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스티븐 부세미 같이 이름 있거나 친숙한 배우들이 작은 영화에 서포터를 자처하는 것처럼 상업적인 길을 걷고 있는 저도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다만 상업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작품이 아니라 관객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우려도 돼요.” 김민준은 주연을 맡은 영화 에 대해 솔직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깨끗한 호적밖에 없던 백수 청년 기석(김민준)이 급전이 필요해 위장결혼을 하고 그로 인해 연변 출신 쌍둥이 자매(곽지민 1인 2역)와 얽히는 소동극인 은 분명 완성도에서 아쉬움을 안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제 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둔 머리카락과 수염을 하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청하게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한심한 백수 기석을 연기하는 김민준의 모습은 MBC 의 재복이 그랬듯 묘한 익숙함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영화 의 후반작업 중 시나리오를 건네받아 휴식도 반납한 채 출연을 결정한 김민준 역시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어린 시절의 향수”를 꼽으며 “한국영화가 방화라고 불리던 시절의 작품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았던 국적이 불분명한 아시아 영화들, 작지만 메시지가 있던 그 영화들이 사춘기 이후의 제 시간을 지배했던 기억들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김민준은 지난 10년 동안 패션모델로 데뷔해 MBC 의 인상적인 주인공으로 강렬한 첫인사를 한 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다양한 역할을 경험했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모델 출신이라는 이름표가 안겨 준 세련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소위 ‘멋진 남자’를 연기할 기회가 많았지만 잘 재단된 수트로 감싼 김민준의 속살은 요령 없고 허술하고 그래서 때로는 한심하기까지 한 외골수,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어려서는 치열하게도 살아 봤는데 어느 순간 제가 있는 위치에 대해 관조하는 성향이 생기더군요. 한 발 비껴 있는 느낌이 들어요. 생물학적으로도 분명히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데 인위적으로 다듬어서 멋있는 부분만 보여줘야 하나 싶기도 해요. 무엇보다 정말 기가 차게 연기를 잘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역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진정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싫기보다 여전히 설레는 건 부산의 사설 시네마떼끄에 회원 가입을 하고 반지하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던 시절부터 불평, 불만을 털어놓다가도 작품을 끝내고 집에 있으면 다시 너무나 촬영 현장이 그리워지는 지금까지 변치 않는 영화에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민준이 추천한 다음 영화들은 그를 매혹시킨, 그리하여 연기자의 길로 그를 이끈 작품들이다.
1. (E.T. The Extra-Terrestrial)
1984년 | 스티븐 스필버그
“부모님 손을 잡고 극장에 처음 가서 본 영화예요.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라서 모든 아이들이 보러가는 영화였죠. 온갖 부가상품들도 인기였는데 저도 헬륨 풍선을 들고 보러간 기억이 있어요. 어린 소년에게 SF 장르라는 건 정말 문화적인 충격 그 자체였던데다 극장에서 엄청난 크기의 스크린을 마주하고 그 압도적인 위용에 얼어버렸던 기억이 나요.”

일행에 뒤쳐진 외계인이 숨어든 지구의 가정집에서 꼬마 엘리어트(헨리 토머스)와 만나고 그에게서 E.T.(Extra-Terrestrial)라는 이름을 얻는다.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한 뼘 더 성장한다. 낯선 이와의 만남이 주는 놀라움과 즐거움, 그와의 교감에서 배우는 기쁨과 감동, 그리고 슬픔이 자양분이 되는 법이다.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해도 대화할 수 있고 생체리듬을 공유하며 아픔까지 함께 하던 E.T.와 엘리어트의 우정이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2. (Hate)
1997년 | 마티유 카소비츠
“사춘기가 좀 지나서 봤던 영화인데 역시 굉장히 충격을 받은 작품이에요. 제가 사춘기를 보내던 당시 지배적이었던 홍콩 영화나, 방화라 불리던 한국 영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지 못한 정말 자유로운 느낌이 있었어요. 제 마음 속에 있던 반항심이랄까 울분 같은 것에 그대로 적중을 하는 것 같고 저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나와 같은 에너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죠. 아, 저런 게 영화구나, 저렇게 찍을 수 있구나 싶었어요.”배우로도 활동하는 마티유 카소비츠가 연출을 맡아 27세에 제 48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인종 차별과 소외 계층의 불만으로 폭동이 일어난 파리 외곽의 빈민촌을 무대로 유태계 프라아스인 빈츠, 아랍계 소년 사이드, 흑인 소년 위베르의 성난 하루를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는다.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소수민족 젊은이들에게 ‘증오 세대’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3. (Dr. Akagi)
2001년 | 이마무라 쇼헤이
“제 3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님이 직접 와서 무대 인사를 하셨는데 그 때 본인의 인생관, 직업관을 얘기하셨어요.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에 방사능 피폭과 여러 질병으로 인해 간이 아픈 사람들이 많았는데 감독님 아버지가 당시 본인도 성치 않은 몸으로 간 전문의 생활을 하다가 불우하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자신도 아버지처럼 류마티스염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완전히 공감할 수 없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일본이 항복을 눈앞에 둔 1945년, 한 섬마을에 간염 연구에 열성인 의사 아카기(에모토 아키라)가 있다. 그리고 아카기의 헌신적인 태도에 감화되어 그를 돕고자 하는 소녀 소노코(아소 구미코)를 비롯해 모르핀 중독자인 외과의사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네덜란드 병사 등이 함께 간염과의 싸움에 나선다. 간염으로 은유된 전쟁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영화다.
4. (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
2000년 | 짐 자무시
“당시에는 액션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백인만 떠올릴 때인데 처진 눈 꼬리에 어눌한 눈빛을 가진, 농구선수 샤키 오닐처럼 커다란 덩치의 흑인 배우 포레스트 휘태커가 액션을 하는데 그게 너무 슬프고 인상적이었어요. 걸음걸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는 것 같고 아, 저 사람은 뭔가가 있다 싶었어요. 그걸 담아낸 날카로운 크롬 필름이 주는 느낌과 음악도 대단했구요. 패션모델 일을 하면서 배우가 되고 싶던 시기였는데 ‘어떻게 찍었지? 배우가 아니라 카메라를 해야 하나? 음악을 해야 하나?’ 라면서 굉장히 고민을 하게 한 영화예요.”

사무라이의 길을 걷고자 하는 흑인 킬러 고스트 독(포레스트 휘태커)은 폐허가 된 빌딩 옥상에서 살며 모든 통신은 비둘기를 이용한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뉴욕 마피아의 졸개 루이(존 토미)에게 마치 사무라이가 주군을 섬기듯 충성을 맹세한다. 스토리보다 스타일에 방점이 찍히는 영화지만 짐 자무시 감독 특유의 은유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흥미로운 영화다.

5. (Prometheus)
2012년 | 리들리 스콧
“정말 많은 기대를 했던 터라 공교롭게도 과 시기가 겹쳤는데 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극장에 뛰어 가서 봤던 작품이에요. (웃음) 그것이 정답이다 아니다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라는 창조의 과정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욕망은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그렇다면 지금처럼 영화적인 기술에 있어 제한이 없는 시대에 왜 그걸 안 찍는 걸까, 지적 호기심이나 허영심을 뛰어 넘는 완성도로 만들어 줄 사람은 왜 없나 싶었는데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들어낸 거죠.”는 과 라는 불세출의 영화를 중심으로 SF는 물론 전쟁 영화와 사극, 로드무비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또 하나의 도전이자 성취로 기록될 영화다. 인류의 기원을 밝혀낼 단서를 찾아 나선 우주선 ‘프로메테우스 호’의 탐사 대원들을 통해 “우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미지의 세계가 주는 충격적 전율 속에 담아낸다.

최근 종영한 JTBC의 의 최은혁 역시 시작은 그의 외형과 이미지에 기댄 “전형적인 타입 캐스팅”이었다. 하지만 김민준은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의 헛헛한 삶”을 빤하지 않게 보여주고 싶었다. “호박 안에 있는 사슴벌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만 멋있게 가공해서 짠! 하고 다 보여주는 것보다 부드러운 융에 몇 만 번 문질러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느낌”이길 원했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세공했다. 이처럼 연기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은 김민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인 “소통”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자기주장이 되게 강한 편이에요. 얘기하면 뭐해, 해봤자 우리 직업엔 득이 안 돼 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가능한 얘기하는 편이에요. 물론 그 과정에서 와전되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오해도 받죠. 그래서 연결하면 생각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케이블 같은 게 있으면 인류가 얼마나 평화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웃음)” 편견과 오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원하는 건 자신을 똑바로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고 이는 뒤집어 생각하면 타인 역시 왜곡 없이 보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람들 개개인의 스토리는 다 영화거든요”라고 말하는 김민준에게 영화란, 그리고 연기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확률로 동시대에 살게 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과정이다. 과연 김민준이 탐구하는 이 소통의 방식에 대중은 어떻게 화답할까? 어쩐지 그의 앞으로의 행보에 묘한 기대감을 품게 된다.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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