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혼자 시골에 내려가는 건지, 일본에 엄마를 만나러 갔는지, 어쩌면 자살을 하러 가는 걸 수도 있구요.” SBS 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혼자 길을 떠난 홍태성의 마지막에 대해 김재욱은 말했다. 인상적인 CF ‘천지창조’의 주인공, MBC ()의 꽃미남, 영화 의 게이 파티쉐 등 지난 몇 년 간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선점했음에도 매번 자신을 향한 스포트라이트로부터 조용히 등 돌렸던 그는 에서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지만 속으로는 애정에 목말라하는 재벌 2세 홍태성 역을 맡으며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델, 연기자, 뮤지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가장 큰 매력이 드러나는 것은 그 어떤 작업의 결과물보다도 인간 김재욱 그 자체다. 에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그를 만났다. 그 어떤 분석과 수식어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사실 이 스물여덟 청년이 가진 하나의 세계다.

촬영이 끝난 지 2주 정도 지났는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김재욱 : 한 달은 더 지난 것 같아요. 끝나고 계속 잠만 잤어요. 아무리 자도 졸리고, 피로가 안 풀려요.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끝나면 누굴 만나야지, 어디 가서 뭘 해야지’ 하는 게 나름 희망이자 원동력인데 막상 끝나고 나니 몸이 안 따라줘요. 지금은 모든 게 무기력해요.

작품의 성격이나 캐릭터와도 연관이 있는 걸까요.
김재욱 : 그게, 판단하기 좀 애매해요. 영화 때도 분명 작품 끝나고 나서 캐릭터를 벗는 데 걸린 시간이나 과정이 있었는데 그 안에 있을 땐 잘 못 느끼거든요. 다 털고 나면 느껴지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둘째 치고 우선 제가 스스로 ‘하, 이 자식 뭣도 아닌 게 벌써 배우 병 걸렸냐?’ 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구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처음 계획했던 대로의 마무리가 안 됐기 때문에 마침표를 딱 찍고 끝낸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있어요. “사실 태성이가 자살을 해도 이상할 게 없어요”
김재욱│“지금은 모든 게 무기력해요” -1

하지만 모델이나 음악, 심지어 영화까지 그동안 해 왔던 여러 작업을 통틀어 드라마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잖아요.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요?
김재욱 : 재밌었던 게, (김)남길이 형이나 (한)가인 누나랑 모니터링을 같이 했거든요. 방송 끝나면 소속사 대표님, 실장님, 친구, 엄마한테 문자랑 전화가 미친 듯이 오는 거예요. “이건 좋았고 저건 별로였다” 등등, 그런데 저는 한 통도 안 와요. 제가 잘못 살아온 건지. (웃음) 제 주위에는 그냥 다른 용건 땜에 통화했더니 ‘지나가면서 봤는데 괜찮더라?’ 정도? 어머니랑 아버지도 첫 방송했을 때 “잘 봤다”는 문자 한 번 보내시고, 나중에 통화하면서 “근데 왜 방송 끝날 때마다 나한테 전화 안 해요 엄마?” 그랬더니 “왜, 해야 되니? 봤어, 봤다구. 너 바쁠까봐 그랬지” 하시더라구요. (웃음)

홍태성은 에서도 내적인 갈등이나 변화가 굉장히 큰 인물인데, 후반으로 가면서 이 사람의 변화를 어떻게 그리고 싶었는지 궁금했어요.
김재욱 : ‘태성이가 어떻게 되면 좋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제가 결정할 몫이 아니고, 그보다는 그를 연기하는 제가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잘 그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가 그렇게 친절한 텍스트는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의도와 굉장히 다르게 그려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에 캐릭터를 많이 만졌어요.

이를테면 어떤 식으로요?
김재욱 : 저희 작가 분들이 여러 명이셨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이 그리는 홍태성과 저 사람이 그리는 홍태성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생길 수 있는데 저는 2월부터 홍태성 하나에 쭉 매달려 왔으니까 작은 텍스트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작품은 그러지 않으면 제가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서 감독님과 현장에서 이야기하고 작가님들과 통화하면서 의논을 많이 했어요. 후반으로 가면서는 특히 ‘홍태성이라면 이 말을 이렇게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말투나 어순 같은 걸 많이 바꿨어요. 쉽게 말하면 ‘그 자식’이 ‘그 새끼’가 되기도 하고, 그 신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잡고 가면서 잔가지는 스스로 어레인지 하는 거예요. 사실 이런 식으로 작업한 건 저도 처음이라 쉽지 않았어요. 초반에는 애인이 죽고, 중반에는 사랑에 빠지고, 후반에는 뒤통수를 맞다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다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캐릭터잖아요.
김재욱 : 사실, 얘가 자살을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배우들끼리도 많이 했어요. 건욱(김남길)이도 건욱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태성이 역시 당장 어디 가서 차에 치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힘든 일을 계속 당한 사람이니까요. 그 감정의 깊이나 슬픔을 표현하는데 제가 낼 수 있는 게 100이라면 그걸 이미 8, 9회쯤 보여준 뒤에 200, 400, 800짜리 충격이 오니까… 되게 힘들었어요.

“베이스가 없기 때문에 감정에 더 의존하게 돼요”
김재욱│“지금은 모든 게 무기력해요” -1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역시 애인 선영(김민서)이 죽은 도로 가에 주저앉아 우는 신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감정 자체도 셌지만 보통 배우들에게서 보기 힘든 얼굴이 나와서 그랬던 것 같아요.
김재욱 : 얼굴에 임팩트가 있었죠. (웃음)

런웨이 위에서의 모델로서도 그랬지만, 나 에서도 대개 감정의 동요가 적고 시크한 표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무방비 상태로 연기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어요.
김재욱 : 노래로 예를 들면 3옥타브까지 소리 낼 수 있는 사람, 2옥타브 밖에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 1옥타브 밖에 못 내는 사람이 1옥타브의 노래를 부를 때 느낌은 분명 다르거든요. 뭔가를 할 수 있는데 전부 다 취하지 않는 것과, 그것 밖에 할 수 없는데 마치 일부러 그걸 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데는 차이가 커요. 정말 연극판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베이스를 만들어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연기와 마치 ‘난 그딴 거 필요 없고 모든 걸 감정으로 뚫어버리는 연기자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연기로 나눈다면 저도 베이스가 없기 때문에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하지만 적개심보다는 ‘나는 그게 없지만 지금 갖고 있는 이걸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만들겠다’는 자세로 작업을 해요. 그러다보니 카메라 앞에서 딱히 계산을 하지는 않는데 에서 친해진 조명감독, 촬영감독님들이 항상 제 감정 신이 되면 긴장을 하시는 거예요. 리허설 때와 동선이 달라지니까. (웃음) “재욱아, 어떤 사람은 라면 먹으면서, 걸레질 하면서 흘깃흘깃 보기도 하는 게 드라마야. 조금 더 친절하게 연기하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게 도와주면 안 되겠니?”라는 얘기를 해 주셨어요. 그러면 저는 “저도 너무 그러고 싶은데 아직 제가 부족해서 그게 잘 안 돼요”라고 말씀드렸죠. 그 도로 앞 신 같은 게 극단적인 예였어요. 저도 제가 그런 얼굴로 울 줄 몰랐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줄도 몰랐어요. 어쩌면 테크닉의 부족함을 그런 식으로 메우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정유미 씨도 MBC 로 처음 드라마를 했을 때 감정 신에서 동선을 파악하는 게 어려워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방송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신 분이 김윤철 감독님이실 텐데, 올해 초 한일 합작 드라마 에서 함께 작업할 때는 어땠나요.
김재욱 : 사실 저는 꽤… 현장에서 감독님을 귀찮게 하는 타입이에요. 때 민규동 감독님과도, 이번에 이형민 감독님과도 그랬어요. 남들이 보기엔 싸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는데 (웃음) 저는 항상 “왜 그래야 되죠?”라는 의문이 많아요. 그런데 에서는 그런 게 단 한 번도 없었어요. 12월 중순에 캐스팅돼서 크랭크인 할 때까지 한 달 반 동안 거의 매일 밤 감독님과 만나서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모든 신에 대해 미친 듯이 얘기했거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나눈 상태로, 너무나 굳건한 신뢰가 이미 만들어진 채 현장에 가니까 그냥 감독님이 말씀하시면 “알겠습니다. 일단 할 게요”라고 대답하게 된 거죠. 정말 빡빡한 스케줄이라 육체적으로는 죽고 싶었는데 현장에서는 편했던 것 같아요.

“아직까진 제 이미지가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아요”
김재욱│“지금은 모든 게 무기력해요” -1
는 여배우와의 러브 라인이 제대로 있는 거의 첫 번째 작품이었어요.
김재욱 : 그렇죠. 재밌었어요. 작품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인복이 많아서, 가인 누나를 비롯한 모든 배우들이 좋은 분들이셨고 서로 어떤 말을 해도 오해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되면서 연기하기에는 정말 편했죠. 사실 가인 누나는 저랑 너무 친해져서 키스 신 찍을 때 오히려 불편했다고 하던데. (웃음)

그런 면에서 극 중 두 사람의 관계가 남녀보다 남매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김재욱 : 평소 누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묻어났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계단 내려가면 뒤돌아보고 한번 씩 웃고 가”라는 정확한 디렉션이 있으면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자유로운 상황에서의 표정 변화나 공기는 그 안에서 상대방과 제가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만약 키스신이 있다면 그 전의 분위기와 그 후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는데, 그 다음이 어떻게 이어지니 이렇게 해야겠다는 계산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게 그 키스신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도 또 다음이 달라져요. 좀 더 부드럽게 대할 수도 있고, 더 아이 같아질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틀을 정해 놓은 상태로 매 신에 서로 집중했던 것 같아요. 더블 액션을 신경 안 쓰는 건 아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 한에서 서로 애드리브를 해 보고, 상대가 받아치는 게 달라지고, 그러다 보면 둘만 아는 뭔가가 생기고. 연기하는 저희는 재밌었는데 보시는 분들이 어떠셨을지. (웃음) 혹시 를 계기로 들어오는 시나리오나 프로젝트가 좀 다양해지기도 했나요?
김재욱 : 가 끝났을 때는 그 캐릭터의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캐스팅이 많이 들어왔고, 이후에도 비슷한 이미지나 동성애물이 주로 들어왔어요. 재미있는 게, 같은 걸 하고 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은 또 크게 다르지 않은 역할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사실 아직까지는 시나리오들을 그렇게 면밀히 검토하지는 못했어요. 지금 제 상태로는 뭘 보고 “오! 좋다!” 하기는 힘들 것 같고 정말 좋으면 “하… 이건 해야겠다…”는 정도만 가능할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 쉽게 선택하긴 힘들 것 같아요.

어릴 적 일본에 살다 왔기 때문에 에서도 일본어 대사를 상당히 능숙하게 소화했는데,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좀 더 다양한 기회가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실용성 여부를 떠나서 다른 외국어에도 좀 관심이 있나요?
김재욱 :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관심은 많은 편 같아요. 영어나 스패니쉬에 대한 욕심이 큰데, 문제는 욕심만 앞선다는 거예요. (웃음) 꼭 네이티브처럼 자연스럽게 발음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의사 전달은 제대로 할 수 있는 정도면 좋겠는데 게을러서 따로 공부를 안 해요. 그리고 ‘영어공부 해야지’ 하는 스트레스를 그냥 틀어놓는 정도로 해소해요. ‘우선 리스닝 부터 할까? 하면서 켜놓고, 집안에서 움직이며 그냥 듣기만 하죠.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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