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성동일은 ‘신 스틸러(scene stealer)’가 되기 위해 태어난 배우인지도 모른다. 조연 중의 조연으로 등장했지만 방송이 이어지면서 작품의 간판처럼 자리 잡았던 SBS 의 ‘빨간 양말’과 KBS 의 무뢰한 천지호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와 에서도 그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지닌 주인공들에게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을 보였고 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사투리와 애드리브를 통해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코미디로 꼽힐 만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예전에는 배우가 뭣 좀 하려고 하면 ‘인마, 니가 주인공이냐? 그냥 니 역할대로 해. 왜 주인공보다 폼을 잡고 그래?’ 라고 구박하는 감독들도 있었어요. 지금은 다행히 주조연의 폭이 많이 줄어들었죠.” 물론 배역의 크기와 상관없이 연기에 진지함과 웃음, 눈물을 함께 담고 싶어 하는 그의 방식은 다르지 않다. “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천지호답게 죽느냐였어요. 그 전까지의 과정에서는 그냥 마음껏 놀았던 거죠.” 보석 밀수를 위해 강아지 장군이를 훔쳤다가 어미 개 마음이에게 쫓기는 개 도둑 ‘필 브라더스’의 형 혁필 역을 맡은 영화 에서도 그는 흥미로운 접근법을 택했다. “의 조 페시를 모델로 삼아서 목소리를 일부러 가성으로 가늘게 뽑아 봤어요. 개도둑이라고 누가 봐도 도둑같이 생겼거나 지나가는 모든 개를 훔치려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도둑이 아니고 잡놈이게? (웃음)” 영화를 찍으면서 같이 하는 배우와 술 한 잔을 못 해본 건 ‘마음이’ 역의 ‘달이’가 처음이라며 못내 아쉬워하는 그가 인간을 깊이 있게 그린 영화들을 추천했다.
1. (1977년)
이원세
“좀 촌스럽긴 하지만, 좋잖아요? 제가 열 살 땐가 보고 많이 울었어요. 저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처음 갔어요. 공부할 때를 놓치는 바람에 전교 꼴찌도 해 봤고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하면서 키우셨거든요. 그런데 내가 보고 느낌이 있는 게 좋은 영화지, “야, 카메라 잘 잡았다!” 한다고 감동받는 건 아니거든요. 세상에 멋있는 영화는 수도 없지만 결국 사람은 내가 경험한 부분에 대해 공감하는 영화를 만나야 감동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에요.”
열세 살 소년 영출은 어머니가 막내 철호를 낳자마자 병으로 죽는 바람에 철호를 업고 학교에 다니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지만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아버지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가족과 떨어져 고아원에 보내질 처지가 된다.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울어버리는 가슴 뭉클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라는 포스터 문구대로 가난과 서러움 등 70년대의 보편적 정서와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흥행에 성공, 3편까지 제작되었다.
2. (Cinema Paradiso)
1988년 | 쥬세페 토르나토레
“얼마 전 이사를 했는데 아들이 두 살 때 그린 그림이 3년 만에 어디서 나왔어요. 괜히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은 그런 느낌이에요. 내가 열심히 살아온 인생, 나의 과거와 어느 날 갑자기 마주했을 때 ‘그 땐 그랬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죠. 아날로그 시절에는 어렵게 찍고 소중하게 보관했다면 지금은 디지털로 너무 쉽게 많이 찍고 그만큼 쉽게 많이 버려요. 그런데 이 영화는 요즘 세상에 대단히 세련되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그 아날로그의 정서, 추억 하나를 돌이켜 보게 해 준다는 면에서 참 소중한 작품이죠.”
이 작품을 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이라는 제목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작은 마을의 영화관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토토는 영사기사 알프레도와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며 성장한다. 독특한 시대상과 함께 영화가 영원히 인간의 꿈을 담아내는 매개임을 보여주는 고전.
3. (The Silence Of The Lambs)
1991년 | 조나단 드미
“저는 사실 사회적으로 좀 튀는, 이를테면 살인마나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더 좋아해요. 하지만 물론 그런 장르의 매력도 있는 거고, 은 피 철철 흘리는 잔인한 장면 없이도 지금까지 스릴러 하면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된단 말이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게, 안소니 홉킨스가 마지막에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고 모자 타악 쓰고 남방에 마 바지 입고 돌아서서 가는데 어우, 그 뒷모습이 소름 돋더라고요. 보는 사람은 저 자가 대체 다음에 뭔 짓을 저지를까 조마조마한데 본인은 정작 하와이 여행이라도 가듯 편안하게. 뭘 작정하고 하는 행동보다도, 그런 연기가 좋아요.”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FBI 요원과 감옥에 갇힌 식인 살인마의 두뇌 싸움을 중심으로 그린 스릴러.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악인 한니발 렉터 박사는 토머스 해리스의 원작 소설에서 창조되었지만 안소니 홉킨스의 절제되면서도 소름 끼치는 명연기를 통해 완성되었다. “10년에 한번 나올 만한 수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1992년 아카데미 주요 5개 부문(작품, 감독, 남우주연, 여우주연, 각색상)을 휩쓸었다.
4. (Summer Of Kikujiro)
1999년 | 기타노 다케시
“일본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호흡도 좋고 색깔이 독특한 배우들도 많아요. 기타노 다케시 같은 경우는 도 좋아하지만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코미디 한다는 게 상상 안 될 때가 있는데 호흡이 정말 뛰어나죠. 그 사람이 눈을 그렇게 깜박거리게 된 건 교통사고 때문이라지만 그게 어떻게 그렇게 연기랑 잘 맞아떨어지는지! 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온 새로운 발상들이 너무 좋았어요. 언제 우리 아들하고라도 한 번 해 보고 싶을 정도로. (웃음)”
여름 방학을 맞은 아홉 살 소년 마사오는 먼 곳에 돈을 벌러 갔다는 엄마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전직 야쿠자 출신 동네 아저씨 기쿠지로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마사오의 보호자로 동행하면서 조금도 어울리는 구석 없는 두 남자의 여행이 시작된다.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아 , 등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따뜻하고 잔잔한 세계를 만들어낸 작품.
5. (Sumo Do, Sumo Don`t)
1992년 | 수오 마사유키
“이 영화를 한 열 다섯 번 넘게 본 것 같아요. 영화를 볼 때 전체가 아니라 음악이 좋으면 음악만 듣고, 어떤 배우 연기가 눈에 띄면 그 연기만 보는데 에서는 배우들의 호흡이 전부 최고였지만 그 중에서도 다케나카 나오토의 연기가 너무 훌륭해요. 에서도 정말 좋아했는데 이 배우가 10월에 방송될 KBS 에 출연하게 되어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곽정환 감독님이 “긴장하세요” 하길래 “영광입니다” 했죠. (웃음)”
대학 4학년인 슈헤이는 졸업을 앞두고 학점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모부에 들어간다. 단체전 숫자를 맞추기 위해 선수 영입에 나선 슈헤이와 괴짜 선배 아오키는 꽃미남 하루오, 유학생 스마일리 등 스모의 ‘ㅅ’도 알지 못하는 멤버들과 함께 3부 리그 대회에 나간다. 오합지졸로 구성된 신생팀이 우여곡절 끝에 팀워크와 게임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스포츠 영화의 정석이지만 그 중에서도 는 재미와 감동이 절묘하게 배합된 명작이다.
데뷔 20년에 접어든 요즘도 누구보다 현장을 즐기는 성동일에게 러브콜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다룬 영화 을 비롯해 의 제작진이 다시 뭉친 KBS 와 SBS 역시 하반기에 그와 만날 작품들이다. “원톱 시나리오도 몇 개 들어왔지만 아직 못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더 큰 역할이 욕심나는 게 아니라 더 큰 사람들과 놀고 싶거든요.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영화 도 신하균, 오달수, 심혜진 씨와 같이 할 수 있다길래 비중은 전혀 상관없다고 했어요.” 사실 그가 얼마나 오래 화면에 비춰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성동일은 언제나 단 한 장면만으로도 잊지 못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해온 배우이기 때문이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