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영화 '올드보이'(2003) 데뷔, 20년차
짝사랑남의 정석 보여준 유연석
선과 악을 공존하는 연기
사진='운수 오진 날' 방송 캡처본.


"묵포까지 가주실 수 있나요?" 복슬복슬한 헤어 스타일에 사람 좋은 미소로 이렇게 말하는 유연석의 제안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티빙 드라마 '운수 오진 날' 파트 1 속 택시기사 오택(이성민)도 그랬다. 경계심을 무장해제 시키는 금혁수(유연석)의 제안으로 인해, 오택은 교대 시간임에도 수락하고야 말았다. 하루종일 운수가 좋았던 오택에게, 이 선택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물론 극 중에서 오택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기울고, 이혼도 하며 돈이 궁한 상태다. 심지어 딸의 등록금만 보태준다면 아내와의 재결합이 가능할 것도 같다)

'운수 오진 날'에서 유연석은 그간 보여준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 대신 섬뜩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금혁수라는 인물로 탈바꿈한다. 서사 구조상 한정된 공간인 택시 안에서 대부분의 사건이 펼쳐지기에 지루할 법하지만, 금혁수는 연신 키득거리며 오택에게 살인 무용담을 펼쳐놓거나, 부채의 앞뒷면처럼 빠르게 감정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운수 오진 날'의 시청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 중심에는 배우 유연석이 있다.
사진='낭만닥터 김사부1',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방송 캡처본.


의학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1'(2016),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1,2'(2020,2021) 등에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맡았던 유연석이, '운수 오진 날'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연기하니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신선하다. 전작들에서 유독 하얀 의사 가운과 인연이 깊던 유연석은 '운수 오진 날'에선 피 칠갑을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살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전작과 비교되며 더 큰 충격을 남긴다. 그 이유인즉, 대중들에게 익숙하던 가을 아침의 햇살과도 같은 유연석의 미소가 '운수 오진 날'에서 진짜 살인 미소로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데뷔 20년 차를 맞이한 유연석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를 시작으로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배우 유지태의 아역 이우진 캐릭터로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 유연석은 짧게 깎은 밤톨 머리에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극 중에서 친누나인 수아(윤진서)와 묘한 감정을 나누던 사실이 학교에 퍼지며, 수아는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이때, 우진(유연석)은 수아의 팔을 붙잡으며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죽지 말라고 처절하게 애원하는데, 유연석은 신임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압도적인 무게감을 만들어낸다.
영화 '올드보이', '건축학개론' 스틸컷.


'올드보이'로 데뷔한 이래 승승장구했을 것만 같지만, 유연석은 긴 무명 생활을 거쳤다. 그를 대중들에게 알린 작품은 바로 영화 '건축학개론'(2012)의 재욱 역이다. 일명 수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신은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도 들어본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해당 장면에서 유연석은 많은 남성 관객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저 집에 데려다줬을 뿐인데도 재수 없는 말투와 허세 넘치는 연기로, 서연(수지)를 짝사랑하는 승민(이제훈)의 입장을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포인트를 만들었다. 영화 '늑대소년'(2012)에서는 어떤가. 늑대소년(송중기)와 순이(박보영) 사이를 가로막는 지태로 출연하며 밉상 악역의 정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입 안에 가시가 돋친 듯, 나쁜 말들을 마구 퍼부어대던 지태를 보며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도 여러 차례였다.

빌런 이미지로 굳어질 뻔한 유연석의 연기 인생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은 바로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 성나정(고아라)을 짝사랑하는 지고지순 순정파 야구선수 칠봉이 역을 맡고 난 이후부터였다. 야구 선수로서 재능과 실력을 넘치지만, 사랑 앞에서는 자꾸만 풋내기가 되어버리는 칠봉이는 왠지 모를 애잔함을 남기기도 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말처럼, 칠봉이는 같은 자리에서 성나정을 향해 묵묵히 공을 던졌다.
사진=드라마 '응답하라 1994', '미스터 션샤인', '사랑의 이해' 캡처본.


날카로운 인상에 쉬이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신회 한성지부장 구동매 역으로 출연한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유연석은 짝사랑남의 정석을 보여줬다. '애기씨' 고애신(김태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지켜주지만, 그 이상은 다가갈 수 없기에 생기는 씁쓸함이 그러하다. 문장을 끝맺을 때, 한 음절씩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와 능글능글한 태도 역시 구동매를 매력적인 인물로 읽어낼 수 있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극 중에서 일본어를 구사하기 위해 직접 일본까지 다녀오며 현지에서 연습해보기도 했다는 유연석의 열정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리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거리에 있었던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와 달리, 드라마 '사랑의 이해'(2022)에서 유연석이 맡았던 하상수는 같은 은행 안에서 근무하는 안수영(문가영)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순간들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특히, 안수영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까지 뛰어가다가 우뚝 멈춰선 뒤 돌아섰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장면은 '왜 유연석인지'를 알려주는 장면임에 틀림없다.
사진=티빙 드라마 '운수 오진 날' 방송 캡처본.


유연석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공통적으로 '타이밍'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지만, '올드보이'에서 우진이 누나 수아의 손을 놓치고 후회하던 순간, '응답하라 1994'에서 나정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려던 순간, '사랑의 이해'에서 안수영에게 향하던 그 걸음을 망설이던 순간들이 그러했다. 때문에 유연석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아련함과 찰나의 순간 안에서 빛나던 모습들이 겹쳐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유연석에게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그저 '운수가 좋아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만 보면 알 수 있듯, 치열하게 고민하며 캐릭터를 연구하던 모든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유연석이라는 배우가 만들어졌다. 올해 데뷔 20년차를 맡은 배우 유연석의 앞으로 20년은 또 어떨지 기대되는 바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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