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첼리스트 카잘스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도 첼로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매일 나는 조금씩 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며 말이다. 정보석은 카잘스의 말이 생각나는 배우다. “데뷔 시절 연기를 너무 못 해서 연기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었어요”라는 그 자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출세작이던 KBS 부터 지금까지, 그의 연기는 끊임없이 늘고 있다. 출생의 비밀 때문에 호의호식하면서도 늘 불안에 시달리다 악역이 되길 자처하던 의 불안한 영혼은 MBC 에서 냉정함을 더했고, MBC 에서는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광기와 섬세한 감수성을 동시에 가진 공민왕이 됐다. 같은 시트콤이라도 SBS 의 어수룩한 교사와 그 어수룩함 속에서도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남자의 인생을 보여준 MBC 의 무력한 가장은 또 달랐다.
그리고, 에 이어 곧바로 선택한 SBS 는 그의 연기 인생에 또 한 번의 분기점이 됐다. “정말 신나서 했어요. 전작하고 다르게 내지르는 역할이기도 했고, 시대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조필연을 연기하기 위해, 그는 무엇보다 그 시대 속의 인간에 대한 리얼리티를 생각했다. “단지 조필연이라는 사람의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왜 조필연이 그런 욕망을 갖게 됐는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됐는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에 대해 생각해야 하거든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욕망을 놓지 못하는 조필연의 모습은 끝없이 성장할 것만 같았던 한국 현대사가 낳은 뒤틀린 욕망의 결과였고, 정보석은 말투는 물론 작은 손짓과 걸음걸이까지 조필연의 나이에 따라 조금씩 바꿔 가면서 점점 사람이라기보다 욕망의 덩어리로 변해가는 조필연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제 단지 연기를 잘하는 것을 넘어, 연기로 한 시대를 표현하는데 이르렀다. 그래서, 그에게 그의 시대를 함께한 음악들에 대해 물었다.
1. Vangelis의
“제가 어렸을 때는 들을 게 라디오 밖에 없었잖아요. 그래서 늘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었죠.” 젊은 시절 늘 음악을 함께 하며 비틀즈와 핑크플로이드를 특히 좋아하던 그가 영화 음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배우가 된 뒤 라디오에서 영화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부터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선곡에도 신경을 쓰게 됐어요. 전부는 아니지만 방송 중에 몇몇 곡은 제가 직접 선곡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해외를 나갈 때마다 영화 음악 앨범을 샀었죠.” 그 중 세계적인 영화음악가이자 신디사이저 연주자인 반젤리스가 영화 등에서 선보인 웅장하며 신비로운 음악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들이다.
2. Kenny G의
정보석이 추천한 두 번째 앨범은 색소폰 연주자 케니 지의 라이브 앨범 다. 팝적인 멜로디와 뉴에이지 음악의 편안함을 색소폰 연주로 풀어낸 케니 지는 색소폰 연주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고, 한국에서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팝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시의 뉴에이지 음악은 거의 다 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뉴에이지 음악은 지금하고 또 다르게 감성적인 멜로디를 아주 잘 사용했었던 것 같거든요. 요즘에는 클래식을 가장 많이 듣기는 하지만요. 정신을 가라앉힐 때는 쇼팽의 피아노곡들을 많이 듣고, 를 찍을 때는 비장한 베토벤의 곡을 가장 많이 들었어요. 하하.” 3. Jack Johnson의
반젤리스, 케니지, 그리고 잭 존슨으로 이어지는 그의 선곡은 분명히 일관된 어떤 취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시대를 지나며 그들의 음악을 들은 건 정보석이 얼마나 다양한 음악에 열려 있고, 음악을 많이 듣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의 아이폰에는 클래식부터 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뮤지션들의 음악이 담겨있기도 했다. “요즘 가장 즐겨 듣는 뮤지션 중 하나에요. ‘Sleep Through The Static (Paris, France)’ 같은 곡들 참 좋잖아요? 평온과 위로를 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잭 존슨이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환경보호를 위해 실천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요.”
4. 웅산의
정보석과의 인터뷰를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의 컬러링이 바로 웅산의 ‘Yesterday’였다. 한국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 중 하나인 그의 음악은 모든 시대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독특한 감성이 있다. “웅산, 정말 좋아요. 예전부터 웅산의 곡들은 다 들었는데, 정말 언제나 좋은 음악들을 만드는 것 같아요.” 정보석의 말처럼 어느 곡이든 자신의 감성 안으로 소화해내는 그의 보컬과 곡 해석력은 스쳐 지나가는 컬러링에서마저 듣는 사람의 귀를 잡아끄는 매력을 전달한다.
5. 강승윤의 ‘본능적으로 (Feat. Swings)’
“강승윤의 ‘본능적으로 (Feat. Swings)’!” 정보석에게 가장 최근 즐겨듣는 곡을 묻자, 그는 곧바로 강승윤이 부른 ‘본능적으로’를 뽑았다. “노래를 너무 잘 소화했잖아요. 그리고 이 친구는 제가 보기에 스타성이 굉장해요. 그 매력을 잘 갈고 닦으면 대성할 수 있을 거예요.” 정보석이 단지 ‘본능적으로’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Mnet 를 즐겨보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만큼 그는 반젤리스로부터 강승윤까지, 시대의 흐름을 익히며 이 시대의 인간을 표현한다. 정보석의 연기가 그의 이름 그대로 ‘보석’처럼 빛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정보석은 가 채 끝나기 전, MBC 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2000년대를 주름잡은 대기업 회장이다. “조필연과 비슷한 캐릭터로 보실 분들도 있겠지만, 시대나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개발 시대의 정치인과 현대의 기업인은 사고방식이 또 다르거든요. 지금 대기업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연기에 녹여서 이 시대의 재벌을 보여주고 싶어요.” 또한 그는 을 찍는 사이 연극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음악 감상과 연극과 드라마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기활동. 정보석은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씩 늘어가면서.
글. 강명석 two@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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