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은 예쁘다. 동그란 눈과 이국적인 미소가 작은 얼굴 안에서 소녀처럼 어우러진다. 그런 그녀의 외모는 연약해보이지만, 그녀가 선택해 온 캐릭터들은 결코 유약하지 않다. 지독한 운명을 걸머진 여인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가 될지언정 그녀가 뻔한 신데렐라나 캔디로 소모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악바리도 바보도 아닌 그저 평범한 스물아홉 처녀 송이가 된 속의 강혜정은 조금 낯설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다고 해서 그녀의 선택을 거부할 수는 없다. 분명히 한때 강혜정은 대체 불가능의 영역을 사수하던 배우였고, 그로 인해 주목 받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 영역에서 몇 발짝 멀어졌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란 법도 없다. 혹시 ‘무릎 팍 도사’를 촬영하면서 울었느냐는 질문에 “아아뇨. 저 어디 가서 울고 그런 여자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 여전히 강혜정은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영화 의 시작부분에서 송이는 문제의 원인을 스물아홉이라는 나이 탓으로 돌린다. 비슷한 나이가 되었는데 실제로 공감하는 설정인가?
강혜정 : 직접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데,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을 많이 들었다. 영화와 똑같은 일은 아니지만 하고 있는 일이나 상황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만두고 시집이나 갈까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야 뭐,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으니까 완전히 공감은 못해도 심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스물아홉의 성장통 이미 열아홉에 겪었다”

결혼 문제가 아니더라도 서른이라는 계기로 인생을 돌아본다거나 하게 되지 않나.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는 나이니까.
강혜정 : 오히려 열아홉에 그런 마음이 심했던 것 같다. 나는 스무 살에 독립을 했으니까. 땡전 한 푼 없이 집에서 나와서 친구들 집을 전전하다가 돈 벌어서 단칸방 하나 얻고 그랬었다. 그때는 내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되게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서른은 스물여덟에서 스물아홉 넘어가듯이 특별한 감정이 없이 맞이할 것 같다. 남들보다 앞질러서 성장을 한 셈인데, 그래도 배우는 경험이 재산 아닌가.
강혜정 : 남들보다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먼저 많이 겪은 것 같긴 하다. 그래서 20대 초반에 그런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20대 초반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 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다. 장르 안에서 어떤 것을 성취하고 싶었던 것인지.
강혜정 : 영화 전반적으로 커다란 철학을 갖고 진지하게 이끌어 갈 생각은 없었다. 장르 특성상 하하호호 웃으면서 보고, 나와서는 ‘야, 뭐할래’ 그래야 하는 영화다.

물론 영화의 분위기는 그렇지만 이야기와 별개로 송이는 마냥 사랑스러운 인물은 아니다.
강혜정 : 내가 그 인물을 맡아서 좀 더 신경질적으로 변한 부분은 있을 것 같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마냥 귀엽고, 조금 엉뚱하고 통통거리는 애였는데 약간 히스테릭하고 떽떽거리는 애로 변했다. 나도 그런 편에 속하지만, 매사 싫은 건 아닌데 괜히 말이 곱게 안 나가는 성격들 있지 않나. (웃음) 그런 모난 부분이 영화적으로는 리얼한 설정이기는 했다. 부모는 이혼하고 회사는 잘 안 풀리는 스물아홉다운 태도라고나 할까. (웃음)
강혜정 : 사실 이 나이가 되면서 좀 더 직설적으로 변하는 부분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진(한채영)이나 보라(허이재)를 만났을 때 좀 경계하고 날 서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송이는 멍청하게 그들에게 끌려간다. 말하자면 헛똑똑이지. 솔직히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송이에 대해서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는 것도 이야기를 역행하기 위한 기능적인 설정일 뿐이고, 결국은 스스로에게 ‘나 괜찮지’를 확인받기 위한 과정이었다.

“한때는 나를 해소시킬 작품이 없는 건가 답답했다”

편안하게 볼 영화라는 의미로 이해하겠다. 그런데 한 때의 당신은 영화마다 방점을 찍지 않았나. 최근의 작품들은 무엇으로 수렴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강혜정 : 대한민국에서 배우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 영화 시장이 그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한정된 시나리오 안에서 움직여야 하고, 나 역시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까지만 해도 원하는 캐릭터에 욕심을 냈지만, 이 영화를 선택할 때는 좀 편안한 심리로 가고 싶었다. 전에는 모든 캐릭터들이 가슴 속에 한이 있었고, 그걸 외면하거나 폭풍처럼 터트리는 식이었잖나. 그런데 배우로서 내 캐릭터가 좀 안전해진 게 아닐까 얘기하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캐릭터만 따지자면 여전히 어렵고 강한 인물을 선택해 왔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캐릭터의 강한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모호함의 문제가 아닐까. 이전의 역할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강혜정만이 줄 수 있는 답안지였는데, 최근에는 정해진 틀 안에 강혜정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배우가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랄까.
강혜정 :내 캐릭터가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았는데 왜 나에게 그 모든 책임이 돌아오는지 답답할 때가 많았다. 강혜정의 선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닐까. 다른 여배우들보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느낌이 강한 편이다.
강혜정 : 언젠가 대학로에 나갔더니 온통 불닭집이더라. 그런데 얼마 있다가 가보니까 하나 찾아 볼 수가 없더라. 한국 사람들은 참 빠르다. 전후로 참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굉장한 성장세를 탔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시나리오도, 소재도 한정적이다. 나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생각할 시간은 있었다. 그런데 영화화 되는 일은 참 어렵다. 사실 도 원래는 라는 작품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영화가 투자가 어려워지면서 새롭게 쓴 시나리오였다. 재정적인 문제가 풀리면 를 만들어 보자는 전제로 시나리오 나오기도 전에 캐스팅이 되어버린 경우였다.

사람들이 강혜정에게 원하는 작품이 제작될 수 없는 여건이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강혜정 : 내가 해왔던 작품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너무 여러 가지의 것들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시기상조다. 그리고 그 모든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만큼 에너지를 내가 고스란히 갖고 있느냐, 그것도 큰 문제다. 있다, 없다를 말하기 전에, 부딪혀 봐야 알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런 기대와 엇나가는 방향으로 가보고 싶은 청개구리 근성이 있기도 하고. (웃음)

방송에 타블로가 나와서 하는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여전히 당신의 취향은 말랑말랑한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웃음) 소통의 창구가 마땅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혜정 : 한때는 그래서 답답하기도 했다. 왜 나를 받아줄만한 창작이 없는 건가. 나를 해소 시켜줄 작품은 없는 건가. 그렇다고 내가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답답함에 시달린 건 아니었다. 작품을 할 때는 좋았다. 그런데 풀지 못한 응어리가 있었던 것 같긴 하다. 미쳐서 날뛰는 느낌. 옛날엔 그랬었는데. 어느 정도 내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문제를 살다보면 답이 나오는 것 같다”

예전보다 무모하거나 과감한 도전을 못하는 그런 마음 말인가?
강혜정 : 조건이 같질 않아서 그렇게 미쳐지질 못하는 것 같기도 한데. 옛날에는 정말 미쳤었다. 완전히 중독되는 거다. 머리에 ‘빵꾸’가 나도 촬영 하겠다고 소리 소리 지르고 그랬었다. 통로를 스스로 못 찾겠다. 내가 스스로 무엇에 가장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그 답부터 정확히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방향일수도 있다. 만약 답을 찾는다고 해도 모든 환경은 유기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금방 해결이 되지는 않겠지만.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조급해 하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자신감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강혜정 : 그동안 작품을 받으면 주로 그 인물의 성격을 실생활에 가져와 봤었다. 자연스러움을 직접 경험하는 거다. 를 할 때도 실생활에서 상은이처럼 굴면 연기할 때 가짜로 만들어진 것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는 반대로 내가 갖고 있는 특성을 캐릭터에 심어 주는 것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한 작품이다. 조급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이것저것 다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을 시작할 때만 해도 슬럼프였다. 그런데 누군지는 잊었는데 ‘문제를 살라’는 얘기를 했더라. 문제를 살아 보면 답이 나온다는 말인 것 같은데, 맞는 얘기다. 지금 해결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어우, 답도 없이 힘들더라. 어디서 행위 예술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고. (웃음) 대신, 그렇게 힘들어 할 때 남편이 옆에서 내 얘기를 많이 들어 줘서 마음의 무게를 많이 덜어 줬다.

남편의 역할을 빼 놓을 수는 없겠지만, 최근 방송이나 인터뷰에서는 점점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이 늘어나더라. 작품 외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나?
강혜정 : 사실 방송 나와서 영화 얘기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걸 재미있어 하거나 궁금해 하지는 않잖나. 사람들이 나에게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뭐 하러 그런 얘기를 어거지로 하겠나. 물론 알아서 수위 조절을 하기는 한다. 신혼여행 가는 공항에서의 모습이 찍히고, 시부모님이 아침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전방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예전의 강혜정이라면 못 참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혜정 : 제대로 봤다. 절대 못 참았다. 사람들이 내 사생활을 캐는데 대한 결벽증이 있었다. 어느 동네에 가서 밥을 먹건 “이 동네 사세요?” 그러면 네, 그러고. 형제 관계도 얘기 할 때마다 바뀌고 그랬다.

그저 배우로서의 강혜정만을 남기겠다는 의도였나?
강혜정 : 열일곱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오빠, 동생이 필요 없는 관심을 받게 되더라. 가족들에게 불편한 제약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심지어 동생은 나랑 이름까지도 비슷한데 학교 다니는 내내 아무에게도 말을 안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졸업할 때 언니가 강혜정이라고 하니까 아무도 안믿었다더라. (웃음)

“출산 후에 내게 올 작품들이 기대된다”

최근의 상황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강혜정의 누구라는 타이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웃음)
강혜정 : 지금 내가 타블로의 아내로 살아가는데, 무슨 소리인가. (웃음)

아기에게도 강혜정, 타블로의 아이라는 타이틀을 미리 물려주지 않을 것 같다.
강혜정 : 우리가 브래드 피트나 조니 뎁 처럼 돈을 많이 받는다면 큰 정원에 아이를 숨겨 놓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지 않나. 놀이터에만 나가도 누구 앤지 다 알텐데. (웃음) 다만, 일부러 공개해서 주목받게 하지는 않겠지. 뭐, 얘도 낳아 봐야 어떻게 클지 알 것 같다.

편안한 모습이 보기 좋다. 한편으로는 당신에게 힘들고 우울한 모습을 강요해 온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강혜정 : 작품을 할 때는 우울하고 힘들기도 하다. 특히 같은 경우는 많이 고생 했다. 그렇지만 작품이 끝나고 나면 잔상이 오래 남거나 빠져나오는데 힘들다거나 하는 편은 아니다. 과연 그래서 히스 레저가 죽었을까. 사람들이 모두 에서 그의 연기를 칭찬했고 그가 조커가 되기를 원했지 않나. 하지만 그게 힘들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다른 문제였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일터가 행복한 게 가정 생활에도 더 좋지 않겠나.
강혜정 : 바로 를 찍을 때 그랬다. 그렇지만 작품을 선택할 때는 시나리오 읽어보고 아우, 재밌다 하면 선택한다. 다음번 선택도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른다. 왜 선택했냐고 물어도 대답을 모를 상황이 올 지도 모르고. 그리고 아무래도 출산 후에는 컨디션이 좀 달라져 있을 테니까 나를 지켜보고 역을 주실 것 같다. 그래서 기대 된다.

그렇다면, 일단 개봉하는 영화의 성적에는 어떤 기대를 하나.
강혜정 : 는 진짜 잘 됐으면 좋겠다. 언제나 흥행을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하지는 않지만 내가 선택한 모든 영화가 손익분기점은 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올 연말에 우리가 유일한 로맨틱 코미디다. 좀 경쟁력 있어 보이지 않나?

스타일리스트. 최진영
메이크업. 김활란
헤어. 양선영
의상. DEMOO, PURE DKNY, JIAKIM, ANN DEMEULEMEESTER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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