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스타 PD’의 전성시대다. 본래 방송국의 프로그램기획자로 작품 선정, 인력관리, 예산 통제 등을 담당했던 PD들의 활동 영역은 최근 들어 전에 없이 확장됐다. PD들이 프로그램의 전면에 서는 경우도 잦아졌다. 예능 PD들은 프로그램의 중심에서 ‘제3의 멤버’와 같이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도 “관찰자는 관찰하는 대상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PD의 이름이 곧 하나의 브랜드처럼 여겨질 만큼 명확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PD들이 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독창적인 색깔을 드러내며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이들에 시청자들의 열광 한다. 그들이 그려내는 세계가 그만큼 깊고 중독성이 강하다는 증거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소위 ‘스타 PD’라 불리는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으며, 그들이 그려내는 세계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 하는 걸까.

그런 측면에서 이욱정 KBS PD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지난 2008년 KBS1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이하 누들로드)’로 ‘다큐멘터리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피버디상(미국방송협회와 조지아대학교 이사회가 주최하는 미국의 방송상)을 수상한 이 PD는 ‘한국형 푸드멘터리(Food+Documentary)’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2014년, 피버디상 수상 이후 ‘요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세계적인 요리 학교 르 코르동 블뢰로 홀연히 요리 유학을 떠났던 그는 6년 만에 ‘빵·향신료·고기’를 소재로 한 8부작 다큐멘터리 KBS1 ‘KBS 글로벌 대기획 요리인류(이하 요리인류)’를 들고 돌아왔다(‘요리인류’는 지난 3월 26~28일간 1회 ‘빵과 서커스’, 2회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 3회 ‘생명의 선물’을 방송한 뒤 올 하반기 나머지 5편의 방송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푸드멘터리 레시피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셰프이자 PD로 다시금 대중 앞에 선 이 PD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누들로드’가 푸드멘터리를 소개한 작품이라면, ‘요리인류’를 통해서는 푸드멘터리에 맞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문법을 제시하겠다는 것. ‘요리’를 향한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Q. 앞서 지난 3월 ‘요리인류’ 1~3회가 방송됐다. 방송 직후 온라인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이욱정 PD: 트위터로 실시간 반응을 보는데 “졸잼(정말 재밌다는 의미의 온라인 용어)”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라, 하하. 사실 체감반응은 ‘누들로드’ 때와 비슷했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던 만큼 평가가 나뉘었다. 다큐멘터리를 안 보던 분들에게서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다큐멘터리의 전통 문법에 익숙한 분들께서는 조금 낯설다는 평가도 해주셨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문제들이 많아졌다.

Q. 뛰어난 영상미는 ‘요리인류’가 그간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던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이욱정 PD: 보통 다큐멘터리는 30~40대 남자들이 많이 본다. 관련 기사나 영상도 그렇고. 이번에 ‘요리인류’를 준비하며 한 온라인 포털 사이트와 하이라이트 영상 제공 제휴를 맺었는데 방송 뒤 확인해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데이터가 나왔다. ‘요리인류’는 20대 여성이 가장 많이 봤더라. 해당 업체 측에서도 교양 부문 동영상으로는 최단 시간에 최대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고 말하더라. 아직 대중화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듣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보는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욱정 PD는 ‘요리인류’ 촬영을 위해 2년간 전 세계를 누볐다.

Q. 확실히 ‘요리인류’는 기존의 다큐멘터리 문법을 파괴하는 실험적인 요소들이 가득했다. 내레이션의 비중이 감소하고 음악의 사용이 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욱정 PD: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다수 전문가 인터뷰가 들어있는, 굉장히 정보량이 농축된 내레이션이 담긴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요리인류’를 기획하면서 생각했던 부분도 그런 새로운 흐름에 맞는 문법을 제시해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보통의 다큐멘터리와 비교하면 1.5배에서 2배 정도 음악이 더 들어간 편이지만, 좀 더 실험적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내레이션을 지금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이려고 했으나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그대로 했으면 시청률은 2% 정도 더 떨어졌겠지, 하하.

Q. 이번 작품이 UHD 4K(HD 화질보다 4배 정도 높은 초고화질)로 제작됐다는 것도 ‘듣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보는 다큐멘터리’를 지향하는 ‘요리인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욱정 PD: 사실 무언가를 기존의 문법과 다르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보통의 다큐멘터리였다면 크루아상(초승달 모양의 서양 빵)을 보여주기 위해 크루아상이 생겨난 도시, 전문가 인터뷰, 장인이 만드는 모습 등을 보여주겠지. 헌데 ‘보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전달 방식이 달라진다. 영상을 통해서 ‘생각의 불꽃’을 던져주는 게 중요하다. 정보는 이미 지천으로 널려있다. 답까지 다 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화두를 제시하는 거다. 그 생각의 불꽃을 실마리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인류가 음식을 통해 창의성을 발휘한 과정과도 접점이 있다.

이욱정 PD는 영국 르 코르동 블뢰로 요리 유학길에 올랐고 방송 복귀 후 ‘요리사 PD’라는 수식을 얻었다.

Q. 특히 ‘요리인류’에는 요리와 셰프에 대한 깊은 애착과 존경이 묻어난다. 아무래도 당신이 르 코르동 블뢰에서 셰프 과정을 마친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이욱정 PD: ‘요리인류’가 그래서 나온 거다, 하하. 보는 것과 실제로 해보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책을 읽기만 한 사람은 책을 쓰는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근데 책을 한 번 써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같은 내용을 보더라도 느껴지는 게 다른 거다. ‘요리인류’에는 전문가 인터뷰 대신에 요리 장면을 넣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이야기 안에는 백 마디의 내레이션보다도 더 많은 메시지가 담길 수 있다. 그래서 ‘요리인류’는 단순히 셰프들의 요리 과정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의 요리 과정을 담으려 했다. 그들의 지혜가 ‘요리인류’의 큰 축이다.

Q. 양파즙 감별 테스트와 같은 과학적 접근과 과거 재연신을 통한 인문학적 접근도 눈에 띈다.
이욱정 PD: 요리는 굉장히 감성적인 분야이기도 하지만, 과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실험을 통한 과학적 접근은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과거 재연신도 마찬가지다. 요리라는 게 인류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2편 ‘낙원의 향기, 스파이시’에서는 향료에 담긴 계급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요리가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도구로 사용됐다는 점, 그리고 그 가치가 희소성에 따라 결정됐다는 점도 인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그런 이야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도 앞서 말한 ‘화두를 던지는 것’의 일부다.

Q. ‘요리인류’ 제작을 위해서는 몇몇 소재를 취사선택해야 했을 거다. 방대한 요리사(料理史)를 담기 위해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이욱정 PD: 귀납적 방식으로 접근했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재밌는 사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큰 이야기를 그려나갔다. 아무래도 ‘요리인류’는 ‘보는 다큐멘터리’로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을 가져가야 했다. 연역적 방식보다 논리적으로 엉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방식을 택한 건 연역적 방식에 따라 제작될 경우 ‘죽은 그림’이 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Q. ‘죽은 그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욱정 PD: 논리적으로 잘 짜인 다큐멘터리는 깊이 있는 지식과 정보를 텍스트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림은 죽게 된다. 그림 자체가 다큐멘터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보니 그림이 전문가 인터뷰나 정보 전달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 그친다. 반면 ‘보는 다큐멘터리’는 그림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음식으로 치자면 마치 플레이팅(접시에 음식을 담는 모양새)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랄까, 하하. 사실 이런 게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미식가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Q. ‘누들로드’가 ‘푸드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한 소개였다면, ‘요리인류’는 거기에 맞는 문법을 제시하는 격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이욱정 PD: 요리라는 건 우리가 가진 본능적 욕구를 자극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허용된 욕망 중 가장 강렬한 소재이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요리가 즐거움이자 이야기, 혹은 진지한 생각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리인류’를 시작으로 매년 이런 푸드멘터리를 제작하는 게 목표다. 물론 그 스타일은 ‘듣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보는 다큐멘터리’가 돼야겠지.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푸드멘터리에 맞는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고 싶다. 요리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소재가 아닌가.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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