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음악이나 연기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할 때가 굉장히 불편해요.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간 기분이라 해야 하나,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라는 고민처럼 김재욱은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결론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섣불리 단정 짓지 않고, 자아가 뚜렷한 사람이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도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김재욱과의 인터뷰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과정이라기보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에 가깝다. 그는 립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형태와 감각의 언어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거의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나이 때 모국어를 잘 못 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 같기도 해요.
김재욱 : 음… 너무 옛날 기억이긴 한데, 사실 아버지랑 형은 일어를 잘했고 어머니는 잘 못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어머니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굉장히 기이한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 대신 일본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한국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가서도 다른 친구들이 1 더하기 1을 배울 때 저는 가나다라를 시작했지만 그 나이 때는 빨리 배우니까요.
“밴드부에 들어가려고 고등학교에 갔어요”
한국 중고등학교의 엄격한 규율이나 획일적인 제도는 보통 학생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인데, 학교 다닐 때 두발이나 복장 규제를 비롯해 비합리적인 사안에 대해 “왜 그래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던진 편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충돌을 빚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에 이르기도 하는데 그 시간은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해요.
김재욱 : 한 번은 중학교 때, 차 타고 네 식구가 외식을 가던 도중 부모님께 “저는 고등학교를 안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원래 제 인생에 전혀 간섭을 안 하는 분인데 그 날 처음으로 “그래도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가는 게 어떻겠니” 라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이 나요. 그리고 고등학교에 가면 밴드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유였죠. 그걸 이미 알고 계셨어요?
김재욱 : 형이 서울 고등학교 밴드에서 베이스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서울고에 가서 그 밴드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단대부고로 배정을 받은 거예요. “제기랄, 나는 센세이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단대부고가 뭐야!” 했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보다 밴드에 들어가는 게 중요했던 것 같은데요?
김재욱 : 약간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단대부고에 다행히 각시탈이라는 전통 있는 밴드가 있었고, 거기 합격을 한 덕분에 학교를 계속 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대학에 갈 생각도 별로 안 했거든요. 무단결석으로 어머니 가슴에 대못 박은 적도 있고. 그렇게 착실한 학생은 아니었어요.
학교 밴드에 들어갈 때는 어떤 각오가 있었나요.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다던가.
김재욱 : 아니에요. 무조건 붙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붙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셨어요?
김재욱 : …네. (웃음)
오디션은 어땠나요?
김재욱 : 방과 후에 교실을 하나 빌려서 교탁 위에 서서 노래를 했어요. 무반주로. 보컬 오디션 응시자들이 쭉 뒤에 앉아 있다가 한 명씩 나와서 2, 3학년 선배들 앞에서 불렀죠. 누구 앞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노래하는 건 처음이라 엄청나게 긴장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모델로 런웨이에 처음 섰을 때도 그 때만큼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었죠”
모델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했는데, 지금이야 모델이 상당히 보편적인 직업군이 됐지만 그 때만 해도 고등학생 남자 모델은 아주 특이 케이스였을 것 같아요.
김재욱 : 그렇죠. 그 때만 해도 패션에 관심조차 없었고, 그냥 음악 하겠다며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당시 많았던 같은 잡지에 사진이 한 컷, 두 컷 들어가면서 시작했어요. 어쩌다 보니 일이 커졌는데, 사실 제가 무슨 아카데미를 수료한 것도 아니라 처음 쇼에 섰을 땐 워킹도 안 배운 상태였어요. 엉망이었죠. (웃음) 지금 생각하면 무슨 깡으로 했나 모르겠어요. 음악, 특히 록을 좋아하고 밴드를 하다 보면 오로지 음악만이 내 길이고 평생 직업이라는 결의가 생기는 경우도 많잖아요. 대학도 실용음악과로 갔고.
김재욱 : 고등학교 때까진 그랬던 거 같아요. 저 같은 사람이 정말 많겠지만,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맹목적으로 동경했거든요. 앨범 서너 장 내고 만 스물일곱에 죽었는데, ‘나도 앨범 세 장 내고 스물일곱에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심지어 가정이 너무너무 화목하다는 게 콤플렉스였던 시절도 있어요. ‘저런 삶을 살아야지 저런 음악, 저런 에너지가 나올 거야. 나한테 부족한 건 단지 그거야’ 라고 합리화시켜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었죠. (웃음)
그런데 음악이라는 게 특히,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재능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장르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도 해 보셨어요?
김재욱 : 너무나 예전부터 느껴왔어요. 단지 한 분야에 에너지를 쏟지 못해서 그렇다는 건 핑계인 것 같고, 그냥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일 뿐인데도 매달리는 거죠. 그러고 있을 때가 제일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제가 좀 더 어렸다면 절대 이런 얘길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걸 세상에 인정하는 순간 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슬아슬하고 팽팽하게 살아왔다면, 지금은 그보다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게 좋기도 하면서 싫기도 해요. 다 똑같아져 가나, 이렇게 고유의 색을 잃어가나 싶은.
“지금 갖고 있는 에너지로도 못한 게 너무 많아요”
하지만 남들이 잘 한다고 칭찬해주는 것보다 남이 뭐라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외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선택을 해온 것 같아요. 혹시 그렇게 살면서 ‘내가 결정한 일이지만 이렇게 사는 건 정말 피곤하고 힘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요.
김재욱 : 없어요.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게 못 했으면 오히려 훨씬 힘들었을 것 같아요. 누군가의 강요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지 튀어나온 못이 되기 싫어서 선택을 잘못 했으면 매일매일 괴로웠을 것 같아요. 그렇게 살고 싶진 않고. 사실 연예계라는 곳은 발을 들이고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는 순간부터 그 다음은 커리어를 위로 쌓아나가는 게 수순이잖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김재욱 씨가 활동해 온 방식은 인기나 실리적인 것들을 최대한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나 로 얻은 이미지도, 보통은 그걸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지 접으려고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미련 없이 두고 떠날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바탕에 있는 생각은 뭔가요. 이거 아니어도 죽지 않는다? 혹은 이거 아니라 다른 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김재욱 : 오히려 반대인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이렇게까지 집중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은 없어요. 한 1년 정도 전에 모델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누굴 가르치는 걸 못 하는 사람이지만 그냥 제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돈이나 명예 같은 걸 떠나 정말 자기 자신에게 정면으로 물어봤을 때 ‘더 이상 니 안에서 뽑아낼 거 없잖아’라는 답이 나오는 순간 그 일을 딱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한 학생이 굉장히 반발했어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왜 그렇게 혼자 멋있으려고 하세요?” 그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 같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삶의 주체가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거야말로 제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할 끈인 것 같아요. 그걸 놓는 순간 저는 그냥 부품이 될 것 같아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을 부품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밀어붙이는 시스템 안에서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만 해도 개인에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기도 하니까.
김재욱 : 네, 나이가 들면서 더 안정된 걸 추구하기도 하고, 지켜야 할 것들도 생기죠.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른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고 얘기하기엔 아직 저는 지금 갖고 있는 에너지로도 못한 게 너무 많아요. 이 말을 과연 제가 30대 후반에도 ‘나는 20대에 그랬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그 땐 내가 철이 없었다’고 창피해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거의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나이 때 모국어를 잘 못 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 같기도 해요.
김재욱 : 음… 너무 옛날 기억이긴 한데, 사실 아버지랑 형은 일어를 잘했고 어머니는 잘 못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어머니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굉장히 기이한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 대신 일본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한국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가서도 다른 친구들이 1 더하기 1을 배울 때 저는 가나다라를 시작했지만 그 나이 때는 빨리 배우니까요.
“밴드부에 들어가려고 고등학교에 갔어요”
한국 중고등학교의 엄격한 규율이나 획일적인 제도는 보통 학생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인데, 학교 다닐 때 두발이나 복장 규제를 비롯해 비합리적인 사안에 대해 “왜 그래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던진 편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충돌을 빚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에 이르기도 하는데 그 시간은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해요.
김재욱 : 한 번은 중학교 때, 차 타고 네 식구가 외식을 가던 도중 부모님께 “저는 고등학교를 안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원래 제 인생에 전혀 간섭을 안 하는 분인데 그 날 처음으로 “그래도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가는 게 어떻겠니” 라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이 나요. 그리고 고등학교에 가면 밴드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유였죠. 그걸 이미 알고 계셨어요?
김재욱 : 형이 서울 고등학교 밴드에서 베이스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서울고에 가서 그 밴드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단대부고로 배정을 받은 거예요. “제기랄, 나는 센세이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단대부고가 뭐야!” 했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보다 밴드에 들어가는 게 중요했던 것 같은데요?
김재욱 : 약간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단대부고에 다행히 각시탈이라는 전통 있는 밴드가 있었고, 거기 합격을 한 덕분에 학교를 계속 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대학에 갈 생각도 별로 안 했거든요. 무단결석으로 어머니 가슴에 대못 박은 적도 있고. 그렇게 착실한 학생은 아니었어요.
학교 밴드에 들어갈 때는 어떤 각오가 있었나요.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다던가.
김재욱 : 아니에요. 무조건 붙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붙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셨어요?
김재욱 : …네. (웃음)
오디션은 어땠나요?
김재욱 : 방과 후에 교실을 하나 빌려서 교탁 위에 서서 노래를 했어요. 무반주로. 보컬 오디션 응시자들이 쭉 뒤에 앉아 있다가 한 명씩 나와서 2, 3학년 선배들 앞에서 불렀죠. 누구 앞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노래하는 건 처음이라 엄청나게 긴장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모델로 런웨이에 처음 섰을 때도 그 때만큼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었죠”
모델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했는데, 지금이야 모델이 상당히 보편적인 직업군이 됐지만 그 때만 해도 고등학생 남자 모델은 아주 특이 케이스였을 것 같아요.
김재욱 : 그렇죠. 그 때만 해도 패션에 관심조차 없었고, 그냥 음악 하겠다며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당시 많았던 같은 잡지에 사진이 한 컷, 두 컷 들어가면서 시작했어요. 어쩌다 보니 일이 커졌는데, 사실 제가 무슨 아카데미를 수료한 것도 아니라 처음 쇼에 섰을 땐 워킹도 안 배운 상태였어요. 엉망이었죠. (웃음) 지금 생각하면 무슨 깡으로 했나 모르겠어요. 음악, 특히 록을 좋아하고 밴드를 하다 보면 오로지 음악만이 내 길이고 평생 직업이라는 결의가 생기는 경우도 많잖아요. 대학도 실용음악과로 갔고.
김재욱 : 고등학교 때까진 그랬던 거 같아요. 저 같은 사람이 정말 많겠지만,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맹목적으로 동경했거든요. 앨범 서너 장 내고 만 스물일곱에 죽었는데, ‘나도 앨범 세 장 내고 스물일곱에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심지어 가정이 너무너무 화목하다는 게 콤플렉스였던 시절도 있어요. ‘저런 삶을 살아야지 저런 음악, 저런 에너지가 나올 거야. 나한테 부족한 건 단지 그거야’ 라고 합리화시켜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었죠. (웃음)
그런데 음악이라는 게 특히, 커트 코베인 같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재능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장르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도 해 보셨어요?
김재욱 : 너무나 예전부터 느껴왔어요. 단지 한 분야에 에너지를 쏟지 못해서 그렇다는 건 핑계인 것 같고, 그냥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일 뿐인데도 매달리는 거죠. 그러고 있을 때가 제일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제가 좀 더 어렸다면 절대 이런 얘길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걸 세상에 인정하는 순간 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슬아슬하고 팽팽하게 살아왔다면, 지금은 그보다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게 좋기도 하면서 싫기도 해요. 다 똑같아져 가나, 이렇게 고유의 색을 잃어가나 싶은.
“지금 갖고 있는 에너지로도 못한 게 너무 많아요”
하지만 남들이 잘 한다고 칭찬해주는 것보다 남이 뭐라던 내가 좋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외부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선택을 해온 것 같아요. 혹시 그렇게 살면서 ‘내가 결정한 일이지만 이렇게 사는 건 정말 피곤하고 힘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요.
김재욱 : 없어요.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게 못 했으면 오히려 훨씬 힘들었을 것 같아요. 누군가의 강요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지 튀어나온 못이 되기 싫어서 선택을 잘못 했으면 매일매일 괴로웠을 것 같아요. 그렇게 살고 싶진 않고. 사실 연예계라는 곳은 발을 들이고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는 순간부터 그 다음은 커리어를 위로 쌓아나가는 게 수순이잖아요. 하지만 지금까지 김재욱 씨가 활동해 온 방식은 인기나 실리적인 것들을 최대한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나 로 얻은 이미지도, 보통은 그걸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지 접으려고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미련 없이 두고 떠날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바탕에 있는 생각은 뭔가요. 이거 아니어도 죽지 않는다? 혹은 이거 아니라 다른 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김재욱 : 오히려 반대인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이렇게까지 집중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은 없어요. 한 1년 정도 전에 모델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누굴 가르치는 걸 못 하는 사람이지만 그냥 제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돈이나 명예 같은 걸 떠나 정말 자기 자신에게 정면으로 물어봤을 때 ‘더 이상 니 안에서 뽑아낼 거 없잖아’라는 답이 나오는 순간 그 일을 딱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한 학생이 굉장히 반발했어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왜 그렇게 혼자 멋있으려고 하세요?” 그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 같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삶의 주체가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거야말로 제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할 끈인 것 같아요. 그걸 놓는 순간 저는 그냥 부품이 될 것 같아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을 부품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밀어붙이는 시스템 안에서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만 해도 개인에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기도 하니까.
김재욱 : 네, 나이가 들면서 더 안정된 걸 추구하기도 하고, 지켜야 할 것들도 생기죠.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른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고 얘기하기엔 아직 저는 지금 갖고 있는 에너지로도 못한 게 너무 많아요. 이 말을 과연 제가 30대 후반에도 ‘나는 20대에 그랬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그 땐 내가 철이 없었다’고 창피해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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