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이후 매년 쉬지 않고 서너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작업해온 김정난을 거쳐 간 인물은 어림잡아도 50여명. 그 빽빽한 목록에서 SBS 박민숙은 현재, 가장 뜨거운 이름이다. 그러나 눈 밝지 않은 이들의 호들갑일 뿐인 ‘재발견’이라는 꼬리표는 그녀에게 실례다. ‘청담 마녀’ 이전에 더 마녀 같고 더 섬뜩해서 오영숙 작가로부터 “대본을 뛰어 넘는 연기”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던 양 부인(KBS )이 있었고, 박민숙보다 더 쿨한 ‘여자 어른’이었던 SBS 의 민선이 있었다. 거기에 각시탈 만큼이나 정체에 대한 미스터리를 불러일으킨 KBS 의 화경까지. 최근으로만 한정해도 이렇게 풍부한 필모그라피를 가진 그녀에게 은 어쩌면 시작일 뿐일지 모른다. 반갑게도 “이제는 연기다운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은 그 심증을 더 굳게 한다. ‘민숙 언니’만큼이나 든든한 ‘정난 언니’가 차분하게 한 걸음씩 걸어온 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대신 정성스레 쌓아 온 여배우들에게 바치는 ‘언니의 품격’ 첫 번째 주자, 김정난이다.
“어떻게 박민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민숙은 김정난이라는 배우에게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시기를 열어준 캐릭터다.
김정난: 박민숙은 굉장히 든든한 캐릭터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가 내 장르는 아니다. 원래 공포나 스릴러 같은 장르를 좋아해서 오죽하면 도 ‘청담마녀’라서 했다고 하겠나. (웃음) 박민숙은 사람들이 얘기 하고 싶은데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한방에 빵! 해소시켜줬던 것 같다. 박민숙의 명대사들에서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왜 공부해야 하지, 세상은 불공평한데’ 그럴 때 동협(김우빈)이에게 했던 “방금 니가 본 게 앞으로 니가 나올 세상이구, 돈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야” 이 한마디로 모든 것들이 설명되는 거다. 명료하고 멋진 캐릭터다. 시원시원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돈도 어떻게 써야할지 정확히 아는 여자. 쓸데없는 말 안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똑같이 가슴 아파하는 여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특히 여성 시청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 험난한 세상에서 박민숙 같은 언니가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만들었다.
김정난: 지금도 애들이 트위터로 고민 상담을 한다. ‘언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지하게 물어보니까 대답 안 할 수도 없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촌철살인을 던져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대충 말해줄 수도 없다. ‘언니, 수능이 80일 남았는데 어떻게 하죠’ 하는데 어떻게 대충 말하겠나. 그래서 한동안 머리를 쥐어짰다. 어떻게 하면 힘이 될 수 있는 말을 할까 고민 많이 했다. 실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이나 동료 배우들 사이에서도 언니일 텐데 김정난은 어떤 언니인가.
김정난: 잘해줄 땐 잘해주고, 잘못했을 땐 딱 꼬집는 스타일. 코디나 매니저들도 칭찬해줄 때는 정말 확실하게 칭찬해준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하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한다. 그런 게 뜨뜻미지근하면 상대방도 날 파악하는 게 힘들다.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싫어하는 게 어떤 건지를 파악해야 일하기 쉬운데, 그런 게 애매모호하면 실수가 더 많아진다.
자신의 감정 표현에 확실한 편인가 보다.
김정난: 표현도 확실하고 감정도 다양하다. 혈액형이 AB형이라 그런지 감정표현에 굉장히 충실하다. 감정노출증이라고 할 정도로. (웃음) 때로는 굉장히 날카롭고, 때로는 소녀 감성으로 돌변할 때도 있고, 냉소적일 때도 있고, 감정의 기복이 확실하다. 좋으면 남들 생각에는 ‘김정난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두방정 떨고, 괴로우면 한없이 우울해하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타협을 하게 되더라. 그래도 여전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잘 우는 편이다. 내가 우는 연기하는 걸 보고도 운다. (웃음) 모니터링하다가도 많이 울었다.
“좀 돌아가더라도 당당하게, 스텝 바이 스텝으로”
영화 의 정은은 아직 박민숙을 떠나지 보내지 못한 관객들에게 낯설 것 같다. 거침없는 박민숙과 다르게 과거의 상처에 메여있는 폐쇄적인 인물이다.
김정난: 정은은 너무 어려운 역할이었다. 설명이 거의 없고 숨겨진 게 많아서 표현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캐릭터보다도 쉽지 않았다. 선주(박진희)나 소라(박지윤)에 비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모호하면서 위태로운 여자랄까. 지금도 100퍼센트 그 인물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준비하면서 인물의 전사를 생각하면서 정보를 많이 모으려고 노력한다. 학교에서 배웠듯이 베이직하게 배경부터, 가족, 습관 이런 것들을 유추 해본다.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정보들이 나오고, 다른 사람들의 대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크게 어렵진 않은데 정은은 주어진 상황이 몇 가지밖에 없었다. 그래도 감독님이 여자라서 그런지 영화에는 사춘기 소녀들의 섬세한 심리, 남자는 이해 못하는 여자들의 심리가 정말 잘 나와 있어서 좋았다. 안 그래도 샤이니의 팬이라거나 트위터 사진에서 발견되는 리본 머리핀 같은 걸 보면 여전히 소녀의 마음을 가진 것 같다.
김정난: 소녀적인 취향을 가진 것도 있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걔네들이랑 하도 대화를 해서 그런지 말버릇도 좀 그렇게 됐고. (웃음) 터키쉬 앙고라랑 샴 고양이 부부랑 새끼까지 해서 한 가족이다. 한동안은 너무 바빠서 부모님께 보냈는데, 부모님들도 워낙 동물을 좋아하셔서 나한테 다시 안 보내려고 한다. 고양이한테 집착하지 말고 나가서 남자를 만나라고 하시지. 샤이니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원래 샤이니보다 먼저 지었던 이름이다. 샤인이라는 이름을 쉽게 샤이니로 불렀다. 그래서 샤이니를 보면서 운명인가! 하면서 좋아했다. (웃음) 요즘은 샤이니 좋아한다고 너무 말하고 다녀서 항상 샤이니 팬들을 의식한다. 주책이라 그러면 어떡하지, 아이돌 팬은 무섭다던데. 그래도 ‘언니도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줄 서세요’이런 분위기라 다행이다.
최근 인터뷰들을 보면 데뷔 초에는 오히려 어린 나이임에도 소녀라기보다는 강단이 있었던 것 같다. 불합리한 제작 환경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고, 신인배우로서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김정난: 진짜 겁이 없었다. 원래부터 좀 강한 데가 있긴 하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뭐든 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겠다는. 특히 그 당시에는 승부욕도 엄청 났고, 순수하게 연기가 하고 싶어서 갔는데 현장 분위기는 그런 게 아닌 거다.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하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많이 봤다. 자존심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그래도 그런 게 다 돌이켜보면 소중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렇게 상처받았던 것도 다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없었으면 상처에 무뎌지지도 않았을 거니까.
KBS 으로 큰 인기를 얻은 직후, 일을 쉬면서 연기를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카메라 앞에 서게 만들었던 건 무엇이었나.
김정난: 전공이 연극영화니까 학교에서도 워크숍 공연을 하고, 논문 쓰려고 공연 보러 다니는데 무대에 서 있는 배우들을 보면 미치겠는 거다. 연기 하고 싶어서. ‘저기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계속 그런 자극을 받는데, 도저히 연기를 안 하고는 못살겠더라. ‘결국에 갈 길은 이거밖에 없구나’라는 결론을 내린 순간, 나머지 것들은 그냥 다 내가 넘어야 하는 산이 되었다. 결론을 내린 이후에는 슬럼프가 없었나.
김정난: 좀 돌아가더라도 당당하게, 스텝 바이 스텝으로 차분히 가자, 이렇게 생각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쭉 갈 수 있었다. 이후로는 딱히 슬럼프는 없었다. 물론 사람들한테 무시당한 적은 있다. (웃음) 한동안 단막극을 열심히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단막극 하는 배우들에 대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잘 나가는 배우들은 안 한다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또 단막극을 하면서 여러 가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때 많이 훈련이 됐고. 그런데 어느 날 방송국에서 지나가던 분이 “어이, 단막극 전문배우” 이러시더라. 상처 받기도 했는데, 그때뿐이었다.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여배우한테는 나이를 먹는 게 두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드라마, 리포터, 예능 프로그램까지 20대를 정신없이 보냈다.
김정난: 치열하게 달렸다. 20대가 너무 치열해서 서른 살이 언제 오나 손꼽아 기다렸다. 지치고 힘들더라. 슬럼프도 왔었고, 사랑에 실패도 해보고 여러 가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시간이 정말 안 갔다. 그래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는 살았던 것 같다.
왜 그렇게 30대를 간절하게 바랐나.
김정난: 30대가 되면 안정이 될 줄 알았다. 실제로도 20대 때보다는 안정이 됐는데,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별 할 말이 없다. (웃음) 쉬지 않고 작품을 했다. 다만 39살이 되면서 좀 힘들었다. 29살 때하고, 39살 때하고는 참 많이 달랐다. 29살 때는 빨리 서른이 되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전혀 불안함이 없었다. 오히려 기뻤다. 그런데 39살 때는 좀 우울하더라.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는데 나이 때문도 아니고, 무엇 때문도 아닌데 왠지 그랬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더라. 받아들이고 나니까 편하고 좋다. 이제는 연기다운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배우한테는 나이를 먹는 게 절대 두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을 가진 이로서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김정난: 마사지도 받고 관리도 한다. 그래도 눈빛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속일 수가 없다. 그 눈이 인생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탱탱한 얼굴을 가져도 눈빛과 말투와 몸짓에서 나이가 다 나온다. 그래서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연기를 하지 않아도 어떤 여자라도 나이를 먹으면 눈빛이 깊어진다. 사물을 볼 때 좀 더 다른 의미를 갖고 보는 거다. 나 역시도 눈빛이 좀 그윽해진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요즘에는 나이를 잊고 지내긴 한다. 마흔 되기 전까지는 나이를 세면서 살았는데 순간 내가 마흔인지, 마흔하나인지, 둘인지 헷갈린다. 안 세게 되더라. 사랑하는 일에 빠져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덜 외롭다. 물론 남자가 있으면 더 행복하겠지. 하지만 없는데! (웃음) 그렇다고 지금 불행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 스스로 자꾸 외롭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즐거운 걸 찾지 않고 외롭다는 생각만 하면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세상이 달라졌고, 재미있는 것도 너무 많고, 의미 있는 것도 많지 않나.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어떻게 박민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민숙은 김정난이라는 배우에게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시기를 열어준 캐릭터다.
김정난: 박민숙은 굉장히 든든한 캐릭터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가 내 장르는 아니다. 원래 공포나 스릴러 같은 장르를 좋아해서 오죽하면 도 ‘청담마녀’라서 했다고 하겠나. (웃음) 박민숙은 사람들이 얘기 하고 싶은데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한방에 빵! 해소시켜줬던 것 같다. 박민숙의 명대사들에서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왜 공부해야 하지, 세상은 불공평한데’ 그럴 때 동협(김우빈)이에게 했던 “방금 니가 본 게 앞으로 니가 나올 세상이구, 돈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야” 이 한마디로 모든 것들이 설명되는 거다. 명료하고 멋진 캐릭터다. 시원시원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돈도 어떻게 써야할지 정확히 아는 여자. 쓸데없는 말 안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똑같이 가슴 아파하는 여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특히 여성 시청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 험난한 세상에서 박민숙 같은 언니가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만들었다.
김정난: 지금도 애들이 트위터로 고민 상담을 한다. ‘언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지하게 물어보니까 대답 안 할 수도 없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촌철살인을 던져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대충 말해줄 수도 없다. ‘언니, 수능이 80일 남았는데 어떻게 하죠’ 하는데 어떻게 대충 말하겠나. 그래서 한동안 머리를 쥐어짰다. 어떻게 하면 힘이 될 수 있는 말을 할까 고민 많이 했다. 실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이나 동료 배우들 사이에서도 언니일 텐데 김정난은 어떤 언니인가.
김정난: 잘해줄 땐 잘해주고, 잘못했을 땐 딱 꼬집는 스타일. 코디나 매니저들도 칭찬해줄 때는 정말 확실하게 칭찬해준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하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한다. 그런 게 뜨뜻미지근하면 상대방도 날 파악하는 게 힘들다. 상대방이 내가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싫어하는 게 어떤 건지를 파악해야 일하기 쉬운데, 그런 게 애매모호하면 실수가 더 많아진다.
자신의 감정 표현에 확실한 편인가 보다.
김정난: 표현도 확실하고 감정도 다양하다. 혈액형이 AB형이라 그런지 감정표현에 굉장히 충실하다. 감정노출증이라고 할 정도로. (웃음) 때로는 굉장히 날카롭고, 때로는 소녀 감성으로 돌변할 때도 있고, 냉소적일 때도 있고, 감정의 기복이 확실하다. 좋으면 남들 생각에는 ‘김정난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두방정 떨고, 괴로우면 한없이 우울해하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타협을 하게 되더라. 그래도 여전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잘 우는 편이다. 내가 우는 연기하는 걸 보고도 운다. (웃음) 모니터링하다가도 많이 울었다.
“좀 돌아가더라도 당당하게, 스텝 바이 스텝으로”
영화 의 정은은 아직 박민숙을 떠나지 보내지 못한 관객들에게 낯설 것 같다. 거침없는 박민숙과 다르게 과거의 상처에 메여있는 폐쇄적인 인물이다.
김정난: 정은은 너무 어려운 역할이었다. 설명이 거의 없고 숨겨진 게 많아서 표현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캐릭터보다도 쉽지 않았다. 선주(박진희)나 소라(박지윤)에 비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모호하면서 위태로운 여자랄까. 지금도 100퍼센트 그 인물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준비하면서 인물의 전사를 생각하면서 정보를 많이 모으려고 노력한다. 학교에서 배웠듯이 베이직하게 배경부터, 가족, 습관 이런 것들을 유추 해본다.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정보들이 나오고, 다른 사람들의 대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크게 어렵진 않은데 정은은 주어진 상황이 몇 가지밖에 없었다. 그래도 감독님이 여자라서 그런지 영화에는 사춘기 소녀들의 섬세한 심리, 남자는 이해 못하는 여자들의 심리가 정말 잘 나와 있어서 좋았다. 안 그래도 샤이니의 팬이라거나 트위터 사진에서 발견되는 리본 머리핀 같은 걸 보면 여전히 소녀의 마음을 가진 것 같다.
김정난: 소녀적인 취향을 가진 것도 있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걔네들이랑 하도 대화를 해서 그런지 말버릇도 좀 그렇게 됐고. (웃음) 터키쉬 앙고라랑 샴 고양이 부부랑 새끼까지 해서 한 가족이다. 한동안은 너무 바빠서 부모님께 보냈는데, 부모님들도 워낙 동물을 좋아하셔서 나한테 다시 안 보내려고 한다. 고양이한테 집착하지 말고 나가서 남자를 만나라고 하시지. 샤이니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원래 샤이니보다 먼저 지었던 이름이다. 샤인이라는 이름을 쉽게 샤이니로 불렀다. 그래서 샤이니를 보면서 운명인가! 하면서 좋아했다. (웃음) 요즘은 샤이니 좋아한다고 너무 말하고 다녀서 항상 샤이니 팬들을 의식한다. 주책이라 그러면 어떡하지, 아이돌 팬은 무섭다던데. 그래도 ‘언니도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줄 서세요’이런 분위기라 다행이다.
최근 인터뷰들을 보면 데뷔 초에는 오히려 어린 나이임에도 소녀라기보다는 강단이 있었던 것 같다. 불합리한 제작 환경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고, 신인배우로서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김정난: 진짜 겁이 없었다. 원래부터 좀 강한 데가 있긴 하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뭐든 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겠다는. 특히 그 당시에는 승부욕도 엄청 났고, 순수하게 연기가 하고 싶어서 갔는데 현장 분위기는 그런 게 아닌 거다.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하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많이 봤다. 자존심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그래도 그런 게 다 돌이켜보면 소중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렇게 상처받았던 것도 다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없었으면 상처에 무뎌지지도 않았을 거니까.
KBS 으로 큰 인기를 얻은 직후, 일을 쉬면서 연기를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카메라 앞에 서게 만들었던 건 무엇이었나.
김정난: 전공이 연극영화니까 학교에서도 워크숍 공연을 하고, 논문 쓰려고 공연 보러 다니는데 무대에 서 있는 배우들을 보면 미치겠는 거다. 연기 하고 싶어서. ‘저기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계속 그런 자극을 받는데, 도저히 연기를 안 하고는 못살겠더라. ‘결국에 갈 길은 이거밖에 없구나’라는 결론을 내린 순간, 나머지 것들은 그냥 다 내가 넘어야 하는 산이 되었다. 결론을 내린 이후에는 슬럼프가 없었나.
김정난: 좀 돌아가더라도 당당하게, 스텝 바이 스텝으로 차분히 가자, 이렇게 생각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쭉 갈 수 있었다. 이후로는 딱히 슬럼프는 없었다. 물론 사람들한테 무시당한 적은 있다. (웃음) 한동안 단막극을 열심히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단막극 하는 배우들에 대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잘 나가는 배우들은 안 한다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또 단막극을 하면서 여러 가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때 많이 훈련이 됐고. 그런데 어느 날 방송국에서 지나가던 분이 “어이, 단막극 전문배우” 이러시더라. 상처 받기도 했는데, 그때뿐이었다.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여배우한테는 나이를 먹는 게 두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드라마, 리포터, 예능 프로그램까지 20대를 정신없이 보냈다.
김정난: 치열하게 달렸다. 20대가 너무 치열해서 서른 살이 언제 오나 손꼽아 기다렸다. 지치고 힘들더라. 슬럼프도 왔었고, 사랑에 실패도 해보고 여러 가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시간이 정말 안 갔다. 그래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는 살았던 것 같다.
왜 그렇게 30대를 간절하게 바랐나.
김정난: 30대가 되면 안정이 될 줄 알았다. 실제로도 20대 때보다는 안정이 됐는데,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별 할 말이 없다. (웃음) 쉬지 않고 작품을 했다. 다만 39살이 되면서 좀 힘들었다. 29살 때하고, 39살 때하고는 참 많이 달랐다. 29살 때는 빨리 서른이 되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전혀 불안함이 없었다. 오히려 기뻤다. 그런데 39살 때는 좀 우울하더라.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는데 나이 때문도 아니고, 무엇 때문도 아닌데 왠지 그랬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더라. 받아들이고 나니까 편하고 좋다. 이제는 연기다운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배우한테는 나이를 먹는 게 절대 두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 서는 직업을 가진 이로서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김정난: 마사지도 받고 관리도 한다. 그래도 눈빛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속일 수가 없다. 그 눈이 인생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탱탱한 얼굴을 가져도 눈빛과 말투와 몸짓에서 나이가 다 나온다. 그래서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연기를 하지 않아도 어떤 여자라도 나이를 먹으면 눈빛이 깊어진다. 사물을 볼 때 좀 더 다른 의미를 갖고 보는 거다. 나 역시도 눈빛이 좀 그윽해진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요즘에는 나이를 잊고 지내긴 한다. 마흔 되기 전까지는 나이를 세면서 살았는데 순간 내가 마흔인지, 마흔하나인지, 둘인지 헷갈린다. 안 세게 되더라. 사랑하는 일에 빠져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덜 외롭다. 물론 남자가 있으면 더 행복하겠지. 하지만 없는데! (웃음) 그렇다고 지금 불행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다. 스스로 자꾸 외롭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즐거운 걸 찾지 않고 외롭다는 생각만 하면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세상이 달라졌고, 재미있는 것도 너무 많고, 의미 있는 것도 많지 않나.
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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