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돌아보며 스크린에서 본 인상 깊은 캐릭터
'서울의 봄' 정우성부터 '밀수' 박정민까지
영화 '서울의 봄'의 배우 정우성,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배우 이병헌, '길복순'의 배우 전도연, '화란'의 배우 송중기, '밀수'의 배우 박정민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한 해를 돌아보는 작업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다. 2023년 한국 영화계는 어땠을까. 팬데믹을 겪으며 난항을 겪은 만큼 '위기론'이 불거지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영화들을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특히, 다채로운 캐릭터들은 우리에게 희로애락을 안겨주기도 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 배우 TOP 5를 선정해본다. 선정 기준은 2023년 1월부터 12월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에 출연한 배우 중에 선택했다. 편집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가 있으니 재미로 보길 바란다. <편집자주>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정우성의 아우라
TOP1 '서울의 봄' 이태신 역 배우 정우성 (2023.11.22 개봉)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극장가에도 봄이 오지 않을까'라는 희망의 불씨를 지핀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연기력으로 똘똘 뭉친 배우들이 포진해있다. 단연코 '서울의 봄'을 보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민머리 분장에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무장한 전두광 역의 배우 황정민. 그의 연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났지만, 어째서인지 극장을 나서며 자꾸만 떠올랐던 건 이태신 역의 정우성이었다.

이태신의 첫 등장으로 되돌아가 보자.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한, 모두가 우왕좌왕한 상황, 이태신 역시 "무슨 일이냐"라며 연신 되묻는다. 김성수 감독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이태신을 첫 장면에 세워둔다. 이후, 참모총장 정상호(이성민)이 이태신에게 처음 수도경비사령관 자리를 제안했을 때,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절했고, 길고 기다란 복도에서 마주친 전두광(황정민)이 검은 속내를 드러내며 손을 잡자고 할 때도 그랬다. 초반부 이태신은 권력에 대한 야욕보단 군인으로서의 신념을 지닌 인물 정도라는 인상이 강했다.하지만 이태신은 1979년 12월 12일의 혼란스러운 상황 앞에서 누구보다 뚝심 있게 상황을 진두지휘한다.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몰라 허둥대던 눈동자는, 수도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흔들림 없이 또렷하다. 배우 정우성의 진가는 여기서 발휘됐다. 그는 '군 병력을 서울로 들어오느냐, 마느냐' 하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사생결단을 내렸다. 26사단이 한강교를 넘어 진격하려고 하자, 관할구역이 아니었던 행주대교 앞에서 맨몸으로 막아선다. 이때, 정우성은 해야 할 일을 하듯, 행주대교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군용 트럭이 괴물처럼 달려오는데도 불구하고 도로 한가운데를 막아선다.

또한, 수적으로 열세함에도 보안사령관 본부 앞으로 병력을 밀고 가는 장면에서 정우성은 인상적이다. 노재현 국방부장관(김의성)의 중단 명령과 직위 해제에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바리게이트를 헤치고 넘어서며 울분을 토해내는 정우성의 모습은 그간의 연기 경력이 집약된 결정체라고나 할까. 원래도 미남형 배우라는 수식어가 익숙했지만, 유독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의 얼굴이 돋보인다. "감독님이 전두광이 불이라면 이태신은 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셔서, 유연함을 갖기 위해 그리고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라는 말처럼, 정우성이 표현한 이태신은 차분하게 타오른 불씨와도 같았다.


왜 이병헌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하다
TOP2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탁 역 배우 이병헌 (2023.08.09 개봉)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눈깔을 갈아끼운 듯한 연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배우 박보영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병헌을 두고 한 말이다. 사실 그의 연기력에 대해 논하는 것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병헌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다시 한번 짚어주는 일은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재난이 들이닥친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는 극 중 인물들의 욕망과 이기심이 발현되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병헌이 연기한 103동 902호에 거주하는 영탁은 빠르게 가면을 바꿔버리는 인물. 건물1층에서 외부인이 집주인을 칼로 찌르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영탁이 뛰어 들어가 화재를 진압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해당 사건으로 리더십을 인정받으며 단숨에 주민대표 자리까지 올라갔다. "황궁 아파트의 주민이 아닌 분들은, 단지 밖으로 나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확성기를 들어 젠틀하게 말하던 영탁은 무력 진압을 통해 외부인들을 쫓아내고, 방범대 활동을 하는 아파트 단지 내 주민들에게는 은근한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황궁 잔치에서 1982년 발매된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은 이병헌이 아니었으면 누가 연기했을까 싶어질 정도로 소름 돋는다. 노래와 함께 겹치는 회상신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영탁은 원래 집주인을 죽이고 그 공간에 들어선 외부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다 망했다"며 분노하면서 진짜 영탁의 입 안에 바둑돌을 마구 쑤셔 넣어 살해하는 장면 역시 가히 압권이다. 광기에 휩싸인 영탁은 비밀을 숨기려고 전전긍긍하면서도 막상 탄로 난 순간에는 "내 집이나 마찬가지야! 집값도 다 냈는데! 개씨발 사기꾼 새끼가 나한테 사기를 친 거라고! 내가! 902호 김영탁이야"라고 분노한다. '달콤한 인생'(2005), '악마를 보았다'(2010), '내부자들'(2015), '남한산성'(2017) 등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이병헌의 연기력을확인했건만, 영탁으로 분한 그는 그야말로 스크린을 씹어먹었다.


액션하는 전도연도 멋있네. 못 하는 것 없는 만능 배우
TOP3 '길복순' 길복순 역 배우 전도연 (2023.03.31 넷플릭스 공개)
영화 '길복순' 스틸컷. /사진제공=넷플릭스


2007년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을 통해 제60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칸의 여왕'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전도연. 세계가 인정한 연기 귀재인 전도연은 역시 못 하는 것이 없나 보다. 올해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는 조카 남해이(노윤서)를 집 나간 언니 대신 맡아 키우기 위해 자신의 청춘을 버리고 악척스럽게 살아온 남행선을 연기하더니, 영화 '길복순'(감독 변성현)에서는 직업 킬러이자 싱글맘 길복순으로 이중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수수한 얼굴에 강단을 새겨진 전도연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어떤 장르든, 캐릭터건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는다.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전도연은 어린 시절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살기 위해 킬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인물이다. 실적도 높고 악명 높은 킬러지만, 집에만 가면 중학생 딸 길재영(김시아)의 눈치를 보고 밥을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하기 바쁘다.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이라는 대사처럼 길복순은 아이와 소통하는 일이 너무 벅차다.

변성현 감독은 전도연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것만 같다. 인턴 김영지(이연)의 대련 상대가 되어주는 장면에서 볼펜 하나만 쥐고도 여유롭게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에서 보인 부드러운 몸선과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한희성(구교환)이 배신할 때 입술을 꽉 깨물고는 죽이는 장면, 자신을 거둬준 스승과도 같던 차민규(설경구)에게서 수가 읽히지 않아 멘탈이 흔들리면서도 제압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여배우가 주연을 하는 영화가 비교적 적은 영화계에서, 길복순 캐릭터를 맡은 전도연은 더욱 빛난다.


비워내고 비워내다. 낯선 송중기의 얼굴
TOP4 '화란' 치건 역 배우 송중기 (2023.10.11 개봉)

영화 '화란' 스틸컷.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화란'(감독 김창훈)에서 치건 역을 맡은 배우 송중기는 낯설다. 언뜻언뜻 특유의 소년미와 능글맞음이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한껏 비워낸 느낌이다. 온몸에 잔뜩난 상처와 기미가 가득한 푸석한 피부,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는 삶에 치인 한 남자만을 응시하도록 한다.

'늑대소년'(2012)에서 한껏 경계심을 품지만 순이(박보영) 앞에서만은 풀어헤쳐지는 모습, '태양의 후예'(2016)의 유시진은 군인으로서의 신념과 강모연(송혜교)을 향한 순애보를, '빈센조'(2021)에서 젠틀하면서도 무자비한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를, '재벌집 막내아들'(2022)에서는 인생 2회차를 사는 윤현우/ 진도준을 연기하며 악바리 근성을 보여줬다. 그런데 '화란'에선 송중기를 통해 익숙하게 보던 느낌이 없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긍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화란'은 가난과 폭력이란 진창 같은 삶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소년 연규(홍사빈)이 (대부업) 조직의 중간 보스인 치건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합의금으로 300만원이 필요하던 연규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돈을 주던 치건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미스터리하다. 이 동네가 싫다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보스(김종수)의 무리한 요구를 만류하면서도 끝내 수긍하고야 마는 무기력함도 그렇다. 왜 송중기가 노개런티로 '화란'에 출연했는지 납득이 간 장면이 있다.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 일화를 연규에게 들려주는 장면에서, 송중기는 그저 구연동화를 들려주는 것처럼 한껏 힘을 뺀다. 아버지로 인해 죽을 뻔했다가 지금의 보스에 의해 귀에 낚싯바늘이 걸려 목숨을 건진 사연도 남의 일을 읊는다는 인상이랄까.

"다시 건져 올렸을 때, 애새낀 뒤졌어. 사람이 숨만 붙어있다고 다 사람은 아니거든"이라는 가시 박힌 말투에는 치건의 고독한 애처로움이 묻어난다. 엔딩부에서 치건과 연규가 격하게 몸싸움하는 장면은 송중기가 '화란'을 통해 어떤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는지도 짐작게 한다. 분명 송중기에게 많은 얼굴들을 봐왔던 것만 같은데, '화란'에서 본 송중기를 보고 있자니 스크린에서 더 자주 보고픈 마음이 든다.


박정민의 노력이 돋보이던 순간
TOP5 '밀수' 장도리 역 배우 박정민 (2023.07.26 개봉)

영화 '밀수' 스틸컷. /사진제공=(주)NEW


앙상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흐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배우 각자가 힘 조절을 하면서 합을 맞추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김종수, 고민시 등의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밀수'(감독 류승완)에서 난 이 배우에게 유독 시선이 갔다. 장도리 역의 박정민이다.

'밀수'에서 박정민이 맡은 장도리는 해녀인 조춘자(김혜수)와 엄진숙(염정아)를 따르면서, 뒤통수를 치고야마는 야비한 캐릭터다. 처음부터 선악이 확실하게 구분돼 있지 않아,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박정민은 차분하게 일을 수행해낸다. 특히, 비주얼적으로 10kg 이상 살을 찌워 80kg을 만들면서 어디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향하는 근성이 돋보이게 한다.

"장도리를 연기하면서 소형견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작은 개들이 무서우면 더 짖지 않나. 계속해서 으르렁거리고 언제든 물 준비를 하는 식으로"라는 박정민의 말처럼, 장도리는 '소형견'을 닮았다. 권 상사(조인성)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 패거리들을 몰고 가는 순간에도 장도리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시한다. 움찔거리면서도 상대를 자극하는 모습이, 박정민이 이야기한 '소형견'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다.

박정민은 누구보다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해 내는 배우다. '동주'(2016)의 송몽규, '그것만이 내 세상'(2018)의 오진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의 유이, '헤어질 결심'(2022)의 홍산오도 그러했다. 어쩌면 '밀수'의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질 수 있던 이유에 박정민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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