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은 줄기차게 일일 시트콤을 만들어 온 감독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는 시트콤이란 대개 김병욱의 작품이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한국 시트콤의 역사를 독식했다. 하나의 세상을 만든 자를 신이라 부른다면, 김병욱은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사나이다. 그가 쌓아 올린 세상의 울타리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그곳에는 여전히 김병욱이라는 신이 창조해낸 모든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는 부유하지만 괴팍한 가장을 만들었고, 무능하고도 고집 센 아들을 만들었고, 그런 아들을 사랑해주는 아내를 만들었고, 어리석은 청춘들과 지나치게 영리한 어린이들을 만들었으며, 마음껏 놀릴 수 있는 탈권위의 쾌락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웃음과 이 모든 재료들이 뒤섞여 비로소 실제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현대 가족의 초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시니 슬펐다.

슬픔은 애초에 선언되어 있었다

MBC 은 출발지점에서부터 그러한 슬픔의 정서를 짊어진 작품이었다. 불과 6회 만에 신애를 잃어버린 세경은 좌절과 절망의 눈물을 보였고, 46회에 이르러 아버지와 재회한 이들 자매는 시청자들을 통곡하게 만들었다. 마냥 밝아 보였던 정음에게는 첫사랑과 애완견 히릿에 얽힌 아픈 상처가 있었고, 매사에 당당하고 씩씩한 현경은 엄마가 만들어 준 콩국수를 떠올리며 슬픈 기억을 되새겼다. 여전히 소동은 일어나고, 시청자들은 이들을 보여 웃음을 짓지만 눈물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은 웃음과 눈물이 모둠으로 제공되는 패키지가 아니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극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이것은 감독의 연출력이 드디어 25분의 시간 안에 원하는 모든 요소를 버무려 낼 수 있을 만큼 원숙해졌음에 대한 증거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산발적으로 흩어지는 에피소드들이 다만 하나의 제목으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세계관 안에서 기능 하고 있다는, 보다 거시적인 발전의 징후다.

처음부터 슬픔이 선언되었다는 것은 결국 이 맞이한 결말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죽음’이 김병욱의 작품 안에서 트레이드마크처럼 사용되어 온 비극의 장치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에서 시도된 엄마의 죽음이나 MBC 에 등장한 유미의 퇴장은 작품 안에서 파열음이었다. 이것은 안일한 평화로움에 대한 반발이며 에서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은 오히려 극 초반, 복권에 당첨되어 별안간 집을 떠나는 가정부였다. 예상치 못한 부재는 당혹스럽지만, 김병욱은 그것으로도 남아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을 말한다. 그녀가 내던진 마늘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매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수고로움 대신에 미묘한 불편함을 견딘다. 웬만해서는 꿈쩍하지 않는 그들의 굳은 마음이 바로 감독이 발견한 슬픔의 씨앗이다. 그리고 김병욱은 그 싹을 제거해 내기 위해 세경을 만들었다. 영문을 묻기 전에 우선 마늘을 주워 담는 그녀는 그래서 김병욱이라는 신이 최초로 세상에 내려 보낸 그의 진심이다. 세경에게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선물

SBS 는 멀리서 산부인과와 주변의 인물을 관망하며 시시덕거리는 이야기였다. 출산의 성스러움이나 의료 행위의 긴박함은 드라마에 그늘을 드리우지 못했다. 역시 소방대원의 이야기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이들의 고뇌보다는 곰 가죽과 색소폰을 향한 노구의 욕망을 희화화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낄낄대는 동안 김병욱은 집요하리만치 각자의 캐릭터들에 디테일을 심어 주었다. SBS 에서 그의 전작에 출연했던 박영규와 노주현이 기존의 캐릭터를 가진 채로 섞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김병욱식 인물 구성의 실험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완벽히 복원해 내던 그는 에 이르러 등장인물들에게 시청자의 감정을 이입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괴물 준하와 꽈당 민정은 특징적인 캐릭터인 동시에 보는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매개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경은 그저 세경일 뿐이다. 너무나 초라하고 나약하지만 세경은 무수한 디테일로 촘촘히 채워 넣은 그 어떤 캐릭터보다 강력하다. 마치 최신식 성능의 안드로이드가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작고 못생긴 실제 인간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세경은 김병욱이 스스로 숨쉬기를 허락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 세경에게 죽음은 감독이 선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식모와 주인집 아들이 아닌 관계로 나란히 앉아 고독한 인간이 고독한 인간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어떤 희망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외의 순간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 희망으로 위안을 주는 것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그래서 “그 아름다운 시간을 박제하고 싶은 충동”을 실현시켰다. 그리고 세경이 생생했던 만큼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충격적이다.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한 희망과 무신경한 발전보다는 추악해지지 않는 슬픔으로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김병욱은 일개 왕국의 주인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다. 왕은 백성에게 그들이 원하는 태평성대를 주면 되지만, 신은 칭찬을 바라지 않는다. 가장 사랑한 존재에게 안녕을 고하며, 그는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천국에 도달할 수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전한다. 돌을 던져라. 신은 피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슬퍼할 뿐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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