민체조를 하는데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방학을 맞이해서 친구들은 하나 둘 시골로 떠나기 때문이다. 조부모부터 도쿄 토박이인지라 시골은 타에코가 가질 수 없는 꿈인 것이다.
문득 잦은 이사로 인해 전학왕이었던 나의 초등 시절이 되살아났다. 첫 초등학교는 여름방학 때 일정 횟수 이상 학교에 와서 조기체조를 하고 가면 상장을 주었다. 지독한 수줍음으로 존재감마저 미미한 열 살의 나는 큰 용기를 냈다. 남자애들 일색인 운동장을 첫 상장 욕심 하나로 달려갔다. 돌이켜보면, 방학 하면 시골이던 시절이었다. 산도, 바다도, 다른 나라도 아닌 시골로 충분했던 시절 말이다.
타에코처럼 멜빵주름치마를 줄곧 입었다. 공장에 다니는 이모가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색깔만 다른 멜빵주름치마를 물리도록. 통조림을 거쳐서 생과일로 파인애플을 처음 만난 타에코의 가족은 덜 부드럽고 덜 단맛에 급 실망한다. 역시 과일의 왕은 바나나라는 그들의 대화에서 바나나를 왕 대접했던 오래 전 우리 가족의 모습도 겹쳐진다. 문득, 과일계에서 바나나의 현 위치가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따로 받은 성교육을 리에가 발설해서 여자애들이 곤혹스러운 순간도 있다. 우리 반에도 리에 같은 친구가 있던 탓에, 남자애였던 반장은 광고에 나오는 생리대 이름을 노골적으로 읊어대며 놀리곤 했다. 1969년의 도쿄 소녀와 1980년대의 서울 소녀는, 미묘하게 추억이 닮아있다.
이 영화 최고의 시퀀스는 ‘첫사랑’이다. 옆 반의 야구 에이스 히로타가 타에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두 반의 가장 핫한 이슈가 된다. 급우들이 놀릴 때마다 소년 히로타와 소녀 타에코의 볼은 발그레해진다. 마치 둘의 볼처럼,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골목길 장면은 단연코 최고다. 타에코를 쫓아온 히로타가 묻는다. “비 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날을 제일 좋아해?” “흐.. 흐린 날.” “나랑 똑같네.” 변화구로 들어온 질문은 직구로 꽂힌다. 그날 밤, 타에코의 집 위로는 두둥실 하트달이 떠오른다. ‘추억은 방울방울’을 최고의 첫사랑 영화로 꼽기에는 멈칫하게 되지만, 최고의 첫사랑 장면을 가진 영화로 꼽기에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설렘의 극한을 보여준다.
타에코가 ‘불쑥 표주박섬’ 주제가를 부르며 예전 노래들에는 격려하는 가사가 많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정말 그러했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주제곡들은 특색 없는 일상을 독려했다. 주근깨 빼빼 마른 서울 소녀였던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울 지도 모른다는 용감한 생각을 품었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선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뜨거운 야망도 품었다. 그가 그린 세계는 차츰 나의 세계가 되었다. 덕분에 견고한 유년을 보내고 삶을 다사로운 눈길로 마주하는 중년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그 고마움을 한 줄로 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진심을 담고 또 담아서 하늘을 향해 외친다.
진정 고맙습니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작가 박미영은 영화 ‘하루’ ‘빙우’ ‘허브’의 시나리오,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의 극본,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의 동화를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입문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