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흑백 영화의 변사처럼 말이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담을 연기까지 해보이며 설명한다. “원톱 주연이니까 나한테 안 들어오겠고, 친구 역할인가보다 해서 ‘아유! 열심히 해야죠!’라고 말씀드렸는데, 반응이 이상해서 ‘왜 그러세요, 감독님!’이라고 했더니 ‘지훈 역이다!’라고 하시잖아요.” 나이 서른, KBS ‘82년생 지훈이’로 태어나 처음 “내가 주인공이래!”라고 외친 이 남자의 이름은 허정민이다. SBS 이나 MBC 에서 ‘주인공 동생’을 연기하던 청년이다. 20대 초중반에 “동생 연기가 그 나이 또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자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는 허정민은 자신의 예상처럼 딱 서른이 되고 첫 작품인 ‘82년생 지훈이’에서 드디어 번듯한 직업과 여동생이 생겼다.
“차마 주인공까지는 생각도 못 했어요”
단막극의 주연이 빛나는 미래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혼자 방송국을 오갔던 아역 배우였고, 더 자라서는 그룹 문차일드의 멤버로 활동했다. 정신없이 바쁜 활동 속에서 사춘기도 건너뛴 줄 알았지만, 27살쯤 지독한 성장통이 찾아왔다. “누군가 ‘너 이래도 살 수 있어?‘라고 하는 것처럼 모든 안 좋은 일들이 한 번에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 때 군대를 다녀와야했죠.”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하나의 꿈을 향해 걸었지만, 20대에 그가 잘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금전적인 부분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모님께 불효이고 사치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던 순간 찾아온 ‘82년생 지훈이’가 뜻 깊은 건, 허정민에게 그 아픈 20대의 출구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작품 찍고도 반응이 없으면 연기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자”라고 작품에 매달렸고, “‘난 자연스러운 연기는 정말 잘해’라고 생각했었어요.”라는 자신감을 가진 채 연기하다보니 눈빛에 보다 자연스러운 희로애락의 깊이를 담을 수 있게 됐다. 좀처럼 되는 일 없던 82년생 지훈이, 그래도 그 시기를 도망치지 않고 노력해 온 82년생 허정민. 이 서른 살이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섰다.
My name is 허정민
1982년 11월 11일에 태어났다. 생일 계획? 없다. 서른에 무슨!
원래 ‘78년생 지훈이’ 였다. 서유선 작가님이 78년생으로 서른을 맞이하는 주인공을 두고 쓴 극본이다. 계속 제작이 늦어지면서 82년생이 서른 살인 올해, 나에게 왔다!
“푸들 같은 연기자가 하나 있다”는 말로 송현욱 감독님이 서유선 작가님에게 나를 소개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푸들이라니요! 전 도베르만 같은 남자예요!”라고 발끈했다. 푸들과 도베르만 중 어느 쪽이냐고? 당연히 감독님이 이겨야지 않겠나. 하하
박상원 씨의 아역으로 SBS 에 출연 할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강원도 정선에서 한 달 동안 스태프들을 ?아 함께 생활했다. 순전히 내가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서포트는 없었다. 역삼동 집에서 방송국까지 가는 걸 힘들어하니까 여의도로 이사 가고, 자전거 한 대 사주신 정도?
케이블 채널에서 구인구직 광고를 봤다. 연기 말고 다른 거를 해볼까 해서.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용접을 할 수 있나, 회계를 할 수 있나. 사회에서는 완전 바보나 다름없더라.
문차일드였던 게 지금은 자랑스럽다. 20대 중반에는 솔직히 기분 좋진 않았다. ‘나는 연기를 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문차일드로 불려야 할까’ 싶었다. 고생했던 기억, 악몽만 남은 줄 알았는데 차츰 나이가 들면서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트위터 아이디도 @moonchild7824다.
무대에 올라가 있는 3분만 행복했다. 그것만 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자고. 숙소를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잠깐 쉬는 1년 동안.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다 누렸다. 내 인생에 있어서 술을 제일 많이 먹었던 시기가 아닐까.
음악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화성학 공부도 하고 작곡 수업도 듣고 과외도 받았다. ‘이건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악기도 계속 샀는데, 늘지가 않으니까 흥미가 떨어지더라. 악기는 다 팔고….
“어머 우리아들 어쩜 이렇게 잘 하니!“ 엄마와 같이 ‘82년생 지훈이’를 봤는데 아무래도 엄마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내가 나올 때마다 ”어머머머 우리아들 잘 한다!“고 하시는데, 미치겠더라! 집중해서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엄마 때문에 못 운 것 같다.
술만 마시면 그렇게 팬들이 보고 싶다. 그래서 가끔 술 마시고 팬 카페에 글을 쓰곤 했다. 근데 나이가 드니까 좀 민망해서 자제하고 있다. 참, 이번 12월 달에 애들이 송년회를 한번 하자고 하는데, 얼마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려고 한다. 어차피 많이 모이지도 않을 테니까. 하하
본부장 역할은 죽기 전에 한 번 쯤 해봐야지 않을까. 근데 본부장보다는 MBC 의 한석규나 SBS 의 이병헌 씨처럼 어딘가 불쌍한데 페이소스 묻어나는 역할을 하고 싶다.
한 곳에 얽매어 놓는 것을 못 견딘다. 시들거나 날아가 버린다! 아마 예전에 틀에 얽매이고 자유가 없는 상황을 혹독하게 겪어봐서 더 그런 것 같다. 싫다!
상황코미디를 공부하고 싶다. 관객들과 호흡하는 코미디를 배워보고 싶어서 연극 에 출연한다. 송새벽 씨를 보면 본인은 하나도 안 웃고 연기하는데 보는 사람은 쓰러지지 않나. 그런 게 다 연극무대에 선 경험으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코믹배우까지는 아니더라도 웃음을 줘야 하는 상황에 맞게 꺼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축적해서 적절한 타이밍에 써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 박소정 기자 nine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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