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는 꼭 스톰이어야 했다. 스판이 섞인 스톰 티셔츠에 닉스 청바지, 그리고 벨트는 미치코 런던. 어쨌든 스톰은 필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중 서태지가 스톰을 입었으니까. 수십, 수백만 원짜리 명품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짝퉁’에 대한 동세대 친구들의 처단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했던 시기, 그녀의 얼굴이 스톰 카탈로그에서 보였다. 예뻤지만 아직은 얼굴선의 흐름이 완전히 고정되지 않아 어쩌면 외국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얼굴. 역시 스톰 카탈로그에서 등장했던 송승헌과 소지섭이 MBC 으로 스타덤에 오르고 그 미성숙한 소녀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그녀는 완전히 제 자리를 잡은 이목구비와 역시 구체적인 김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모의 ‘To Heaven’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했고, 기획형 스타와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의 시대가 왔다.
서른둘 김하늘의 선택
물론 이것이 김하늘이라는 배우가 문화적 격변기에 동참하고 그것을 이끈 주체였노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분명 데뷔 초의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신인이 그러하듯 이미지로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예뻤고, 덕분에 조연 단계를 거치는 일 없이 데뷔작인 영화 에서부터 여주인공 자리를 놓친 적이 없으니까. 사실, 2000년대를 사는 지인(유지태)과 무선기로 교신하며, 학교 선배에게 1999년에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해맑게 웃으며 말하던 70년대 여대생 소은의 모습만으로도 김하늘은 충분히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았고, 더는 욕심 부리지 않고 비슷한 이미지를 유지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2003년 영화 를 선택했다. 그것은 그녀가 배우라는 길 위에서 좀 더 주체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을 예감케 하는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김하늘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좀 더 또렷한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과정과 한 명의 여성으로서 나이 먹어가는 과정, 그리고 한 명의 배우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온전히 일치시키기 시작했다. 가령 영화 의 초반부는 나 영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의 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결혼, 섹스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담아내며 김하늘은 자신의 서른 살을 신고했다.
남자들의 전우애가 중심에 놓이며 그녀가 연기한 여주인공 수연의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MBC 이 김하늘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건 그래서다. “전에 연기한 캐릭터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내 어머니 같고 고향 같은 캐릭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는 그녀의 걱정에 비해 사실 수연은 복잡한 인물이 아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그녀의 반응은 거의 일관된다. 빨치산을 토벌하며 손에 피를 묻힌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장우(소지섭)나 병약한 관념론자인 오빠 수혁(김진우), 생판남인 꼬마 명호에게도 그녀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아주고 보살핀다. 싸가지 없음과 당당함 사이를 오가는 SBS 의 오승아의 복잡한 심리적 프로필이나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 영화 의 수지의 화려한 액션이 여기엔 없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수연을 공감가게 연기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야 했고, 이 지점에서 그녀는 스스로 “주저 앉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녀가 수연을 연기하는데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완전히 이해했고, 바로 그 때문에 이 캐릭터에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제 서른둘인 그녀가 배우로서 더 오래 남기 위해 어떤 부분을 확장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스톰을 만들 때까지
그래서 흥미롭게도, 경력 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의 김하늘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결과적으로는 조금씩 발전한다”는 완만한 상승 곡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 의 내면 연기를 통해 “한 단계 이상으로 발전이 있을 것 같다”는 연기적 업그레이드에 대한 이야기 역시 아니다. 그녀는 시대적인 변화와 연기자로서의 발전 사이에서 조화를 만들어낼 줄 아는 배우다. 2000년대 초중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가 붐을 이룰 때 만큼의 완성도와 흥행을 보여준 작품은 흔치 않으며, 연상연하 커플을 전면에 내세운 로맨스의 고전은 역시 MBC 다. 결코 모험적이거나 핫한 필모그래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는 단순히 대세를 쫓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김하늘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만한 구체적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런 과정이 켜켜이 쌓일 때 불현듯, 배우 자신의 이름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 온다. 분명 김하늘은 아직 그 정도의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을 통해 내면에 갈무리한 감정만으로 아우라를 뿜어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젊고 예쁜 여배우라는 굴레 너머의 동력을 얻었다. 연기자로서의 발전과 여배우로서의 아름다움이 반비례를 이루는 순간이 와도 배우로서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때문에 지금의 김하늘에게서 “(을 통해) 내면에 쌓인 걸 활용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당장의 후속작보다 그 이후의 이후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스톰의 김하늘로 기억되는 게 아닌, 김하늘의 스톰을 만들 수 있는 그 시기를.
글. 위근우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서른둘 김하늘의 선택
물론 이것이 김하늘이라는 배우가 문화적 격변기에 동참하고 그것을 이끈 주체였노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분명 데뷔 초의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신인이 그러하듯 이미지로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예뻤고, 덕분에 조연 단계를 거치는 일 없이 데뷔작인 영화 에서부터 여주인공 자리를 놓친 적이 없으니까. 사실, 2000년대를 사는 지인(유지태)과 무선기로 교신하며, 학교 선배에게 1999년에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해맑게 웃으며 말하던 70년대 여대생 소은의 모습만으로도 김하늘은 충분히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았고, 더는 욕심 부리지 않고 비슷한 이미지를 유지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2003년 영화 를 선택했다. 그것은 그녀가 배우라는 길 위에서 좀 더 주체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을 예감케 하는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김하늘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좀 더 또렷한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과정과 한 명의 여성으로서 나이 먹어가는 과정, 그리고 한 명의 배우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온전히 일치시키기 시작했다. 가령 영화 의 초반부는 나 영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의 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사랑과 결혼, 섹스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담아내며 김하늘은 자신의 서른 살을 신고했다.
남자들의 전우애가 중심에 놓이며 그녀가 연기한 여주인공 수연의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MBC 이 김하늘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건 그래서다. “전에 연기한 캐릭터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내 어머니 같고 고향 같은 캐릭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는 그녀의 걱정에 비해 사실 수연은 복잡한 인물이 아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그녀의 반응은 거의 일관된다. 빨치산을 토벌하며 손에 피를 묻힌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장우(소지섭)나 병약한 관념론자인 오빠 수혁(김진우), 생판남인 꼬마 명호에게도 그녀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아주고 보살핀다. 싸가지 없음과 당당함 사이를 오가는 SBS 의 오승아의 복잡한 심리적 프로필이나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 영화 의 수지의 화려한 액션이 여기엔 없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수연을 공감가게 연기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야 했고, 이 지점에서 그녀는 스스로 “주저 앉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녀가 수연을 연기하는데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완전히 이해했고, 바로 그 때문에 이 캐릭터에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제 서른둘인 그녀가 배우로서 더 오래 남기 위해 어떤 부분을 확장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스톰을 만들 때까지
그래서 흥미롭게도, 경력 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의 김하늘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결과적으로는 조금씩 발전한다”는 완만한 상승 곡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 의 내면 연기를 통해 “한 단계 이상으로 발전이 있을 것 같다”는 연기적 업그레이드에 대한 이야기 역시 아니다. 그녀는 시대적인 변화와 연기자로서의 발전 사이에서 조화를 만들어낼 줄 아는 배우다. 2000년대 초중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가 붐을 이룰 때 만큼의 완성도와 흥행을 보여준 작품은 흔치 않으며, 연상연하 커플을 전면에 내세운 로맨스의 고전은 역시 MBC 다. 결코 모험적이거나 핫한 필모그래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는 단순히 대세를 쫓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김하늘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만한 구체적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런 과정이 켜켜이 쌓일 때 불현듯, 배우 자신의 이름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 온다. 분명 김하늘은 아직 그 정도의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을 통해 내면에 갈무리한 감정만으로 아우라를 뿜어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젊고 예쁜 여배우라는 굴레 너머의 동력을 얻었다. 연기자로서의 발전과 여배우로서의 아름다움이 반비례를 이루는 순간이 와도 배우로서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때문에 지금의 김하늘에게서 “(을 통해) 내면에 쌓인 걸 활용하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당장의 후속작보다 그 이후의 이후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스톰의 김하늘로 기억되는 게 아닌, 김하늘의 스톰을 만들 수 있는 그 시기를.
글. 위근우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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