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촬영, 업로드. 해가 지는 에펠탑을 등지고 창가에 걸터앉은 CF 속 남자에겐 긴말이 필요 없었다. 세 개의 단어와 한 번의 미소. 그렇게 안재현은 TV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인식시켰다. 쌍꺼풀 없이 날렵하게 빠진 눈과 올곧은 콧날은 깎아놓은 것 같다는 관용어보단 단정하게 다듬어졌다는 표현이 어울리고, 그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다. 어쩐지 길게 말하는 법을 모를 것 같은 인상이지만, 실제로의 그가 인상과 정반대라는 건 15초만 마주하고 있어도 알 수 있다. 직접 챙겨 입은 의상을 가리키며 “예쁜가요?”라고 묻거나 “점심은 드셨어요?”라고 염려할 줄 아는 다정다감함은 안재현의 첫인상을 단번에 역전시킨다. 심지어 “제가 신나면 말을 더듬거든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게 너무 기뻐서 말을 많이 하고 싶은데, 억누르느라 힘들었어요”라고 해맑은 고백까지 하다니, 온순하기 짝이 없는 남자다.

“인생의 모토가 평화”

“인생의 모토가 평화”라는 그가 유일하게 전력을 불태우는 건 본업인 모델이다. 아카데미를 수료했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었고, 뒤늦게 신인상을 받으며 가까스로 들어선 길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 과정 자체가 힘들었다기보다는 ‘나중에 얼마나 잘 되려고 지금 이렇게 일이 안 풀리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어요.” 고통을 담보로 성장하는 것은 안재현의 방식이 아니다. 그는 단지 “나쁜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을 뿐이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에머슨의 책에서 봤을 거예요. 모든 전쟁이나 가난, 슬픔은 생각 자체에서 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쁜 생각을 아예 차단해야 하는 거예요.” 삶에서 부정적인 말들을 지워버린 덕분인지, 그는 사소한 것에서도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모델로서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는 순간에 대해 “작업한 결과물을 보고 ‘와, 실물보다 훨씬 더 잘 나왔다’라고 생각해요. 물론 사진작가님이 컴퓨터로 수정은 하시겠지만”이라고 다소 엉뚱하고도 단순한 답을 내놓는 것처럼.

성실한 낙천주의자의 내일

하지만 그 바탕에 꾸준한 성실함이 없었더라면, 그의 낙천주의는 대책 없는 긍정에 그쳤을 수도 있다. 비단 상황을 가정해서 워킹 연습을 해보고, 부족한 점을 거듭 고민했던 모델 데뷔 직전의 노력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어릴 적부터 몸에 배어 있던 성실함이 그를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시험은 꼴찌였는데, 내신은 1등이었어요. 숙제를 다 해갔거든요. 반장이 ‘재현아, 대학 갈 생각 없으면 내신은 조금만 적당히 하면 안 될까?’라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웃음) 그런데 그렇게 못 하겠더라고요. 저는 수업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한 거니까요.” 어떤 학생이었느냐는 질문 하나에도 구체적인 답변을 차근차근 덧붙이는 태도조차 그의 성실함을 증명한다. 무엇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는 사람이 결국 목표를 이루어내는 건 정해진 귀결인 셈이다.

이토록 매력적인 청년을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보고 싶은 건 그래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델 일에 푹 빠져있는 안재현은 “솔직히 객관적으로 볼 때 제가 연기엔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라며 작게 웃는다.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 그의 부연 설명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얼마 전 공자의 를 읽었는데,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하면 파급효과가 일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모델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한다면, 목소리가 많이 나오는 CF 같은 걸 찍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역이 더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 모델인데 목소리도 좋네? 그럼 CF에 써보자!’ 이렇게 될 수 있는 거니까. 아직까지는 제가 시작한 일의 값어치를 좀 더 올리는 데 주력하고 싶어요.” 그 순하디순한 마음 어디에 이런 고집이 숨어있었던 것일까. 정말, 긴 말로도 끝내 설명할 수 없는 남자다.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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