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는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 사람이 네 명 있다. 고아 행세를 한 서영(이보영)과 미경(박정아), 자신이 성재(이정신)의 생모임을 숨긴 소미(조은숙), 딸 서영을 위해 가명을 쓴 삼재(천호진). 서영은 무능력한 아버지 삼재 때문에 제 삶까지 도매금으로 평가 받기 싫었고, 미경은 재벌집 딸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사랑 받고 싶었으며, 소미와 삼재는 자신의 존재가 자식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했다. 이 넷의 기만은, 개인이 그 자신의 인성이나 능력이 아닌 그 아버지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통해 평가 받는 가부장제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실패한 가부장제를 대신하는 것

의 가족은 더 이상 아버지들에게 가부장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신뢰를 주지도 않는다. "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uTftS84RpQZNglNgNPfSIltCQiS.jpg" width="555" height="180" border="0" />전통적으로 가부장의 역할은 크게 식구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고, 도덕적 권위로서 가정 내 갈등을 조절하는 두 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속 아버지들은 모두 이 두 가지에 실패한다. 기범(최정우)은 돈의 힘만으로 가족들을 통제한 바람에 도덕적 중심이 될 기회를 제 손으로 버렸고, 삼재는 가족을 빈곤으로 몰아 넣은 탓에 발언권을 잃었다. 가족은 더 이상 아버지들에게 가부장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신뢰를 주지도 않는다. 에서 가부장제는 철저히 실패한 제도며, 넷의 기만을 낳은 거짓의 씨앗이다. 그러나 가부장이 몰락해도 가정은 남는다. 그렇다면 기존의 질서가 사라진 가정은 무엇으로 지탱되는가.

속 인물들은 혼자 힘으로 모든 갈등과 책임을 짊어지는 방식을 택한다. 우재(이상윤)는 아내의 거짓말을 알고도 그 이유를 묻는 대신 혼자 추측하고 오해한다. 서영은 혼자 안고 살던 비밀을 들키자 오해를 푸는 것을 포기하고 위악을 부린다. 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충격을 받은 성재는 일단 집에서 도망부터 친다. 작중 가족에게 제 고민이나 비밀을 털어놓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갈등을 조절할 만한 새로운 관계질서의 규약이 없기 때문이다. 폭압적인 형태로나마 갈등을 중재하고 질서를 유지하던 가부장은 몰락했으나, 그것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룰은 아직 합의되지 않은 공백. 가족은 상호신뢰와 치유가 가능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가 상처 입고 상처 입힐 것을 걱정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개인들의 집합이다. 사랑했던 연인은 이별하고, 관계는 끊어지며 행복은 붕괴된다.

그래서 이들을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붕괴된 행복에 대한 해결책으로, 는 가정에 매몰되지 않은 자신만의 삶을 찾음으로써 근대적 개인으로 태어날 것을 권한다. 서영이 독립을 결심하고 나와 처음으로 카페에서 만화책을 읽다가 단잠을 청하는 호사를 누리는 장면은 더 없이 평화롭게 그려진다.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 그러하다면, 공동체 차원의 끊어진 관계는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성재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고 지선(김혜옥)은 크게 충격을 받지만, 결국 애정으로 성재를 품음으로써 모자관계를 이어 붙인다. 애정과 포용으로 이루어진 이 질서는 얼핏 긍정적인 해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게 새로운 질서가 되려면 어느 한 쪽의 초인적인 희생과 용서가 필요하다. 더구나 이 방법은 이미 한 차례 실패했다. 결혼을 앞둔 서영은 우재에게 “언젠가 우재 씨가 알던 내가 아닌 내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해”달라고 말했지만, 애정으로 굳건할 것 같던 맹세는 3년 뒤 의심과 배신감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새로운 관계질서의 규약은 무조건적인 애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등장인물들도 그 점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집을 나간 성재를 찾아 달래며 서영은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상처 주고 받아. 도련님만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한다. 어이없는 이유로 헤어져야 했던 상우와 미경은 서로에게 준 상처를 인정함으로써 동료로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간다. 과연 는 갈등의 은폐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 입고 상처 입히는 우리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가부장제의 시간이 가고, 신뢰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규약의 시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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