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사실 공포영화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 잘 이해가 안 가요. (웃음) 영화는 영화니까 별로 무섭지 않고 놀라지도 않아요. 오히려 재밌는 걸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천진하게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황정음은 그렇다. 인형 같이 예쁜 얼굴을 하고선 1g의 내숭도 섞이지 않은 대답과 한 방울의 가식도 섞이지 않은 웃음을 터뜨린다. 시트콤 의 정음보다 2배는 더 솔직하고, 3배는 더 대범하다. 걸 그룹 슈가로 데뷔해 몇 편의 드라마로 활동하기까지 지루하리 만큼 길었던 슬럼프에 대해 말할 때도 꾸미는 법이 없다. “슬럼프 기간도 많았죠. 데뷔하고 나서 7년 만에 잘 된 거니까 속이 다 시원해요. 잘 되서 행복한 것도 있지만 제일 하고픈 말은 후련하다는 거예요. 하하”

황정음은 아이돌 시절에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연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는 좋은 평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게 긍정적인 성격”으로 매번 처음부터 배워가며 연기를 했다. 그렇게 “인생의 첫 번째 행운”인 의 정음을 만났다. 학벌도, 집안도 그저 그런데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가르치는 고등학생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 대책 없는 술주정으로 망신당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닌 정음은 그래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눈 화장이 번져 검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만취해서 온 몸에 미역을 감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떡실신녀’ 황정음으로 126회를 산 그녀를 사람들은 알아봐주었다. 7년 만에 그렇게.

“몸에 맞는 옷을 입었던 것 같은” 정음을 뒤로 하고, 그녀는 이제 드라마 의 속 깊은 미주로, 영화 의 교생선생 은수로 우리 앞에 섰다. “인생의 두 번째 행운”인 와 “인생의 도전”인 로 연기자로서 점점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황정음이 고른 영화들은 심장이 약한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밤중에도 누그러지지 않는 열기에 잠 못 이룬다면 이 명랑한 아가씨가 추천한 공포영화들로 더위를 식혀 보는 건 어떨까?
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1. (Final Destination)
2000년 | 제임스 왕
“되게 재밌게 본 영화예요. 시리즈를 다 챙겨볼 정도로. 제가 원래 공포영화를 잘 안 무서워하거든요. 근데 시리즈는 무서웠던 게 나도 길을 가다가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였어요. 그만큼 공감도 더 가구요.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들이 충분히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보고 나서 친구들하고도 정말 많이 얘기했어요. 옆에 차가 지나가도, 어 데스티네이션! 조심해! 이러고. (웃음)”총 4편의 시리즈가 나온 은 매 영화가 동일한 구조로 진행된다. 예정된 죽음을 한 발 앞서 경험한 주인공에 의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는 죽음을 피하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것. 단순한 이야기지만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건 등장인물들이 죽음에 이르는 방식이 독창적이면서도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욕실, 강의실, 횡단보도 등 익숙한 일상의 공간을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시키는 솜씨가 뛰어나다.

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2. (Whispering Corridors)
1998년 | 박기형
“은 특히 첫 번째 이야기가 가장 무서웠던 것 같아요. 그 때는 공포물 중에서 한국영화도 별로 없었던 때였고, 아직까지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떨게 했죠. (웃음) 을 처음 봤을 때가 중학교 때였는데, 무서운 요소들도 그렇지만 여학교 시절을 보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때로 학교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의심되는 수준의 인격을 가진 교사와 약자는 집요하게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등 결코 순수하지 않은 학생들까지, 바로 처럼 말이다. 별다른 특수효과나 반전 없이도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한편 슬프기까지 한 . 1,2편의 성공 이후 등장한 시리즈들이 실망감만 안겨준 것에 비해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3. (Scream)
1996년 | 웨스 크레이븐
“이번에 를 찍으면서 느낀 건데 공포영화는 목이 참 힘든 작업인 것 같아요. (웃음) 물론 감정 신도 힘들지만 공포영화는 소리를 많이 질러야 돼서 정말 힘들었어요. 사람이 죽고, 상황이 무서워서 소리를 질러야 하니까 작게 지를 수도 없고. 에서도 여배우들이 겁에 질려서 소리를 지르는 게 많이 나오는데 할 때는 힘들지만 보는 건 즐거웠어요. (웃음)”

비명을 지르는 표정의 가면을 쓴 살인마는 오랫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패러디되는 것은 물론 할로윈 축제의 단골 코스튬일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여주인공 시드니(니브 캠벨)의 이름을 소름 끼치게 외치며 끝까지 그녀를 ㅉㅗㅈ는 살인마는 오싹하면서도 묘하게 허술해서 코믹한 구석까지 있다. , 등 수많은 공포영화를 만든 웨스 크레이븐 감독은 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제 6회 MTV영화제 최고의 영화상 수상작.

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4. (The Exorcist)
1973년 | 윌리엄 프리드킨
“는 어렸을 때 봤는데 아직도 너무 무서웠던 이미지가 강해요. 그 목 돌아가는 신! 지금 생각해도 오싹해요. 최근에 재개봉 때 추가된 신도 있고, 시리즈들이 계속해서 많이 나왔지만 역시 오리지널이 가장 무서운 것 같아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무섭다고 한 같은 영화를 볼 때도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는 달라요.”스릴러, 호러, 오컬트, 슬래셔 등 여러 갈래가 있는 공포영화 중에서도 는 오컬트 무비의 원전이라 할 만하다. 살인마가 등장하지도, 피가 낭자하지도 않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악령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심을 건드린다. 공포영화로는 드물게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에게 제 3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안겨주었다.

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5. (Possessed)
2009년 | 이용주
“제가 기가 세서 그런지 귀신을 본다거나 가위에 눌린다거나 한 경험이 전혀 없거든요.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가위에 한 번 눌려보고 싶을 정도로 그 느낌이 궁금해요. 주변 사람들한테도 막 물어본 적도 있구요. 에서도 제가 겪어보지 못한 초자연적인 경험들이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무서우면서도 신기하기도 했고, 최근에 봤던 공포물 중에 가장 좋았어요.”

한국 사회의 환부와 오컬트 현상을 교묘하게 연결시킨 의 등장은 비범했다. 한국 공포영화에 대해 갖고 있던 뿌리 깊은 불신을 일거에 날려버린 영화는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기괴한 몸짓의 여성이 주는 1차원적인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다. 남상미, 심은경, 김보연 등 브라운관을 벗어난 주연배우들의 호연 또한 뛰어나다. 이용주 감독은 데뷔작으로 영평상, 청룡영화상 등에서 각본상과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다.
황정음│더위를 식혀줄 공포영화
“항상 후회는 많아요. 도 그랬고, 도, 도. 더 잘 할 수 있는데 상황이 안 되거나 시간이 없어서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러면서 배우는 게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 후회 안 하도록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거예요. 그게 연기자의 몫인 것 같아요.” 이제는 더 이상 촬영장에서 애교를 떨 수 없는 나이라며 울상 짓는 황정음은 여전히 귀여운 소녀 같지만 연기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는 진지한 27살이 된다. “사실 의 미주나 의 은수는 제가 원래 잘하는 캐릭터들은 아니에요. 그래도 잘하려고 노력하다보니까 하나하나 알게 되는 것들이 생겨요. 아 이렇게 연기자가 성장하는구나, 부족한 점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나아지는구나 하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길고 긴 슬럼프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한 긍정의 힘에다 이제는 한층 더 단단해진 자세까지 갖춘 황정음. 여기에 더해질 그녀만의 자신감은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언니 같은 캐릭터”를 꼭 해보고 싶은 소망에 가속도를 더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