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표가 너무도 뚜렷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춘향이를 희롱하던 의 변학도로 이름을 알린 배우 송새벽. 하지만 여기, 인간 송새벽은 자신의 출세작이었던 영화의 주인공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미투데이’ 광고처럼, 제대로 된 고백 한번 못해 본 사랑하는 유리 씨가 전근 가는 날 기찻길에서 귀여운 테러를 저지르던 시골교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지난 3월 31일에 개봉한 는 88올림픽이 끝난 다음해, 당시 금기와도 같은 사랑에 빠져버린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의 러브스토리다. “광주거리를 걷는 꿈”을 꿨다는 말에 “악몽을 꾸었구먼”이라 대답하는 장인과 경상도 사람은 “간이 안 맞아”라고 말하는 시아버지. 이렇게 두 아버지들이 평행선을 그리는 가운데 이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은 더욱 간절해지기만 한다. “요새는 핸드폰 하나로 다 되잖아요. 손때 묻혀서 편지 쓰고 이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80년대 후반의 청춘남녀들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삐삐도 없는 시절에. 시간 딱 맞춰서 전화해야 하고. 아날로그적인게 제 성향상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물론 지금보다 덜 편리한 시대였지만 사랑의 감정, 애틋함 이런 게 너무 부럽더라고요.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았다. 이 남자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투박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사랑의 영화는 무엇이었냐고. 그리고 여기 송새벽이 풀어놓은 수줍은 고백이 있다.

1. (The Bride With White Hair)
1993년 | 우인태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극장에 가서 봤는데 한 100번 넘게 본 것 같아요. 지금도 집에 소장하고 있고 가끔씩 보고 싶을 때 꺼내보고 그래요. 그야말로 한 여자를 위한 사랑, 그런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어린 저에게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쓰러진 장국영이 품에서 꽃을 꺼내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든 이것 하나만은 알아줘요. 모두 다 당신을 위해 그랬다는 걸”하는 장면을 보며 아- 언젠가 이런 사랑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 했어요.” 어린 시절 늑대들의 손에 키워진 마녀(임청하)를 사랑하게 된 탁일항(장국영).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애틋한 마음을 나누며 사랑하게 되지만 오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다. 천설봉에 천년마다 한번 피는 꽃을 먹으면 중원을 떠나 천년을 살수 있다는 전설 때문에 일항은 10년 동안 그녀를 기다리지만 사랑의 운명은 다시 한 번 그들을 비켜간다.

2. (Forrest Gump)
1994년 | 로버트 저메키스
“제니라는 여자를 바보처럼 그러나 우직하게 한 결 같이 사랑하는 검프의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나이 드신 선배님들이 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실 때가 있는데 그것만한 겸손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검프가 하는 어떻게 보면 아이 같은 행동들이 제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거예요. 우리들은 너무 똑똑해서 사랑에서 조차도 너무 머리를 굴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가슴으로 다가왔던 저에겐 다큐멘터리 같았던 영화에요.”

어떤 맛을 고르게 될지 모르는 박스 안의 초콜릿 같은 인생에서, 정상인보다 낮은 지능으로 태어난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는 순수한 호기심과 사랑으로 그 누구보다 많은 초콜릿의 맛을 경험한다. 평범하지 않은 자신을 가장 평범하게 길러낸 엄마와 인생의 출발 신호를 내려준 사랑하는 제니를 떠나보낸 상실의 맛까지도 늠름하게 삼켜낼 정도로 성숙한 그는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행복하다.
3. (Failan)
2001년 | 송해성
“최민식 선배님의 이강재 역할은, 정말 그 아우라는 잊을 수가 없죠. 무뚝뚝하고 거칠기만 하던 이 남자의 삶이 장백지의 존재를 쫓아가면서 뭔가 확 터지잖아요. 바닷가에서 편지 보며 오열하는 장면 보면서 저도 참 많이 울었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포장마차에서 공형진 선배님과 소주한잔 기울이면서 이야기하다가 다투는 신이 잊히지가 않아요. 그게 너무나도 우리가 사는 모습 같아서요.”

인천의 삼류건달 이강재(최민식)에게 언제 푸른 날이란 게 있었나.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가운데 돈이 궁해 중국여자와의 위장결혼에 응하지만 얼마 후 그녀가 죽었다는 부고를 받는다. 아가씨의 이름은 파이란(장백지). 따뜻하게 포옹한번 받아본 적 없는 타국의 남자를 남편이라고 믿고 살아온 이 여자의 말간 삶은 구정물 속에 뒹굴던 한 남자의 인생마저 구원하기에 이른다.

4. (La Vita E Bella, Life Is Beautiful)
1997년 | 로베르토 베니니
“아버지 귀도와 어머니 도라의 사랑이야기가 너무 순수해서 아름다웠어요. 귀엽기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아들 앞에서 끌려가면서도 이건 그냥 놀이일 뿐이라고 안심시키는 귀도의 모습이라니.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우리 인생에서 정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그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이렇게 눈물 나지만 유쾌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1930년대. 유태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폭력 속에서도 아이는 자라고, 아빠는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고, 엄마는 그 끝이 죽음일 지라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택한다. 도저히 아름다울 수 없는 세상에 던져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인생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난다, 는 표현 외에는 달리 표현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5.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6년 | 진가신
“여명과 장만옥도 좋지만 저는 역시 미키마우스 아저씨 (증지위)! 안마하는 장만옥에게 너는 내가 무섭지 않아? 물으니까 안 무섭다고 대답하죠. 그럼 네가 무서운 게 뭐야? 해서 쥐가 무섭다고 하니까 다음날 미키마우스를 등에 문신을 하고 온 장면을 보면서 아- 얼마나 애잔해요. 그게 진짜 감동이죠. 얼마나 로맨틱해요. 지금도 가끔씩 등려군 노래를 들어요. 가사를 아직 다 외우진 못했지만요.”

어떤 사랑은 서로에게로 향하는 입구를 찾지 못한 채 꽤 오랜 시간이 요구되기도 한다. 본토에서 온 생활력 강한 씩씩한 여자 이요(장만옥)와 착하고 순수한 소군(여명)은 홍콩에서 만난다. 이미 본토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 소군과 이요는 우정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랑을 이어가고 결국 뉴욕까지 날아간 이후에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무대 아래부터 똑바로 살자고 늘 생각해요. 아래에서 쓰레기처럼 살다가 무대 위에서 막 순진한척 하면 관객들은 다 알아요. 어떻게든 미묘하게 다 보이거든요. 그걸 눈치 못 채게 하려고 아래서부터 잘 살아야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거, 재수 없잖아요. 어쨌든 제 인생인데. 그 나름의 진실들을 관객들이 보실 수 있는 흐뭇한 풍경이면, 저는 그저 족한 것 같아요.” 의 세팍타크로 형사로 등장해 의 허를 찌르는 변학도, 도시가스 위치를 정확히 아는 의 형사와 의 찌질한 처남, 개봉을 앞둔 까지. 어눌한 전라도 사투리에 큰 변화 없는 표정. 그러다 관객들을 뒤집히게 만드는 폭소의 맥까지. 누군가는 송새벽, 이제 그를 좀 알 것 같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측금지. 장담하기엔 아직 이르다. 우리는 겨우 이 배우의 새벽 풍경을 보았을 뿐이다. 분명한 건 다가올 아침이 꽤나 뜨거울 것이라는 것이다.

글, 사진. 백은하 기자 on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