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더하지도 빼지도 않아야 할 중요한 역사가 있다. 슬프지만 찬란한, 아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자부심 바로 민주화 운동. 이 민주화 운동을 조금이라도 왜곡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싹부터 잘라야 함이 옳은 일. JTBC의 새 드라마 '설강화'가 방송 전부터 민주화 운동 폄훼 및 안기부 미화 논란에 휩싸였다. 두 번의 입장문을 내놓고 해명에 나섰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설강화'의 소개는 이렇다. 1987년 서울을 배경으로 어느 날 갑자기 여자 기숙사에 피투성이로 뛰어든 명문대생 수호(정해인 분)와 서슬 퍼런 감시와 위기 속에서도 그를 감추고 치료해준 여대생 영초(지수 분)의 시대를 거스른 절절한 사랑 이야기.
작품 소개만 보자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대학생이 군인에게 쫓기다 여자 기숙사에 숨어든 이야기 같다. 물론 이렇게만 전개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소개에서 눈에 거슬리는 점은 여주인공 이름과 '시대를 거스른'이라는 부분.찜찜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온라인을 통해 '설강화'의 시놉시스 일부가 유출되면서 '설강화' 논란이 시작됐다. 시놉시스에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군부독재 및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려는 듯한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왜곡이 우려되는 가장 큰 부분은 운동권 학생인 줄 알았던 메인 남자 주인공(정해인 분)이 알고보니 남파 간첩이었다는 설정이었던 것(민주화 운동 폄훼)과 서브 남자 주인공(장승조 분)이 '대쪽같은 인물'로 묘사되는 안기부 팀장(군부독재 및 안기부 미화)이며 또 다른 안기부 요원(정유진 분)은 거침없이 뛰어드는 열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군부독재 및 안기부 미화)된 것이었다.
'설강화'의 문제를 짚기 전 '설강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87년이 어떤 시기였는지 알 필요가 있다. 1987년은 전국이 반독재, 민주화 목소리로 덮인 해였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로 국민을 공분케 했던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사건과 민주화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고(故) 이한열 열사로 시작돼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다.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로 바뀌었다.
이 시기 안기부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시민을 간첩을 몰아 끌고 와 고문하고 죽게 만들었다. 방송을 통해 잘 알려진 수지킴사건(홍콩에서 김옥분 씨(수지킴)가 살해되자 안기부가 진상 은폐를 위해 그를 북한 공작원으로 조작한 조작극)도 1987년에 일어난 일이다.
다시 '설강화'로 돌아와서 우려가 되는 부분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시민의 손으로 이룩한 결과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다 간첩이라는 누명이 씌워져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고 그 피해자가 아직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 때 간첩이 있었다는 설정부터가 '설강화'의 문제다.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기 위해 간첩이라는 조작을 만들어냈던 그 시절 군부정권과 안기부다. 간첩의 등장은 군부세력과 안기부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가 되어 버린다.
안기부에게 대쪽 같은, 넘치는 열정 같은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안기부 요원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군부 지시 아래 시민을 협박하고 고문했던 사람.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으니 그런 면에서 대쪽 같고 열정 넘치는 인물은 맞겠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가 있는 드라마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화려한 휴가'나 '1987' 등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가 많았지만 그 어디에도 안기부를 사람처럼 묘한 곳은 없었다. 군부의 명으로 시민을 고문하고 죽이는 것이 일상이었고, 당연했던 그 시절 안기부에게 서사를 쥐어주는 것 자체가 문제다. 서사를 준 순간부터 억울하게 끌려가 죽었던 분들도, 그 피해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민주 열사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JTBC는 즉각 입장을 내놨다. 내용 일부까지 공개하면서 이해를 구한다고 했지만 입장문을 밝히면 밝힐수록 더더욱 제작되어선 안된다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구구절절 해명하면 '아 그렇구나'하며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설강화'는 민주화 운동을 다루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설강화'는 80년대 군사정권을 배경으로 남북 대치 상황에서의 대선정국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 입니다.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끄는 설정은 대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80년대 군부정권 하에 간첩으로 몰려 부당하게 탄압받았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군부정권, 안기부 등 기득권 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해 북한 독재 정권과 야합해 음모를 벌인다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JTBC 1차 및 2차 입장문)
1987년 민주화 운동과 정치는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히려 이 시기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들면서 정국만 강조하고 민주화 운동을 지운다는 것 자체가 민주화 운동의 폄훼다. 1987년은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국민의 직접 선거가 처음 이뤄졌던 역사적인 날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김(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분열로 군부 세력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이 흐름을 어떻게 블랙코미디로 표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민주주의를 외친 정치인과 운동권을 간첩으로 조작했던 군부세력의 경쟁이 블랙코미디라는 말로 끝낼 수 있는 문제일까.
군부정권, 안기부 등 기득권 세력이 권력유지를 위해 북한 독재 정권과 야합해 음모를 벌인다는 설정도 위험하다. 군부정권과 안기부는 권력유지와 민주화를 막기 위해 민주주의 외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죽였다. 북한 간첩이라고 조작한 군부정권인데 '북한 독재 정권과 야합해 음모를 벌인다'는 가상이 아니라 왜곡이다.
"남파 공작원과 그를 쫓는 안기부 요원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속한 정부나 조직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한 부정한 권력욕, 이에 적극 호응하는 안기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부각하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러므로 간첩활동이나 안기부가 미화된다는 지적도 '설강화'와 무관합니다. 안기부 요원을 ‘대쪽 같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힘 있는 국내파트 발령도 마다하고,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는' 동료들에게 환멸을 느낀 뒤 해외파트에 근무한 안기부 블랙요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인물은 부패한 조직에 등을 돌리고 끝까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원칙주의자로 묘사됩니다" (JTBC 2차 입장문)남파 공작원과 안기부 요원은 존재 자체로 조직과 정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국가 조직에 속해 명을 받고 활동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조직과 정부를 대변할 수 없나. 이 한 줄이 안기부를 미화하겠다는 뜻인데 어떻게 안기부 미화가 아닌가. 안기부는 군부정권에 충성을 다하던 조직이다. 안기부에 환멸을 느끼고 조직에 등을 돌렸던 안기부 요원은 한 명도 없었다. 안기부 때문에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은 아직 많이 계신다. 그랬던 안기부에게 정의를 주고 원칙주의자 설정을 준다? 그게 바로 미화다.
다른 게 미화가 아니라 안기부에게 보통의 성품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미화라는 말이다. 군부독제의 그림자, 군부독재의 반려 외에 다른 수식어가 붙는다면 다 미화다. 이건 역사에도 남아 있는 진실이다. 해외 파트에 근무한 기부 블랙요원이라고 넘어가려 하지만, '수지킴 간첩 조작 사건'이 안기부 해외파트도 동조한 일임을 이미 많은 방송에서 보여줬다.
또 하나의 지적은 여주인공 지수가 연기할 캐릭터 이름이 은영초가 실제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인 천영초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천영초 선생님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안기부에 잡혀 고문까지 당했다. '설강화' 측은 "극 중 캐릭터의 이름 설정은 천영초 선생님과 무관하다. 하지만 선생님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나온 만큼 관련 여주인공 이름은 수정하겠다"고 알렸다. JTBC는 "미방영 드라마에 대한 허위사실을 기정사실인양 포장해 여론을 호도하는 행위를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자하는 수많은 창작자들을 위축시키고 심각한 피해를 유발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해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1987년이 아주 먼 과거인가. 우리 곁에 버젓이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와 증인이 있는데. 우리의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지나온 삶이고 민주화를 외친 분들의 피와 눈물로 살고 있는 평화의 시대다. 작가와 감독이 창작의 자유를 외치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시청자가 옳다 그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다 이러한 과거를 밟고 섰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이룬 민주주의는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시민의 손으로 얻은 결과다.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고 군부독재의 폭력과 폭정에 맞서 일궈낸 민주주의다.
1987년에도 봄은 있었고 꽃은 피었으니 청춘 멜로 드라마도 좋다. 하지만 1987년의 봄도 민주주의를 외치던 분들의 피로 피워낸 계절이다. 이걸 인지하고 있다면 이 시대를 배경으로 애틋하고 풋풋한 로맨스만 담을 수 있을까.
미완성된 시놉시스만으로 16만 명에 가까운 국민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왜곡을 싹을 자르기 위함이다. 해명이라고 내놓은 입장문도 깔끔하지 않은데 저대로 방송이 된다면 드라마 내용을 통해 아주 조금씩 왜곡과 미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조선 건국과 왕을 왜곡하고 비하하려 했던 SBS '조선구마사'가 2회 만에 방영 폐지됐다. 뿌리를 흔들고자 하는 음모엔 함께 분노하고 일어난다. 처음은 어려워도 두 번째는 쉽다.
대중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설강화'의 왜곡과 미화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제작진은 구구절절한 입장문 대신 대중이 지적한 부분은 완벽하게 고치고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할 때다.
우빈 기자 bin0604@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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