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심은경을 부르는 이름은 각각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MBC 의 헥토파스칼 킥 소녀로, 누군가는 MBC 의 수지니로, 누군가는 SBS 의 어린 진이로, 누군가는 영화 의 신들린 아이 소진으로, 또 누군가는 SBS 의 원인이로 이 소녀를 기억한다. 어린 시절, 지나치게 수줍음을 타는 성격을 고치기 위해 연기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7년 동안 근 스무 편의 작품에 출연한 심은경은 브라운관 안에서 조금씩 자라 어느새 열일곱이 되었다.
“어릴 때는 대본 외우고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작년부터는 연기에 새로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제 나름대로 캐릭터를 연구해보고 준비도 여러 가지 해 가요.” ‘누군가의 아역’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배역을 연기하게 되면서 한층 더 생각이 깊어진 이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은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또렷한 목소리를 낸다. 예쁘다는 말과 멋있다는 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보라는 물음에 “둘 다 좋지만 그냥, 자기 색깔이 있다는 말이 더 좋아요”라고 대답하는 방식은 심은경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9월 개봉 예정인 장진 감독의 에서도 심은경은 흥미로운 캐릭터를 맡았다. “김연아 선수의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쓴 ‘김여나’라는 애에요. ‘우이모’라고 ‘우울증을 이겨내는 모임’에 속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려고 열성을 다 하고 있을 때 대체 머리 속에 뭐가 들었나 싶게 혼자 관심 없어 하는 신기한 애에요.” 사실 어떤 성인 못지않게 분명한 취향과 솔직한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확실히 심은경은 ‘신기한’ 십대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피규어 가게 주인도 좋을 것 같고, 만화 가게 차려서 동네 애들한테 연체료도 가끔 빼 주면서 살면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영화감독이 되고 싶기도 해요. 처음에는 그냥 막연히 멋져 보여서 동경했는데 언젠가부터 뭔가에 소외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영화로 하고 싶어졌어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영화로 만들어 관객과 대화하는 것만큼 재밌고 멋진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때로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깊은, 그러나 그것이 어른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열일곱 심은경 그 자체임이 더욱 놀라운 그가 자신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만든 영화들을 추천했다.
1. (All About Lily Chou Chou)
2001년 | 이와이 ㅅㅠㄴ지
“이와이 ㅅㅠㄴ지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은 진짜 여러 번 봤어요. 사실 영화의 음악이나 영상은 너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데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메시지는 굉장히 파격적이에요. 어른들은 좋을 때라고 말씀하시지만 십대 시절에도 나름대로 힘든 시간이 많은데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여러 가지 고통을 겪어요. 주인공의 그런 성장통이 지금 십대인 제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어요.”평범한 열네 살 소년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의 일상은 친구였던 호시노(오시나리 슈고)가 어느 날 반 친구들을 이끌고 자신을 이지메 시키면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한다. 유이치의 첫사랑 쿠노(이토 아유미)는 성폭행을 당하고 유이치를 좋아하는 츠다(아오이 유우) 역시 원조교제를 강요받으면서 소년 소녀의 삶은 지옥으로 치닫는다. 유이치는 좋아하는 가수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를 만들어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잔인하다. 이와이 ㅅㅠㄴ지의 대표작 나 화사한 분위기의 청춘물 와는 전혀 다른 어두움을 그리고 있지만 감독은 “유작을 고르라면 이 작품으로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2. (Paranoid Park)
2007년 | 구스 반 산트
“이 작품도 십대의 성장통에 대한 영화에요. 한 소년이 아주 우연히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비밀로 혼자 감추면서 살아가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끝없는 고통에 사로잡히는 거죠. 주인공이 원래 배우가 아니라 평범한 학생이었다가 캐스팅돼서 처음 연기를 하게 된 건데, 그 자연스런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이 아름다워 보였다면 이 영화의 영상이나 분위기는 차갑다는 느낌이에요. 구스 반 산트 감독님의 영화는 처음 본 건데 예전 작품들도 더 찾아보고 싶어요.”
포틀랜드에 사는 십대 스케이트 보더 알렉스(게이브 네빈스)는 거칠기로 이름난 공원 ‘파라노이드 파크’에 가서 보드를 타는 것으로 가족, 연애를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많은 고민들을 지워버리려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알렉스는 아주 우연한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자수 대신 침묵과 회피를 택한 그의 삶은 전보다 더한 고통 속에 빠져든다.3. (Akira)
1988년 | 오토모 가츠히로
“임필성 감독님이 에서 늙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을 떠올리셨다는 얘기를 듣고 봤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작품인데 그 당시에는 이렇게 스피디한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내용도 파격적인 거였대요. 작품을 보면 인류의 미래에 대해 경고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면에서 더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기도 해요. 보면서 많은 걸 느끼게 되고, 끝나고 나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 같은 게 느껴져서 더 기억에 많이 남아요.”
3차 대전 후 재건되어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수도 네오도쿄, 과학은 극적인 발달을 이루었지만 전쟁으로 가정과 학교는 이미 붕괴되었고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고 비정해진다. 폭주족이었던 테츠오는 우연히 초능력 개발 실험체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은 뒤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깨닫게 되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린다. 일본 애니메이션 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수작.
4. (The Dark Knight)
2008년 | 크리스토퍼 놀란
“나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도 좋아하지만 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상업성에 치우쳤다는 고정관념을 깨 준 영화였어요. 내용이나 미국의 정치적 상황, 배우들의 연기력, 감독의 연출력이 다 모자라지 않게 잘 담긴 영화인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역시 조커에요. 이 영화를 통해 히스 레저라는 배우를 더 알게 된 것 같아요. 연기에 온 몸을 다 던지고, 또 영화 안에서는 히스 레저가 아니라 조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나도 언젠가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반성을 하게 만들기도 했어요.”범죄와 부정부패로부터 고담시를 지키려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은 경찰국의 짐 고든(게리 올드만), 정의감에 불타는 지방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와 의기투합해 범죄 조직을 완전히 소탕하기로 한다. 그러나 미치광이 악당 조커(히스 레저)의 광기 어린 범죄 행각은 배트맨마저 궁지에 몰리게 하고, 하비 덴트마저 큰 부상을 당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영웅의 승리와 쾌감을 넘어 고뇌와 갈등을 깊이 있게 파고든, 그러면서도 오락 영화만의 장점을 결코 잃지 않은 작품.
5. (Nobody Knows)
2004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정말 좋아하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영화에요.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울지도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때 묻지 않은 모습들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연기를 하는 저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주연 배우인 야기라 유아는 이 작품으로 최연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는데, 영화에서의 눈빛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나중에 결국 여동생이 죽은 뒤에도 아이들이 계속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더 슬프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영화는 제가 처음으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이에요.”
도쿄의 한 아파트에 젊은 엄마와 어린 4남매가 이사를 온다. 아이가 많다는 것이 알려지면 쫓겨난다는 이유로 엄마는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 것, 밖에 나가지 말 것’ 등의 규칙을 지키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열두 살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아) 앞으로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는 쪽지와 약간의 돈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면서 아이들의 진짜 비극은 시작된다. 계절이 바뀌고 전기와 수도마저 끊긴 집에서도 아이들은 꿋꿋하게 살아가지만 절망은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이 작품이 1988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사실 외로움은 어른에게도 피하고 싶은 감정이자 고통이다. 그러나 밝으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이 열 일곱 소녀는 “그래도 외로움을 겪는다는 건 저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해 주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을 좀 더 쌓으면 좋겠지만, 어른이 돼서도 지금과 별로 달라지지 않으면 좋겠어요”라는 심은경은 올 가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십대가 가기 전 평범한 학생으로 살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음악을 좋아하니까 밴드를 꼭 하고 싶구요, 친구도 많이 만들고 싶고,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해야죠.” 그러나 이 반짝이는 눈망울의 소녀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란 걱정은 일단 접어둬도 좋겠다. 심은경은 장진 감독의 다음 영화 을 비롯한 좋은 작품들과 방학을 이용해서라도 꾸준히 만날 예정이다.
글. 최지은 fiv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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