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언제나 남자에게 승리한다. 그녀의 친구를 무시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친절해도 안 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전화를 받느라 “왜?”라고 대꾸해도 안 되는 판에 팔짱을 뺐다가는 큰일이 난다. 옛 여자 친구의 십자수 선물을 간직했다가 들통이 나거나, 다른 친구들의 편을 들었다가는 지구 종말에 버금가는 파국의 시나리오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한다.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라도 지를라 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뿐이다. “여자가 잘못했다고 하는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어요?” 정색하며 존댓말로 공격 하거나 “무릎이라도 꿇을까?”라고 눈을 흘기면 어찌 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결국 남자는 오늘도 “나한테 질렸네”라는 의심과 “왜? 내가 창피해?”라는 추궁에 시달린 끝에 똑같은 말을 들으며 패배를 예감한다. “헤어져. 그래, 헤어져!” 상황이 여기까지 진행되면 당하는 남자나,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할 말은 한 가지 뿐이다. “헐!”

“는 하드 트레이닝이라고 생각해요”
애교로 무장했다가도 무섭게 화를 내는 여자를 이해인은 하드 트레이닝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극기 드라마’라고 설명될 만큼 tvN 의 ‘헐’은 지극히 남성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공격성을 포착하는 코너다. 그래서 ‘여자’를 연기하는 이해인은 매주 감정의 극단을 내달린다. 달콤한 애교로 무장한 채 등장해서는 결국 화내고, 소리 지르고, 토라지고, 급기야 쪼그려 앉아서 우는 시늉까지 하는 일이 마냥 즐겁지는 않을 텐데 그녀는 선선히 웃으며 말한다. “아마 나중에 평범한 감정으로 연기를 하면 오히려 쉽게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하드 트레이닝이라고 생각 하고 있어요.” 설정만 달라졌지 매번 비슷한 패턴에 점점 탄력이 붙어서 이제는 제작진이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고 할 정도로 애드리브가 술술 터져 나오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은 없다. “실제 성격은 전혀 달라요. 귀찮은 걸 싫어해서 남자친구에게 화가 나도 따지질 않거든요. 말해서 뭐해요.” 수월하다 못해 털털한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이다. “헐.”

심플하다. 그것은 방송 안팎의 이해인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다. 그녀는 굳이 팔색조가 되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거나 일부러 여러 겹의 베일로 자신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필’이다. 갑자기 피아노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열여섯 무렵에도, 공식 얼짱이 되기 위해 홀로 서울 여행을 했던 열여덟의 어느 날에도, 죽도록 매달렸던 피아노를 버리고 연예인이 되겠노라 무작정 상경했던 스무 살 시절에도 그녀를 움직인 것은 어떤 논리도, 계산도 아닌 오직 자신의 판단이었다. 덕분에 “십대 때 시작해서 연습생 시절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질 정도로 축적된 시간에 아쉬움을 느끼지만 대신 이해인은 경험이라는 선명한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살 빼고 예뻐 보이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감독님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시더라구요”라고 정직하게 어리석은 지난날을 털어 놓거나 “솔직히 연기가 공부해서 늘겠나, 그런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같아요”라고 담백하게 반성하는 그녀에게서 조금의 꾸밈도 감지되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확신이 자라는 여름을 기다린다



바로 그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느낌으로 이해인은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을 연상 시킨다. 스스로 “흔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라며 쿡쿡 웃거나 “긴 생머리 하고 싶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콘셉트를 밀고 나갈 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느닷없이 진지해 질 때, 그녀는 청량하다. 소녀의 마음에서 자라났다고 하기에는 기대 이상으로 호쾌한 그 느낌은 명랑함보다 크고, 쾌활함보다 신중한 고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정답에 자신을 맞춰 넣으려고 하지 않는 그 싱싱함은 지루하지 않은 매력으로 긍정된다. 그래서 볼 때마다 뾰로통해도 남자는 여자를 사랑스럽게 달래고, 시청자들은 그녀에게 매일 더 많은 기대를 보내게 되는 가 보다. 진짜 여름이 올 때쯤이면 그녀의 `필`이 보다 많은 사람의 확신으로 자라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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