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느낌, 괜찮은데요?” 촬영 도중 “창문에 뭐가 묻은 것 같다”는 한 스태프의 말에 박현석 감독은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촬영 전부터 헛기침이 나올 정도로 스모크 효과를 낸 덕분에 흡사 취조실을 연상케 하는 사채사무실, 그리고 그 곳에서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거액의 돈을 빌리는 한 남자. 게다가 결코 조명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연신 “너무 밝다, 밝아”라고 외치는 스태프들. 지켜보는 사람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장면이니, 창문에 묻은 먼지가 방해꾼이 아닌 반가운 손님 대접을 받을 수밖에. 40대 남자 재훈(손현주)이 사채업을 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돈을 빌리는 이 장면은 비록 짧지만, 가족을 위해 남들에게 고개 숙이며 아쉬운 부탁을 하는 이 시대 모든 가장들의 외로움을 함축하고 있다. “극 중 재훈의 모습에서 가장들의 축 처진 어깨가 떠올랐다”는 손현주의 말이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이다.
인생을 스포츠에 비유한다고 했을 때 가장 흔한 종목은 아마도 마라톤일 것이다. 굳이 마라톤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이 꼽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KBS ‘텍사스 안타’ 편은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소시민과 스포츠 도박 소재를 한 데 엮어 ‘스포츠의 완성은 스포츠 도박’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혼 후 두 딸에게 제대로 된 아빠 대접도 받지 못하고 늘 사채 빚에 시달리는 재훈은 어느 날, 자신의 처지처럼 희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 보이는 20대 승현(유건)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제안을 듣게 된다. “한방을 노리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손현주의 말을 기억하면서, 내일 밤 11시 15분 KBS2에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두 남자의 최후를 함께 지켜보도록 하자.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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