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이 업데이트되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직장인들에게는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고,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전쟁터를 미리 엿보는 살벌한 시간이다. 이미 전작 와 로 집단의 이기와 욕망, 그리고 그 안의 개인을 놓치지 않았던 윤태호 작가는 에 이르러 가장 평범하다고 여겨졌던 회사로 눈을 돌렸다. 중견 무역회사에 입사한 전직 한국기원 연구생 장그래가 ‘초짜’를 벗어나는 과정은 매일이 바둑의 한 수, 한 수와 같고 그가 겪는 상사들과 동료들은 바둑판 너머의 경쟁자가 되기도 훈수를 두는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연재 전 3년 동안 한국 기원에서 취재한 디테일한 바둑의 세계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압축적이고 적합하게 드러내주고,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는 직장인들의 생활은 폭발적인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 회사에도 이런 사람 있어요”부터 “이렇게 합리적인 회사라면 다니고 싶다”에 이르는 달고 쓴 댓글들은 윤태호 작가가 얼마나 직장인들의 비애와 환희에 깊게 접근했는지를 보여준다.

“저는 샐러리맨의 생활을 잘 몰랐어요. 그 사람들은 항상 술집 가서 상사 욕하고 회사 욕하는데 그러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다닐까, 그런 궁금증이 있었죠. 그래서 샐러리맨들이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보면 다들 사소한 영역에서 화를 내더라구요. 가령 나는 이 물건을 항상 여기에 두는데 누군가 허락 없이 그 물건을 쓰고 제자리에 안 두면 화나는 거죠. 저 놈도 배울 만큼 배운 놈인데 왜 이렇게 할까, 다른 의도가 있나, 나를 무시하는 건가. 그런 걸 보며 재미의 포인트를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재미로만 접근하진 않았어요. 우선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직업군 아닌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지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이 별로 없었죠. 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멋지게, 힘낼 수 있도록 묘사하고 싶은 게 컸습니다.”

샐러리맨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재미로 소비하지 않는 것, 그 진심이야 말로 윤태호 작가를 관통하는 키워드이자 그가 작품을 대하는 제 1원칙일 것이다. 출판 만화로 시작해 첫 웹툰 때만 해도 스크롤을 내리는 웹툰의 리듬을 잘 몰랐고 자신도 없었다던 그가 지금 웹툰을 넘어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창작자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 그가 “모든 창작물은 인간으로 출발해서 인간으로 끝”난다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매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윤태호 작가가 그를 비약시킨 영화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1. (Dressed To Kill)
1984년 | 브라이언 드 팔마
“20대 문하생 시절 비디오로 봤던 영화입니다. 그 당시 화실에선 꼭 봐야하는 영화 목록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영화였습니다. 평온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가만 들춰보면 매 순간순간 가시 같은 위험이 숨겨져 있죠. 정숙한 척 하지만 어떤 유혹에도 기꺼이 따를 것 같은 중년의 여인과 남자. 그리고 살인과 지적 스릴. 제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피가 튀는 난도질만큼이나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지점에서도 공포를 자아낼 줄 안다. 역시 여성들이 공격당하기 전 아무렇지 않게 샤워하는 장면에서 조성되는 긴장감은 그 이후의 장면들의 충격을 더욱 더 배가시킨다. 히치콕의 를 향한 오마주인 동시에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독창적인 작품.

2. (Titanic)
1998년 | 제임스 캐머런
“ 이전의 저는 그다지 대중적 취향의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역시 매우 대중적이라 할 수 없지만. 유머나 주제의식이나 상당히 마이너한 재미와 가치를 추구하곤 했었고, 그것은 대중작가로 스스로를 규정한 나에게 매우 심각한 고민거리였습니다. 보편적 재미란 것에 대한 갈증이 심했죠. 이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고 그 후로도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아요. 영화안의 각 캐릭터별로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후반부의 장면이 초반에 어떻게 설정되는지도 살펴봤어요.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장치로써의 특수효과를 향한 캐머런 감독의 집념을 다큐로 보기도 했죠. 익숙한 소재, 거대한 전형성을 파괴하는 작고 세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은 저의 언어를 보다 확장시켜줬습니다.”제임스 캐머런을 보다 이전에 “킹 오브 더 월드”로 만들어준 영화. 멜로와 스펙터클, 액션과 스케일까지 상업영화로서의 미덕을 빠짐없이 갖추었다. 영원한 사랑, 숭고한 희생이라는 오래되고 진부한 러브 스토리를 오락과 감동의 균형점을 찾음으로서 대작으로 완성시켰다.

3. (Fargo)
1997년 | 조엘 코엔
“머리가 복잡하거나 아이디어가 막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휴식이란 핑계가 필요한데 놀기는 뭐하고 뭐라도 하는 척하고 싶을 때 늘 찾아보는 영화예요. 처음부터 봐도 좋고 중간 어느 부분으로 시작돼도 좋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가만 보고 있으면 감독이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애들은 가.” 진정한 성인들의 영화죠.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 놓인 갈등의 허들은 면도날처럼 빛나고 여지없이 그 칼날은 피로 물듭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총은 어김없이 발사될 것이고, 범죄 계획은 들통 나거나 꼬이게 될 것이다. 역시 궁여지책으로 나온 어설픈 납치극이 예기치 못한 사소한 변수들로 뒤엉키고 그 안에서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비춘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가는 상황에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데 그 뒷맛이 참으로 쓰다.
4. (As Tears Go By)
1987년 | 왕가위
“역시 문하생시절 홍콩영화 붐에 편승해서 화실엔 몇 가지 유행어가 있었어요. 형님은 무조건 ‘따거’였고 모르는 건 ‘메이요’였습니다. 과도한 의리와 부담스런 비장함이 판치던 홍콩 느와르 중에 리얼한 비장함과 의리를 보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당시 왕가위가 사용한 필름이 텅스텐필름이란 소리를 듣고 서울극장 맞은편 사진재료가게를 찾아 죽 찢어주는 텅스텐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프레임이란 것에 눈을 뜨고 광학적 효과에 대해 예민하게 접근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느꼈죠.”

왕가위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 만큼 현재 우리가 왕가위 하면 떠올리는 특유의 스타일이나 미장센을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걸출한 감독의 탄생을 알리기엔 충분했던 작품. 당시 일반적인 홍콩영화들과는 다르게 주인공 1인의 비장미를 고조시키는 과장이나 클리셰들을 최대한 걷어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흔들리는 청춘들과 자꾸만 엇갈리는 남녀, 그리고 영화의 모든 아름다움을 압축시킨 듯한 유덕화의 눈빛은 홍콩의 밤거리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5. (Blowup)
1966년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살다보면 내 재주로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 따윈 가망 없는 ‘물체’를 만날 때가 있죠.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당최 뭔 소린지 알 수는 없으나 그런데도 좋고 암실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비밀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그 비밀이 풀리길 응원하게 되는 영화예요.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늘어놔봐야 결국 ‘전 잘 몰라요’라고 고백 당하게 되는 영화죠.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그래서 데뷔 초 제 만화들이 재미없었던 걸까요?”늘 남들은 모르는 미지의 땅을 꿈꾸던 탐험가들처럼 영화광들에게도 정복해야할 영화가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역시 탐험의 대상이다. 늘 물음표를 남기는 그의 영화들처럼 역시 일견 추리극이나 공포물의 미스터리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 남는 것은 거대한 물음표. 보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실체에 대한 질문을 감독만의 방식으로 던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80년대 말 허영만 작가의 문하생으로 만화에 입문한 윤태호 작가는 출판과 웹툰, 서로 다른 지면을 모두 겪어왔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스스로 웹툰 작가 혹은 출판 작가로 규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창작자고, 그 때 가장 좋은 지면에 작품을 내면 된다”고 말한다. ‘베스트 도전’을 넘어 ‘만화가’를 꿈꾸는 이들, 그리고 더 넓게는 창작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곱씹어 볼만한 그의 생각을 전한다.

“가장 중요한 건 스토리를 잘 쓰는 것도 그림 잘 그리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대학이 가르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결국 교양일 겁니다. 철학이 됐건 뭐가 됐건. 애들 보면 스토리 잘 쓰는 기법 같은 거에 집착하는데 그게 진짜 쓰레기죠. 그건 결과론적으로 나중에 보니 이런 질서가 있더라는 겁니다. 가령 사막에서 언덕을 피하다보니 꼬불꼬불한 길이 났는데, 그게 꼬불꼬불하게 가려고 해서 나온 길은 아니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캐릭터 이야기만 합니다. 주인공을 꼭 벼랑 끝에 세워야 갈등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 성격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그게 아무리 사소해도 위기고 갈등이죠. 입체적으로 그 인물을 얼마나 잘 아느냐에 따라 어마어마한 갈등을 만들 수 있구요. 그 안에서 인물에 대한 무릎을 탁 칠만한 통찰이 나올 수 있는 거죠.”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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