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납뜩이가 21세기의 은시경을 만난다면 제일 먼저 이 말부터 꺼내지 않을까? “어떡하지 너?” 적당히 느물느물한 납뜩이(영화 )에게 지나치게 정답만을 얘기하는 은시경(MBC )은 답답해 미칠 지경일 테다. 이재하(이승기)도 말하지 않았던가. “넌 맨날 웃자고 하는 말에 정색을 하고 지랄이냐”라고. 아무리 캐릭터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 배우라지만, 두 남자를 동시에 소개하게 된 조정석은 공교롭게도 관객을 기만한 남자가 됐다. 극장에서 오동통한 몸매에 힙합바지, 무스로 빗어 넘긴 5:5 올백스타일의 납뜩이가 승민(이제훈)의 연애상담을 해주며 웃음을 담당할 동안, TV에서는 슬림한 몸매에 제복과 통기타를 장착한 은시경이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여심을 흔드는 식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처음 보는 이 남자 조정석의 진짜가 무엇인지 헷갈려할지도 모른다.

“납뜩이는 즐겁고 장난스러운 일상의 조정석에서 더 많이 나간 캐릭터였지만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에 있어서만큼은 저와 많이 닮았어요. 힙합바지에 맨투맨 티셔츠, 노티카 잠바까지. 고등학교 때 사진 보면 영화랑 똑같아요.” 그래서일까.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납뜩이의 행동과 대사는 그야말로 ‘납득’이 됐고, 영화는 어설펐던 첫사랑의 기억만큼 주위에 가득했던 나만의 납뜩이를 떠올리게 했다. 은시경 역시 마찬가지다. 8년간 밝고 건강한 의 짐부터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할 줄 알았던 을 거쳐 모성애를 자극하던 의 모리츠까지 뮤지컬 무대에서 배운 “나 할 것도 못하면서 다른 거 신경 쓰면 안 된다”는 마인드가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고 진중한 인물로 발현된 셈이다. 그렇게 제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 조정석이 에서 직접 선곡해 부른 이문세의 ‘소녀’도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했던” 학창시절에서 꺼내온 그의 또 다른 조각이다. “이문세 씨 노래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소녀’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기도 재밌고 보는 사람도 좋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노래를 통해서 은시경의 부드러운 면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래에 소개하는 조정석이 ‘90년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노래들’은 앞으로 그가 보여줄 새로운 얼굴의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1.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91년,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청 히트했던 곡이었어요. 노래방 가면 늘 불렀었는데, 당시에는 가사보다는 멜로디 라인과 목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 탁한 목소리가 어린 제가 듣기에도 가슴을 울렸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좀 더 크고 사랑을 하게 되면서 이 노래가 더 좋아졌던 것 같아요. 그때는 가사를 음미하게 되었던 것 같고. 잊지 못하는 곡이 됐죠.” 때때로 명곡은 리메이크 가수의 수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 이별노래 故 김현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전인권, JK 김동욱, 김연우, 터보, 럼블피쉬 등 장르와 성별을 뛰어넘어 다양한 가수들의 목소리로 여전히 불리고 있다.
2. 강인원의
“90년대에는 집에 최신가요 책 같은 게 많았잖아요. 저희 집에도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김현식 씨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MBC 이 인기라서 주제곡 ‘아껴둔 우리 사랑을 위해’ 이런 곡들이 유행이라 친구들이 많이 불렀었죠. 근데 저는 학예회 때 강인원-권인하-김현식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불렀어요. 80년대에 나왔던 노래잖아요. 나이에 비해 성숙한 곡들을 많이 들었죠. (웃음)” 꾸밈없이 투명하고 깨끗한 곡의 느낌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제목을 꼭 닮았으며, 이 곡은 이후 이경영과 옥소리가 출연한 동명영화의 OST로도 쓰였다.

3. 전람회의
“영화 의 승민이처럼 저도 이 노래에 대한 추억이 있어요. 중학교가 남녀공학이었는데, 중1 때 친구들 중 유일하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서연이처럼 방송반이었고, 그 친구랑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기억의 습작’을 참 많이 들었어요. 정말 순수할 때라서 만나면 말도 잘 못하고 데이트도 몇 번 못했어요. 데이트라고 해봤자 떡볶이랑 핫도그 먹으러 다니는 거였지만. (웃음) 그래서 영화 보면서 소주 생각 참 많이 나더라고요. 며칠 전에는 촬영 끝나고 서울로 올라올 때 그 시절 노래들을 다 찾아서 들었다니까요. 쿨의 ‘한 장의 추억’, 김건모의 ‘혼자만의 사랑’,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 (웃음)”

4.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정말 대통령이었잖아요. 저도 너무너무 광팬이었어요. 1집이 엄청 잘 되고 나서 2집에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던 때였는데, 처음 ‘하여가’를 듣고는 실망을 많이 했었어요. 멜로디 자체도 생소하고 어려운데다가 꽹과리도 나오고 그래서 희한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곡들을 너무 좋아하게 됐고, 지금까지도 서태지와 아이들 모든 앨범 중에서 2집을 가장 좋아해요. ‘하여가’ 뿐 아니라 ‘우리들만의 추억’, ‘수시아’, ‘죽음의 늪’까지 수록되어 있는 모든 곡이 다 좋아요.” 90년대 단 한 번이라도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지난 3월 23일은 로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20주년이었다.
5. 여행스케치의
“어릴 적에는 저도 친구들이랑 전영록, 박남정, 이은하 씨 춤을 따라 추고 그랬었어요. 기억 니은 춤 같은 거. 고3이었던 98년에는 H.O.T.랑 젝스키스 같은 댄스음악이 활발하던 때였는데, 오히려 저는 기타로 대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당시 여행스케치 음악을 많이 들었던 거 같아요. 특히 ‘별이 진다네’는 도입부에 개 짖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게 들리는 데 그게 꼭 시골 마을 같았어요. 그래서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시적인 가사와 아날로그한 사운드로 많은 사랑을 받은 대표 포크그룹 여행스케치는 지난 2008년 새로운 레게리듬 위에 89년에 발표된 데뷔곡 ‘별이 진다네’의 내용을 패러디한 ‘별이 뜬다네’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조정석은 전혀 다른 매력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게 된 현재를 “금상첨화”라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스포트라이트에 들뜨기보다는 자신의 더 큰 미래를 차분히 준비할 뿐이다. 이는 아마도 영화를 좋아해 연기를 하고 싶었던 이가 10년 만에 알게 된 기회의 짜릿함 때문일 것이고, 그런 만큼 자신에게 찾아온 이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쓰는 용어들은 생소하지만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돼서 지금은 카메라 연기가 부담되기보다는 너무 신나요. 익사이팅한 마음이 없었으면 배우려는 생각도 없었을 거고 뛰어들지도 못했을 거예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 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조정석.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글. 장경진 three@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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