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우의 '노숙자' 연기만 남았다. 떡진 머리, 다 뜯어진 옷, 더러운 손발. 그저 정일우 혼자 여닫았다.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일우만 기억에 남고 장르도, 내용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가족'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텐트를 집, 밤하늘의 달을 조명 삼아 사는 기우(정일우 분)와 가족들이 이미 한 번 마주친 적 있었던 영선(라미란 분)을 다른 휴게소에서 다시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2007년 '내 사랑' 주연 이후 2018년 '1급 기밀'에 특별출연했던 정일우에게 '고속도로 가족'은 10여 년 만의 스크린 주연작이기도 하다. 오랜만의 컴백에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인사하고 싶었다는 정일우. 더불어 30대 중반의 남자배우로서 변화를 줘야 하는 시기라고도 생각했다고. 이번 노숙자 연기를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까지 받았다는 후문이다.

정일우의 각고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걸까. 실제로 작품을 보는 내내 그의 노숙자 연기를 보며 '정일우가 맞나?'라는 생각이 무수히 들 정도였다. 아무거나 주워 먹고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거나 입고 아무 데서나 씻는 정일우의 모습은 그동안 그의 연예계 생활 중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하다.

함께 연기한 아역 배우 서이수도 정일우 못지않은 연기실력을 보여줬다. 집 없는 서러움부터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초등학생의 연기를 제대로 해냈다. 대선배 라미란, 김슬기보다 오히려 눈에 띌 정도. 서이수는 2017년 드라마 '미워도 사랑해'에서 아역 출연을 시작으로 '오늘의 탐정', '뷰티 인사이드', '붉은 달 푸른 해', '호텔 델루나', '동백꽃 필 무렵', '18 어게인' 등 많은 작품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반면 올해만 3번째 작품으로 돌아온 라미란은 아역보다도 적은 비중과 존재감을 보였다. 기존의 유쾌한 캐릭터와는 결이 달라서였을까. 사연 많은 한 아이의 엄마이자 정의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는 그의 캐릭터는 확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이 반감이 된 셈.다만 문제는 극본이 배우들의 연기력을 따라오지 못했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휴먼 드라마 장르의 영화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스릴러에 가까웠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아빠인 줄로만 알았던 정일우의 또 다른 자아로 인해 장르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거리를 배회하는 가족이 누군가의 용기와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는 그저 정일우의 집착과 미련함만이 남았다.

또 하나, 웃음 포인트가 거의 없다. 누군가 한두 번 피식거렸다. 마지못해 웃은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킬링 포인트가 없는 것도 아쉬운 점 중의 하나.

자칫 C급이 될뻔했던 휴먼 영화를 그나마 정일우의 연기력이 B급으로 끌어올렸다. 높은 집중력과 진정성 있는 그의 열정은 이번에도 통했다. 역시 연기 잘하는 배우임을 또 한 번 입증했다.

정일우의 팬들이라면 한 번쯤 보러 갈 법하다.

류예지 텐아시아 기자 ryuperstar@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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