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권위 있는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에 오르는 일은 전 세계 모든 감독들의 꿈의 무대가 아닐까. 아카데미 시상식은 흔히 오스카(Oscar)라고 불리며 베니스, 베를린, 칸 영화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1929년 5월 16일에 할리우드 루즈벨트 호텔에서 처음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은 2024년 제96회를 맞는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만큼 엄격한 기준으로 후보작을 엄선한다. 그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미국내 극장에서 상영한 작품들을 기준으로 후보를 선정하는 것.
지난 9일 개봉한 엄태화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가 한국을 대표해 제96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에 도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17일 전해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세상을 집어삼킨 대지진으로 인해 홀로 남은 황궁 아파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 새롭게 뽑은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추악한 민낯을 보여주는 작품. 배우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등이 출연해 열연을 펼친다.
영화진흥위원회 심사위원 7인의 만장일치로 내년 3월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하기로 한 것. 국제장편영화 부문은 국가당 한 편만 출품할 수 있으며, 지난해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이 올랐다.
2019년까지는 외국어영화상(Best Foreign Language Film)이라고 불리던 이 부문은 이후 국제장편영화상(Best International Feature Film)으로 명칭을 바꿨다. 1957년 제2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신설된 부문이기도 하다. 명칭이 바뀌게 된 이유는 엄연히 공용어가 없는 나라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외국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비판이 일면서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부터 개칭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대부분 유럽권의 작품들이 해당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1952년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과 1955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영화 '지옥문', 1956년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미야모토 무사시' 이후에 아시아권 영화는 일본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이 아카데미의 국제영화상 부문에 출품한 것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2)였으나 후보 선정에 실패하는 쓴맛을 맛봤다. 이후에도 1964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벙어리 삼룡'(1964),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1966), 유현목 감독의 영화 '카인의 후예'(1968), 최하원 감독의 영화 '독짓는 늙은이'(1969) 등이 한국을 대표해 출품했지만, 후보 선정에 실패하는 결과를 맞았다.
최근 10년간의 아카데미 출품 기록을 살펴봤을 때, 7번의 후보 선정 실패와 2번의 예비후보, 1번의 수상이라는 결과를 알 수 있다. 그 말은 즉 1962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작품은 단 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아카데미의 최종 후보에 오르는 것은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아카데미의 후보작 선정 기준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매년 12월 1차 투표로 후보작을 선정하고, 그다음 해 1월쯤에 부문별 후보들을 발표한다. 이후 2월 중순에 최종 후보로 2차 투표를 진행한 뒤에 2월 마지막 혹은 3월 초에 시상식이 개최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외국어영화상의 경우는 LA 영화관 중 최소 1개 이상에서 상영하되 3회 이상 상영하면 자격이 주어진다는 차별점이 있다. 때문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이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이력은 가히 놀라운 성취임이 틀림없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은 2차 투표 이후 최종후보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 아쉬운 최종후보 탈락이지만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
영화 '버닝'(2018) 감독 이창동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2018년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될 정도로 높은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이전에 아카데미 진출의 예비 후보까지 오르면서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록 최종 후보에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제71회 칸영화제 기술상(벌칸상), 국제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하고 제44회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남우조연상, 외국어영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버닝'은 리얼리즘의 대가 이창동 감독의 ‘시’(2010) 이후 8년 만에 복귀작이다. 영화는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이 오랜만에 어릴적 같은 동네에 살던 해미(전종서)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와 가난의 경계, 계층의 차이와 내면에 담긴 울분과 분노가 담긴 우리 시대 청년들의 이야기다.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이후 같이 돌아온 미스터리한 남자 벤(스티븐 연)의 등장으로 종수의 세계는 균열이 생기고야 만다. 소설가를 꿈꾸는 종수와 일을 하지 않음에도 부유한 벤 사이의 구조는 영화의 핵심이 된다.
영화 '헤어질 결심'(2022) 감독 박찬욱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지난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의 최종 후보에서 안타깝게 탈락하는 결과를 안아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의 수상 이후, 한국 영화의 가능성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만큼 후보 불발에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제75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헤어질 결심’은 다른 영화제에서 무수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헤어질 결심’은 형사 해준(박해일)이 한 남자의 변사 사건을 수사하다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의 유가족과늠 달리 특별한 요동을 보이지 않는 서래에게 자꾸만 관심이 생기는 해준. 두 사람의 넘을 듯 넘어서는 안 되는 사랑의 감정은 저 멀리 밀려오는 바다의 파도처럼 거칠고 세차다. 특히 ‘헤어질 결심’은 기존의 박찬욱 감독이 추구하던 폭력적이고 어두운 세계보다는 순화된(?) 버전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와 같은 복수 3부작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계가 아니라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 ‘헤어질 결심’. 물론 ‘헤어질 결심’에도 박찬욱만의 인장이 무수하게 찍혀있다.
‘헤어질 결심’이 고배를 맛본 제95회 국제장편영화상 후보로는 ‘아르헨티나, 1985’(아르헨티나), ‘클로즈’(벨기에),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 ‘말 없는 소녀’(아일랜드), ‘EO’(폴란드) 등 5편이 선정됐고,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수상하는 결과를 안았다.
◆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인 ‘기생충’의 수상
영화 ’기생충‘(2019) 감독 봉준호
아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룬 결실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결과물일 것이다.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종 후보에서 아쉽게 탈락한 ‘버닝’에 이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국제영화상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기생충‘. 이 작품은 국제영화상 수상을 비롯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4관왕을 했다. 아카데미에서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 ‘기생충’은 한국 영화의 위상을 드높였다.
‘기생충’은 계급 우화를 중심으로 한 블랙코미디로 전원백수로 살 길이 막막한 기택(송강호)의 장남 기우(최우식)이 고액 과외 자리를 얻어 박사장(이선균)의 집으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가족 전체가 박사장의 집에 몰래 직장을 구하게 되면서 웃기지만 슬픈 상황을 만들어냈다. 아카데미 이외에도 2019년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제 한 걸음을 뗐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영화상 후보로 오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과연 최종후보로 오를 수 있을까? 제48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제56회 시체스 국제판타스틱 영화제, 제43회 하와이 국제영화제에도 초대받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재난 상황 속 홀로 남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람들의 추악한 욕망과 거듭된 질문을 하게 되는 작품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넘어야 할 산은 비록 크지만, 국제영화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를 기대해본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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