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만화나 드라마에서 꼭 한 번쯤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자신의 재력이나 가문만을 보고 다가오던 사람들과 달리 당당하고 자존심 강한 여주인공에게 반한 남자는 외친다. “나한테 이러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하지만 SBS 의 재벌 3세, 지성과 미모와 이성을 겸비한 서나윤(왕지혜)은 또 다르다. 라이벌 은설(최강희)의 뺨을 때리려다 도리어 팔을 꺾여 쩔쩔매고,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올 줄 알았던 옛 애인 지헌(지성)에게 확실하게 이별선언을 들은 뒤 화장실에 숨어 완벽했던 메이크업이 다 번지도록 울다가도 남들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교육의 힘!”을 부르짖는 이 허당 아가씨를 보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말 그대로 ‘이런 재벌 딸은 네가 처음이야!’ 되겠다.

하지만 시원한 이목구비에 도도한 깍쟁이 같은 이미지와 달리 “뭐든 잘 먹어요. 얼마 전 술 먹는 신 촬영 때는 소품으로 나온 어묵탕을 계속 먹다가 스태프가 매니저에게 식사 안 하고 오셨냐고 물어봤을 정도예요. (웃음) 기사식당 가는 것도 좋아하는데, 특히 좋아하는 메뉴는 돼지불백(돼지불고기백반)이에요”라고 재잘재잘 털어놓는 왕지혜의 매력 또한 그 의외성에 있다. 게임을 좋아해 카트라이더 실력은 수준급이지만 실제 운전면허를 딸 때는 실기시험에서만 세 번이나 떨어졌고, “처음 보는 사람과 말하는 게 너무 떨려서 은행에 계좌 만들러 갈 때도 얼굴이 빨개지는” 소심함을 지닌 그에게 서나윤은 모처럼 만난 몸에 꼭 맞는 옷이었던 셈이다.고등학교 시절 잡지 모델로 데뷔해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짧은 대사 한 마디도 수줍어서 제대로 못 했을 만큼”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왕지혜는 어느 새 데뷔 10년차 배우가 됐다. 2007년 SBS 이후 꼬박 2년 동안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과 연기 수업으로 꽉 짜인 시간표에 따라 다음 기회를 준비했던 그에게 마침내 찾아온 것은 MBC 의 여주인공 진숙 역이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결정적 순간에 사람을 선택했던 적이 많은데, 어떻게 보면 경력을 쌓는 데는 조금 더딜 수도 있었겠지만 그 결정에 만족했고, 사람을 택한 게 항상 옳았어요.”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온 만큼 밝은 웃음 사이에서도 단단한 속내를 드러내는 왕지혜가 ‘늘 나와 함께 하는 노래들’을 추천했다.



1. James Blunt의
유서 깊은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제임스 블런트는 그 자신도 나토 평화유지군의 장교로 코소보 내전에 참전했던 군인이지만 전역 후 데뷔 앨범인 으로 2004년 영국 최고의 신인으로 떠오른 뮤지션이라는 드라마틱한 개인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제임스 블런트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에요.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이 특히 멋있어요. 앨범에는 ‘High’나 ‘You`re Beautiful’처럼 좋은 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Goodbye My Lover’에요. 화려한 기교는 없지만, 그래서인지 그 바탕에 깔린 감성이 더 먼저 다가와 마음을 울리는 느낌이에요. 차분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보컬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곡이고, 보컬만큼이나 애절한 가사가 곡에 더 빠져들게 하거든요.”

2. 4 non blondes의
1992년을 대표하는 어떤 것들을 타임머신에 넣어 기록한다면 이 앨범은 꼭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What`s Up’의 등장은 강렬했다. 막연한 불안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청춘의 정서를 폭발시킨 가사와 린다 페리의 파워풀한 창법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빛바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What`s Up’이 발표되었을 당시엔 고작 일곱 살이었을 왕지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이 곡을 고른 것 또한 그 고유의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라이브 공연 영상을 보게 됐는데 보컬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었고, 폭발적인 무대 매너에 더욱 놀랐다. 그 후부터 이 노래를 계속 들었던 것 같아요. 새벽에 듣는 린다 페리의 보컬은 특히나 더 가슴에 와 닿거든요.”

3. Radiohead의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팝송 가운데 하나, 정작 이 노래를 부른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는 사람들이 라디오헤드에 대해 이 한 곡만으로 단정 짓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하지만 한 번만 들어도 결코 잊을 수 없고 기이한 중독성을 지닌 마성의 노래 ‘Creep’이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약을 하지 않아도, 심지어 사랑에 빠지지 않아도 이토록 꿈꾸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곡이 또 있을까. “영화 를 보다가 알게 된 곡이에요. 그 후로 제 음악 재생 목록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아마 이 곡을 듣고 모던록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가사도 좋지만 몽롱한 느낌의 보컬이 곡의 분위기를 특히 더 잘 살려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4. Vikki Carr의
“누군가 한번쯤 나에게 불러줬으면 하는 곡이에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가사도 정말 좋고, 들을 때마다 설레요. 영화 OST나 여러 버전의 리메이크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진 곡인데 사실 제가 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뮤즈가 부른 버전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아하(A-Ha)의 멤버였던 모튼 하켓이 부른 OST로 기억하고 있지만 실은 60년대부터 80년대를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텍사스 출신의 가수 비키 카가 원곡을 불렀다. 오리지널은 물론 리메이크 버전마다 각자의 매력이 있지만 아쉽게도 뮤즈의 버전은 음원 사이트에서 좀처럼 찾기 어렵다.

5. 이승열의
“MBC 를 보다가 알게 된 곡이에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이승열 씨의 목소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노래 한 곡의 재생시간은 몇 분밖에 되지 않지만, 이승열 씨의 보컬은 그 시간의 몇 배나 더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새 앨범을 내셔서 이동할 때나 촬영 중에 대기할 때에도 계속 듣고 있어요. 요즘 콘서트도 하고 계시다고 하니 시간이 나면 꼭 가보고 싶어요.” 이승열은 가장 담백하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보컬을 지닌 뮤지션이다. 90년대 방준석과 함께 결성했던 ‘유앤미블루’ 시절부터 최근 4년 만에 발매한 3집 앨범 까지, 방송에 자주 모습을 비추거나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않음에도 언제나 이승열을 기다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또한 그의 음악과 음악에 대한 태도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다림과 노력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여주인공의 라이벌이면서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로 사랑받고 있는 왕지혜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여주인공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씩씩한 캔디 역할도, 진짜 절절한 멜로도 하고 싶어요”라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의욕을 드러내다가도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진 않아요”라 덧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모습은 앞으로 우리가 왕지혜라는 배우를 지켜볼 만한 이유를 충분히 제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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