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3일간의 비’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 윤박 /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연극 ‘3일간의 비’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 윤박 /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자유로운 방랑자였다가, 금세 또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는다. 두 인물을 오가며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윤박의 모습이다. 2012년 드라마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로 데뷔한 그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로 반듯하거나 냉철한 인물을 연기했다. 자칫 고정될 뻔한 이미지는 지난 7월 11일 막을 올린 연극 ‘3일간의 비'(연출 오만석)로 확 달라질 전망이다. 감정을 격하게 내뱉거나, 답답하리만치 자신감이 결여된 윤박의 모습은 참 새롭다. 윤박은 “호흡을 사용해 말을 더듬는 연기를 하니 온몸이 아프다”고 토로했지만, 옅게 깔린 그의 미소가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는 걸 증명했다.

10. 마지막 공연까지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여유가 생겼겠죠.
윤박 : 무대에 오르기 전에 아직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어요.(웃음) 등장하기 직전이 최고조예요. 첫 퇴장하기 전까지 계속 떨립니다. 첫 장면을 마치고 뒤로 나오면 중심을 못 잡을 정도로 떨리는데, 한 번은 휘청한 적도 있어요.

10. 연습 때부터 떨렸습니까?
윤박 : 아뇨. 연습 때는 사실 워낙 대사가 방대하니 ‘다 외울 수 있을까’, ‘관객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했지만 떨리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스태프들이 다 있는 상태에서 런스루(공연의 리허설)를 할 때, 그때부터 떨리더군요.(웃음)

10. 어떻게 출연하게 됐습니까?
윤박 : 지난 4월에 출연 제안을 받았어요. 오만석 선배가 연출을 한다기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하고 싶었습니다. 또 1인 2역이라는 점도 끌렸고요. 처음에는 핍, 테오 역인 줄 알았는데 워커, 네드 역할이라 놀라긴 했죠.

10. 게다가 워커는 말을 더듬는 인물입니다.
윤박 : 오만석 선배가 “말 더듬는 역할도 있는데, 재미있을 거야”라고 했거든요.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까 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기에 진심을 담으면서 말까지 더듬으려고 하니까 처음엔 굉장히 늘어지고 지루하더군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저에게 말을 더듬는 건 비일상적이니까 계속 연구할 수밖에 없었죠.

10. 공연을 보니 정말 자연스럽게 말을 더듬더군요. 연습의 결과이겠죠.
윤박 : 첫 대본 연습 때부터 말을 더듬으면서 해봤어요. 그랬더니 몸이 너무 아파요. 그냥 음절을 나누는 정도로만 더듬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말을 더듬는 이들을 유심히 보니까 호흡이있더군요. 호흡을 과하게 쓰니까 목부터 온몸에 힘이 들어가요. 공연을 마치고 나오면 목, 허리, 배까지 다 너무 아파요.(웃음)

10. 말을 더듬는 것 외에 철학적인 대사도 어렵지 않습니까?
윤박 : 배우들과 2주 정도 대본 분석을 했어요.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아봤죠.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어렵다’ ‘모르겠다’였는데 하나씩 살펴보니 재미있더라고요. 배우들과 머리를 맞대도 모르는 게 있을 땐 연출을 찾았어요. 오만석 선배에겐 답이 있어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은 연출이 하는 말이 맞더라고요. 믿고 신뢰했으니 궁금한 게 있을 땐 언제든지 물었어요. 공연이 막바지에 달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부하고 고민해요. 이 작업 환경 자체가 즐거워요.

연극 ‘3일간의 비’에서 워커, 네드 역을 맡은 윤박 / 사진제공=악어컴퍼니
연극 ‘3일간의 비’에서 워커, 네드 역을 맡은 윤박 / 사진제공=악어컴퍼니
10. 아버지와 아들인 두 역할을 오가는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없었나요?
윤박 : 아들인 워커를 연기할 때 좀 힘들어요. 가령 아버지의 일기장을 태우는 장면에서는 ‘왜 그러는 걸까’ 싶더라고요. 워커는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친구예요. 돌발 행동을 하는 것도 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죠. 일기장을 혼자 분석하고 나서 태우는 과정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어요.

10. 난해한 작품이라 해석도 분분하고 또 볼 때마다 달라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윤박 : 어떤 관객은 객석 뒤쪽에서 보는 게 낫다고 해요. 전체적으로 짜놓은 장면들이 있어서 한번에 보면 느낄 수 있는 게 있거든요. 앉는 자리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작품입니다.

10.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도 할 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나요?
윤박 : 연극이라는게 지나가면 끝인 생방송이잖아요. 옛날엔 틀리면 거기에 얽매여서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요. 해야 될 것만 연습 때부터 했어요. 공연 때 여지없이 실수를 할 때가 있는데 훌훌 털어버리죠. 초반 단추가 잘 안 끼워진 날은 계속 조금씩 어긋나는데…아, 관객들은 모를 수도 있어요. 저만 느끼는 걸지도요. 스스로 점검은 돼요. ‘내 호흡이 어긋나고 있구나’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고 내 것만 하고 있구나’라는 걸요. 하면서 위험을 줄여가는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어떻게 하든 결과는 관객들의 몫이기 때문에 연연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요.

10. 매번 다르다는 것이 또 연극의 묘미죠.
윤박 : 연극 몇 작품 해놓고 ‘연기 실력을 늘리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연극이든, 드라마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에너지를 80%까지 끌어올리고 싶은데, 어떨 때는 연기를 위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아요. 굉장히 위험한 건데 말이죠. 꼭 연극이 아니더라도 다른 환경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새로운 재미를 느껴요.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힘도 생기고요. 저에게 연극은 앞으로 연기를 꾸준히 하고 싶은 꿈의 윤활유가 되는 것 같아요. 연습하면서 만나는 사람과 작품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이야기를 나누고요.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지 이 과정들이 큰 힘이 됩니다.

10. 호흡을 맞추는 연기자들에게 기분좋은 자극도 받지 않습니까?
윤박 : 자극보다는 서로의 믿음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분장실에 도착했을 때 매일 보니까 서로의 컨디션이 어떤지 단번에 알죠. 제가 별로일 때는 “나 오늘 붙잡고 갈게요”라고 하고, 또 상대 배우들이 에너지가 없는 것 같을 땐 “오늘은 나만 따라와요”라고 하죠. 무대에서 만나면 상대에게 힘을 주려는 것이 느껴져요. 서로 힘이 되고,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눈빛을 보내주죠. 감사해요.

10. 2012년에 데뷔해 5년이 흘렀습니다. 연기를 대하는 태도에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윤박 : 연기는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어떤 이들과 작품을 하느냐에 따라 연기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좋은 연출과 또 선배들을 만나서 잘 해왔어요. 연기는 협업이에요. 혼자 고민해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이 만나는 연기자들과 소통해서 만들어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배우면서 즐겁게 하면 더 발전할 수 있죠.

윤박 /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윤박 /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10. 그간 드라마를 통해서는 냉철하고 차가운 역할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3일간의 비’ 속 윤박은 확 다른 느낌입니다.
윤박 : 연기가 늘었다거나 노하우가 생겼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스스로는 인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번 연극은 좋은 캐릭터를 만났기 때문에 좋게 봐주는 걸 수도 있어요.

10. ‘3일간의 비’를 통해 그간의 연기 갈증을 해소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다채로운 역할에 도전할 생각인가요?
윤박 : 평소에 하지 않았던 걸 하고싶은 욕심은 있어요. 예전엔 좋은 작품이라면 흔쾌히 하겠다고 했는데, 요즘은 제가 맡은 역할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해보지 않은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말하는 방식, 취하는 태도, 만나는 인물 등이 예전에 맡은 역할과 비슷해서 거절하는 경우도 있죠.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만큼 역할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요.

10. 탐나는 작품이나 캐릭터가 있나요?
윤박 :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을 인상깊게 봤어요. 그 나라의 정서, 당시의 성향을 담고 있는 작품과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10. 첫 도전이기도 한 ‘3일간의 비’가 끝나는 게 아쉬울 것 같습니다.
윤박 : 이 작품은 초연이라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딱 하나 원했던 건 관객들이 ‘다음에 또 이 공연이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길 바랐어요. 편하게 웃고 즐기는 연극도 좋지만 ‘3일간의 비’는 보고 난 뒤 술자리에서 안줏거리가 될 수 있는 작품이에요. 토론을 할 수 있는 공연이죠. 이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보러 왔으면 좋겠어요.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아마 좋은 하루의 마무리가 될 겁니다.

10. 끝으로 워커 혹은 네드에게 한마디 남긴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습니까.
윤박 : 워커에겐 “부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네요. 워커가 그 이후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보기도 해요. 그리고 아버지 일기장 태울 때 극장에 불나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고 하고 싶어요.(웃음) 네드는 음…어렵네요. 하하. 제 자신에게는 올해를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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