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인간이 되고자 했던 구미호의 소망이 산산이 부서진 이 전설은…” 매년 여름마다 찾아오는 ‘구미호’ 편은 이러한 내레이션과 함께 구미호의 최후를 보여주면서 막을 내렸다. 인간이 되는 방법은 각 편마다 차이를 보였지만, 스토리는 과거부터 내려오던 구미호 전설을 충실하게 담아냈고 구미호는 늘 섹시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렇게 구미호는 약 30년 동안 납량특집물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그리고 2010년, KBS 은 그 내레이션을 이야기의 끝이 아닌 시작으로 불러들였고, 많은 면에서 과거의 구미호 이야기를 뒤집었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구미호와 어떤 점이 다른지 비교해봤다.



우리가 알던 구미호 : 한 남자의 아내로 1000일 혹은 10년간 버림받지 않으면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남편 혹은 주변 사람들의 발설로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 과거 ‘구미호’ 편은 이 전설을 토대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구미호를 그렸다. 이야기의 시작은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줄 선량한 남편을 찾는 것이요, 그 끝은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구미호의 모습이다. 1부작으로도 충분히 다룰 수 있었던 짧은 스토리였다.
: (이하 )은 과거 ‘구미호’ 편이 끝난 시점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시 말해, 이미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가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식으로 스토리의 변주를 시도했다. 구산댁(한은정)과 딸 연이(김유정)의 우선순위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만 연이의 간을 노리는 윤두수(장현성)와 양부인(김정난)으로부터 온갖 구박과 핍박을 받으면서 모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고, 인간이라는 괴물을 향한 구산댁의 처절한 복수가 극 후반부를 채워나갔다. 구미호 이야기만으로 16부작을 이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알던 구미호 : 1977년 1호 구미호였던 한혜숙을 시작으로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 송윤아, 고현정, 노현희 그리고 최근 박민영과 전혜빈까지 역대 구미호는 당대 아름다운 여배우들이 독차지했던 역할로, 극 중에서 그들은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약하거나 섹시한 구미호로 분했다. 보수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을 내조하는 순종적인 아내든 섹시한 모습으로 남자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팜므파탈이든 지금까지 구미호의 이미지는 ‘여자’, 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긴 백발과 어깨가 훤히 드러난 한복, 종종 등장하는 목욕신 등은 구미호의 여성성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였다.
: 여성성 대신 모성애가 강하고, 남자보다 딸을 더 아끼는 구산댁은 누가 봐도 ‘여자’가 아닌 ‘어미’다.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라”며 후처 자리를 제안하는 윤두수처럼 구산댁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있을망정 먼저 남자의 사랑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딸을 위해서라면 절벽에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자신의 딸을 뺏어간 윤두수를 향해 칼을 겨누는 그녀의 모성애는 과거 구미호가 구축해놓은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한 몫 했다. 분장 면에서도 섹시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여우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역시 구미호의 여성성을 배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알던 구미호 : 구미호의 발톱이 잡귀를 쫓고, 간과 꼬리는 만병을 다스리며 여우구슬은 세상 모든 부귀영화가 저절로 찾아오게 만든다고 믿었던 인간들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불법여우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무병장수를 꿈꾸며 여우의 간을 삼킨 인간의 입가는 그들의 욕망만큼이나 진한 피로 물들었고,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려는 남자들의 표적 역시 비싼 값에 팔리는 구미호의 그것들이었다.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심이 수많은 구미호들을 무고한 희생양으로 만든 셈이다.
: 윤두수가 연이의 간을 노리는 건 병든 딸 초옥이(서신애)를 살리려는 강한 부성애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표면적으로는 각자 자신의 딸을 지키려는 윤두수의 부성애와 구산댁의 모성애가 주된 갈등축을 형성하지만, 윤두수를 향해 “내 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을 죽이는가”라는 구산댁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의 행동이 부성애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연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하인과 부인을 차례로 죽이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영역, 즉 딸 초옥이를 지키기 위해 최하위의 약자부터 공격하는 인간의 무자비한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억울하게 죽어나간 소수자들의 분노는 부메랑처럼 그에게 고스란히 돌아왔고, 결국 그가 지키고자 했던 공동체를 무너뜨린 건 정작 본인 자신이었다.


우리가 알던 구미호 : 1부작이 가진 짧은 시간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의 욕망이 강해서였을까. 명확한 이유를 꼽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지금껏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구미호는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인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구미호로 남을 것인가의 고민이었지, 근본적으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며 혼란에 빠지는 건 그간 구미호에게 허락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 “너희 모녀는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핍박과 고통을 받는다.” 만신(천호진)의 이 한마디는 인간 세상에 내려와 온갖 수모를 겪어야 하는 이유의 해답을 찾고 있던 구산댁과 얼굴에 털이 나고 손톱이 길어지는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 때문에 정규 도령(이민호)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연이를 향해 던진 결정타였다. 혼란에 빠진 그들의 모습은 흡사 영화 , , 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 역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인 힘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갈등하는 존재들이었다. 결국 는 단순히 인간이 되길 원했던 과거 구미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구 슈퍼히어로물에서 모티브를 차용해 만든 퓨전 구미호물이다.


우리가 알던 구미호 : 과거 구미호 이야기의 결말은 크게 두 가지였다. 구미호가 자신을 위협했던 인간에게 시원한 복수를 하거나 혹은 반대로 끝까지 인간으로부터 배신당한 희생양으로 남거나. 96년 구미호로 분했던 박상아는 인간이 되는 날을 열흘 앞두고 시어머니에게 정체가 발각되어 남편이 보는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2008년 박민영의 구미호는 억울하게 죽은 언니를 대신해 인간에게 복수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어쨌든 결말 이후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은 채 드라마의 엔딩 크레딧은 대부분 상대방을 향한 어느 한 쪽의 처참한 복수 위로 지나갔다.
: 연이와 구산댁은 끝내 인간의 손에서 차례로 죽음을 맞이했고, 저승에서나마 서로를 마음껏 어루만지고 안아볼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의 몸에 연이가 빙의했다는 거짓말도, 탕재로 둔갑한 여우피를 갖다 주는 눈속임도 모두 모른척면서 강한 모성애로 초옥을 키웠지만, 결국 그녀의 칼에 찔린 구산댁은 끝까지 핍박과 아픔을 견뎌야 했다. 고통스러운 건 인간 세상에 홀로 남은 초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떨군 구산댁을 향해 뒤늦게 “어머니”라고 부르짖는 초옥의 모습은 가 단지 복수를 위한 드라마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글. 이가온 thirteen@
편집. 장경진 thre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